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말씀 순종과 참된 경건

목회·신학
목회
야고보서 1:19~33
▲권태진 목사ㅣ군포제일교회

성경에 보면 돌아온 탕자 이야기가 나옵니다. 탕자가 가지고 나갔던 돈을 다 탕진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세 종류의 사람이 그를 맞이합니다. 한 사람은 아버지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 밑에서 수종 드는 종들이며, 또 다른 하나는 형님입니다. 이 세 종류의 사람을 보면 형님은 동생의 잘못을 마음에 기억하고 있고, 종들은 아버지가 시키는 것만 생각합니다. 종들은 탕자에게 신발도 신기고 좋은 반지도 갖다 주지만 수동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의 잘못은 기억하지 않고, 아들이 돌아왔다는 기쁨 속에서 매우 즐거워합니다.

저는 이 설교를 하기 전에 어느 방향으로 설교를 할지 생각해봅니다. 형님처럼 죄를 짓고 돌아온 부족하고 연약한 성도에게 “그렇게 살면 되느냐”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돌아온 것만으로도 흡족한 아버지의 마음처럼 사랑으로 다가갈지 생각해보니, 참 사랑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으로 대하는 것이 진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너희는 강하라, 너희는 거룩하라, 너희는 겸비된 자로 성장하라’ 말씀하십니다. 또 우리가 나약한 사람으로 살지 않게 하시려고 믿음의 시련과 연단을 주셔서 인내를 키우고 구원받은 백성답게 진실한 성도로 살게 하십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약 1:12)고 했습니다.
여러분! 시험을 참는 자의 누림, 옳다 인정받은 후의 상급은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생명의 면류관은 믿음으로 시험을 이긴 자들이 받습니다. 이러한 시험을 이기기 위해서는 욕심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가 욕심에 붙들려 살면 악령의 지배하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욕심에 붙들려 살지 않고 성령에 붙들려 살면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거룩한 영의 지배를 받고 살면 항상 믿음과 사랑과 온유와 절제와 양선과 충성의 열매가 있어 마음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155마일 휴전선 넘어 우리의 동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나라는 동족끼리 싸우고, 종교적 갈등, 지역적 갈등으로 테러와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욕심 때문입니다. 농사를 짓는 자들이 올해는 어느 지역에서는 농사를 짓지 말자고 작당합니다. 곡식 값이 내려갈 것 같으니까 쌀을 적당히 재배하여 생산량을 줄여서 고가로 팔고자 하는 정책 때문에 세상의 많은 사람이 양식이 없어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대자연 속에서 땀 흘려 농사해서 전 세계 사람들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는다면 굶어 죽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지배욕이나 명예욕을 버린다면 테러와 전쟁으로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남북통일이 되어서 우리가 함께 나누어 먹는다면, 외국에 많은 달러를 보내서 사치품을 사는 것으로 식량을 사서 북한에 보낸다면, 우리 동족은 굶어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나만 잘되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우리 동족들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욕심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또 사람이 시험받는 것은 다 욕심 때문이라고 합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속히 듣고 성내기는 더디 하라 헀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
듣기를 속히 하라는 것은 복음을 들을 때에 민첩하게 청종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그 내용을 빨리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성내는 것은 정신적 세계가 혼란에 빠진 상황입니다. 혈기를 부리는 상태는 영혼이 더럽혀져 있는 상태입니다. 성을 잘 내는 자는 남의 말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박한 결정을 하는 사람입니다. 성을 내서는 안 됩니다. 디모데전서에서는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분노와 다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잘 들으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게 되므로 분노와 다툼이 없습니다.
제가 어느 세미나에 갔습니다. 첫 시간에 강의한 연로하신 목사님이 젊은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새로운 임지로 갔다면 전임자를 존경하시길 바랍니다. 부임지의 조직도 바꾸지 말고 의자도 주보도 고치지 말고 가만히 두고 보십시오. 전임자가 한 일이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빨리 고치려고 하지 말고 시간을 많이 가지고 천천히 고쳐 가십시오.” 저는 경험에 의해서 저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다가 교육학을 전공한 젊은 부목사가 강의를 시작하면서 “여러분! 시간이 없으니 어디에 가든지 자기의 색깔을 분명히 나타내십시오. 빨리 이것도 하고 저것도 고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제에 대한 견해가 정반대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서 강의한 원로 목사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어떤 사람은 뒤의 강사의 말을 듣고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먼저 강의하신 목사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일이나 사람에게서 잘못을 찾아냈을 때, 그것을 빨리 고치려고 하다 보면 실수를 합니다. 이제 막 결혼한 사람이 ‘이 집에 고칠 것이 많다’라고 생각하면서 문제를 빨리 고치려고 한다면 가정을 문제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저는 부임해서 처음에는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던 교역자들이 2년이 채 못 되어 보따리를 싸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약 1:19)는 말씀 속에는 문제를 빨리 파악하고 그 문제의 해결은 천천히 하라는 교훈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2. 초대교회에 복음을 전할 때 세 가지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반응은 복음에 대한 거부반응입니다. 스데반이 초대교회에서 전도 설교를 했을 때 듣는 군중들이 화가 나서 귀를 막고 돌을 던져 스데반을 쳐 죽였습니다. 스데반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맞아 죽었습니다. 이런 반응은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또 지금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설교는 저렇게 하지만 나는 설교 말씀대로 못살아. 현실이 어떻고, 세상이 어떻고, 나는 못살아, 나는 저렇게 살면 실패해” 하면서 마음을 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반응은 마음의 찔림을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행 2:37~38). 우리가 어찌해야 하는지 베드로에게 물었던 사람들이 이썼습니다.
세 번째 반응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말씀을 꿀송이 같이 달게 여기면서 아멘! 하며 생명이 자라고, 영혼의 큰 힘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영혼의 만족을 얻고 새로운 힘을 얻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실이 고통스럽고, 낭패와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한 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자기의 삶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라고 했습니다. 그는 비천에 처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풍부에 처할 때라도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배가 부를 때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배고플 때라도 신앙이 흔들이지 않았습니다.
