기독교의 신학자들은 창세기 1장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 왔을까? 역사 속에 나타난 많은 신학자 중에서 창세기 1장 해석에 있어 중요한 두 신학자를 살펴보려 한다. 바로 오리겐과 칼빈이다. 한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학의 초기 형성기에 있어 미숙한 가운데 창조 신앙 해석의 틀을 놓은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은 성경과 역사 속 신학자들의 해석을 바탕으로 창세기와 성경 해석의 바른 틀을 세운 핵심적인 신학자 중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신학자의 창조 해석 방법에 대해서는 필자가 상세하게 다룬 적이 있다. 여기서는 창세기 해석의 바른 틀을 제공하고자 고뇌한 대표적 신학자로서 두 사람을 살펴보려 한다.
창세기 1장 해석자로서 오리겐 다시 보기
오리겐은 신학의 미숙한 형성기에 활동한 사람으로 논란이 많은 신학자다. 하지만 초대 교회 당시 아무도 시도하지 않던 창세기 1장 해석에 접근한 학자라는 점에서 오리겐은 가장 두드러진 최초 신학자로서의 위치를 차지하는 중요한 학자다. 유대교가 아닌 복음과 기독교의 관점에서 그가 본 창세기 1장은 과연 어떤 계시였을까?
세상은 시간과 공간과 물질로 구성된다. 오리겐은 모세가 세상 기원에 관해 쓴 창세기 1장이야말로 역사적 사건 이상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즉 많은 구절에 단순한 세상 창조를 넘어 영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계시의 문자 속에는 신비적이며 깊은 실재가 담겨있다고 했다.
현대 과학자들과 전혀 다른 최초 신학자 오리겐의 창세기 1장 해석 방식
오리겐의 접근법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창세기 1장을 과학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해석 방식과 전혀 다른 접근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만일 유대인들이나 교회의 신학자들이 창세기 1장을 당시의 과학 수준이나 과학의 발전에 따라 늘 수정해 왔다면 창세기는 얼마나 누더기 책이 되어버렸겠는가! 오늘날 과학적 접근법으로 창세기 1장을 함부로 재단하고 단정 짓는 해석법이 얼마나 위험한 시도인가를 보여주는 보기이다.
성경은 최첨단 과학 기술 시대를 위해 준 책이 아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 속 모든 민족,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적응한 책이다. 지금의 과학 수준과 지금의 과학의 언어로 창세기 1장을 해석하려 드는 것이 좋은 해석법이 아니라는 것을 본 칼럼을 통해 지속적으로 논증한 이유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의 오리겐은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접근했을까? 당시의 과학 수준이나 철학으로 접근했을까? 기독교 최초 신학자로서 그는 어떻게 접근하고 있을까?
창조 자체에 대한 강조와 삼위일체
그는 당시 철학이나 과학으로 전혀 접근하지 않았다. 먼저 그는 물질의 선재(先在)에 대해 단호히 거부한 사람이다. 이것은 물질 창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 고대 철학 사상이나 최신 과학의 빅뱅우주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세상은 특정 시점에 분명 창조된 세상이다. 비록 그가 철학에 능통한 인물이기는 하였으나 하나님이 물질과 영원히 공존한다고 보는 철학의 관점과는 분명 다른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진 것을 볼 수 있다. 오리겐은 분명 창조 자체를 강조할 뿐이다.
신학자로서 오리겐이 지닌 세상 창조론에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어찌하든지 그가 삼위일체의 틀, 특히 기독론의 틀 안에서 세상의 창조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도 기성 과학계나 창조 과학이 오직 과학의 바탕과 눈으로 창세기 1장을 보려고 시도하는 것과 전혀 관점이 다르다.
오히려 오리겐은 눈에 보이는 물질계는 일시적이며 잠정적인 것으로 보았다. 세상은 형체가 사라지고 있으며(고전 7:31) 종말을 향한다. 즉 물질계에 속한 생명은 시작이 있되 유한하다. 피조물은 시작이 있었으나 종말을 가진 ‘허무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해 아래 새것은 없다.
창조와 타락과 회복까지 내다보는 창세기 해석
오리겐은 세상의 창조에 대해 성경이 ‘카타볼레’(καταβολή, 기초 놓음)라는 새롭고 고유한 말을 사용한다는 데에 주목한다. 이 말은 철학이나 신학에서는 전문 용어로 잘 쓰지 않는 단어다. 이 단어는 라틴어 성경에서 구성(constituo)이라는 부정확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헬라어로 이 말은 단순히 세상이 피조 되었다는 의미가 아닌 떨어뜨리다(deicere), 곧 아래로 향하여 던지는 행위(deorsum iacere)를 표현한다.
이 설명에서 우리는 오리겐이 세상 창조를 바라보는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곧 세상은 가장 완전한 상태로 하나님에 의해 하강(下降)한 것이다. 또한 이렇게 세상이 하강하듯 피조된 것은 세상(물질적 세계)이 결국 타락의 결과로 나타날 것임을 암시한다. 그것이 ‘카타볼레’의 특징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크티시스’(κτίσις, 창조)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은 세상에서 훈련 받도록 정해진 모든 영혼 그리고 그 영혼들을 곁에서 보살피고 다스리고 도울 준비가 된 모든 세력을 담을 수 있는 속성과 크기로 창조되었다고 오리겐은 역설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결국 모든 회복하시고 모든 것을 성화하시며 영광 받으실 하나님이다. 즉 이것은 창조와 타락과 회복까지 내다보는 창세기 해석이었다. 현대 과학에 이런 접근 방식은 당연히 있을 리 없다.
이렇게 오리겐은 사랑의 하나님의 본성 속에서 이 세상이 완전히 회복될 것임을 아주 강하게 믿은 사람이었다.
계시의 점진성 가운데서 오리겐은 분명 완전하다기보다 신학의 미완성 시기의 미숙함이 보이는 신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창세기 해석이 당시의 과학이나 철학의 기반이 아닌 삼위일체적 창조 사역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신학적 혜안이었다고 보여 진다.
현대과학으로 창세기 1장을 접근하는 것은 전혀 좋은 해석법이 아니다
오늘날 과학은 창조와 창세기 1장을 접근하는 데 있어 전혀 삼위일체적 접근에 대한 관심이 없다. 현대과학의 눈으로만 창세기 1장을 바르게 볼 수 있다면 성경은 과거부터 모든 역사 속 모든 민족, 남녀노소, 빈부귀천, 지식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그 눈높이를 적응한 책과 거리가 먼 계시라는 낯선 결론을 유도하고 만다. 그런 점에서 과학으로 창세기를 해석한다는 주장은 바람직한 해석법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현대 세속 과학의 눈으로 접근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접근 방식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창세기 창조 사건은 시대마다 다른 과학적 성과를 가지고 접근하는 그런 책이 전혀 아님을 보여준다. 즉 초대 교회 미숙한 성경 해석 시대의 오리겐의 접근법만 잘 인지했어도 내재(內在)의 학문인 현대 과학으로 창세기 1장의 초월 계시를 마음대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를 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이제 기독교는 과학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수동적 기독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이 문제는 필자가 지속적으로 지적하는바 과학이 아닌 바른 해석의 문제인 것이다.<계속>
조덕영(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과학과 신학> 교수)
#조덕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