이 비결을 배우고 자족하는 신앙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자족하는 신앙을 가져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훈련시킬 때 좌절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 5:15~22)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잘 깨달아집니까? 아니면 성낼 수밖에 없는 환경이 여러분에게 엄습해 오고 있습니까?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지금 낙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신앙생활 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고 중단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까? 있다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다시 한 번 긴장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 이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듣기만 하고 행함이 없는 자는 이중적인 생활을 합니다. 외식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식을 채워주시고, 행위는 그 지식을 온전케 합니다. 듣기만 하고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고쳐야 함을 알면서도 돌아서서 금방 잊어버리는 자와 같습니다.
얼굴에 시커먼 것이 묻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거울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거울을 볼 때 ‘아이고 여기에 시커먼 것이 묻었구나. 내가 이것을 빨리 씻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거울에서 눈을 뗀 후에 돌아서서 잊어버립니다. 그렇다면 거울을 보는 사람이나 보지 않는 사람과 똑같이 사는 것입니다. 오늘 내용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은 다음에 마음 속에, 환경 속에 고칠 것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듣고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은 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고 돌아서서 고쳐야 할 부분, 씻어야 할 부분을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오시면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생각, 기도해야 되겠다는 생각,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며 순종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다가도 집에 돌아가면 곧 잊어버린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이 함께 회개하고 바르게 살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말씀이 귀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행위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유익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복은 지식에 의해서 심어지고 행위에 의해 열매가 됩니다. 성경을 바르게 알면 바르게 살 수 있는 힘이 생기는데 그 바르게 하는 힘을 굳게 잡고 생활해야 그로 인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성경은 선을 알고 행치 않는 것이 죄라고 말합니다.
또 선을 알고 행치 않는 것은 주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복과 누림과 잘되는 것은 행위로 완성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그대로 행하십시오. 이렇게 할 때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4.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경건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당시에 말만 잘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경건하다고 말만 했습니다. 그리고 교훈만 강조를 하고 행위가 없는 외식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바리새인이 판을 쳤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를 속였습니다. 경건은 진실을 생명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만 경건을 말했습니다.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얼굴이 훤하고, 성경책을 옆에 끼고 걸음도 천천히 걷고, 말도 좀 점잖게 하는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이 말하는 아름다운 경건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경건의 시작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인도로 시작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고아와 과부’는 누구입니까? 부모가 없고, 의지할 대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당시 사회 속에 가장 불쌍한 사람을 가리켜서 고아와 과부라 칭했습니다.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한다면 우리 문화 속에서는 노인들도 과부와 같습니다.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을 환난 중에 도와주는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측은히 여기는 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종교는 윤리와 도덕이 있습니다. 그러나 유물론, 무신론은 윤리와 도덕을 버리고 세상 복만을 추구합니다.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경건한 삶의 자세가 아닙니다. 불쌍한 사람을 돌아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는 경건입니다. 그런 사람이 복을 받고, 그런 교회가 부흥합니다. 이에 참여하는 성도는 복을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서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 1:17),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사 1:23). 이스라엘이 그렇게 타락했습니다. 에스라서에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스 7:10) 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으로 연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외부의 사랑과 연결되는 것만이 경건의 완성은 아닙니다. 진정한 경건에는 또 한 가지가 요구되는데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하였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상대를 향하여 선한 손을 뻗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를 돌볼 뿐만 아니라 또 하나는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결의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성결의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 생활은 많은 사람을 옳은 곳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요,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인의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줄 수 있는 환경입니다.
우리가 경건한 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녀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부부가 안 싸우면 됩니다. 서로 간에 사랑하고 아껴 주면서 사는 것입니다. 주일에 나와서 마음껏 하나님께 찬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에 가서도 타락하지 않고 사랑 실천하며 전도하는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이후 진정한 경건을 행하는 일에 모두 다 참여하고 복의 대열에서 한 사람도 제외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성경 말씀대로 흠 없는 경건,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서 돌아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참된 경건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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