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0년 공화당의 조지 부시와 민주당의 앨 고어가 대통령 후보로 격돌한 때의 일이었다. 기독교인들의 표를 의식한 부시 후보가 가는 데마다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I am a born again Christian)라고 외치고 다니곤 했다. 이에 뒤질세라 앨 고어 역시 한술 더 떠서 “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성경구절은 요한복음 16장 3절입니다”(I am a born again Christian and my favorite verse is John 16:3)라고 고백했다.
[2] 보통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좋아하는 편인데 다른 성구를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상하다 생각한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 앨 고어가 좋아한다는 구절을 성경에서 찾아보았다. 요 16:3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내용을 확인한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런 내용의 성구를 좋아할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무슨 얘기일까? 사실 앨 고어가 가장 좋아한다는 성구는 요한복음 3장 16절인데, 실수해서 요한복음 16장 3절로 거꾸로 말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3]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요한복음 3장 16절도 몰라서 계속 거꾸로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맞을까?’ 이런 의구심 속에 앨 고어는 끝내 선거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고백했던 성구가 적지 않은 자기 당 소속의 그리스도인들을 떠나게 만든 원인으로 작용하고 만 것이다.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성경에서 제일 중요한 구절로 알고 있다. “성경 66권의 내용을 다 없애고 한 구절만 남기라면 어떤 구절을 남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십중팔구 요한복음 3장 16절을 얘기할 것이다.
[4] 과연 요 3:16절이 성경 전체의 내용 가운데 가장 소중한 구절이 맞을까? 언젠가 페이스북에서 영상을 하나 시청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유명한 목사님 다섯 분이 요한복음 3장 16절로 설교한 내용을 3분짜리로 요약해서 마치 한 사람이 설교한 것처럼 이어놓은 영상이었다. 그렇게 내용을 하나로 연결해서 만든 이의 솜씨에 우선 놀랐다. 다음은 대한민국 최고 설교자들이 외친 복음의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이 한쪽으로 치우침은 물론이요, 복음의 핵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5] 전세계 기독교인 거의 대다수가 요 3:16절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로 알고 있는데, 이보다 더 큰 착각과 오해가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하나씩 정리해보자. 우선 요한복음 3장 16절 한 절만 달랑 떼서 암송하거나 묵상하는 이들이 많은데, 그렇게 하는 자체가 요한복음이라는 전체 문맥을 해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요 3:16절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기독교인이면 누구나가 다 아는 친숙한 구절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간단하고 쉬운 내용이다. 일단 이 구절은 16절 한 절만 딱 떼어 내서 암송하면 안 된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16절은 요한복음 3장이라는 전체 문맥과 흐름을 이어가는 내용 중 아주 작은 부분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일 3:16절 한 절을 달랑 떼어 내서 암송하려면 반드시 이런 내용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마다’가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자마다’로 수정 된 것이 보이는가? 이것이 본문의 저자인 요한의 원래 의도이기 때문이다.
[7]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믿음’이라는 단어와 ‘순종’이라는 단어를 혼용했다. 사실 ‘믿음’보다는 ‘순종’이란 말을 더 많이 사용했다. 요 3:36절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았음에 주목하라. 대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한 마디로 하면, 요한에게 믿음은 순종과 다르지 않는 동의어였단 말이다.
[8] 순종이나 행함이 배제된 믿음이 가져온 영적 폐해를 우리는 교회 안에서 자주 보아왔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복음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행함이나 순종은 무시한 채 믿음만 강조하는 반쪽짜리 복음(half gospel)을 온전하고 완전한 복음으로 알아온 까닭에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행함이나 순종이 없는 입술만의(lip service) 믿음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의 열매가 있는 신앙이라야 참 신앙이라 말할 수 있다. 요한이 그걸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도 바울도 야고보도 똑같이 그 사실을 거듭 거듭 강조했다.
[9] 예수 믿어서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 아님을 다시금 가억하자. 복음은 죄를 용서 받고 천국행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다는 소식이 아니라 역사의 질곡 가운데서 하나님이 왕이 되어 통치하신다는 선포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외치신 한 마디가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일’(행 1:3)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기쁜 소식’이라는 말이다.
[10] 한 복음성가의 가사를 참조해보자. “복음 들고 산을 넘는 자들의 발 길 / 아름답고도 아름답도다 / 평화 전하며 복된 소식을 외치세 / 주 다스리시네 / 주 다스리시네, 주 다스리시네!” 이 찬양은 이사야 52:7절에서 왔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사야의 선포는 ’바벨론의 몰락과 종살이하는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언하는 메시지‘였다. ‘네 하나님이 왕이 되셨다’는 선언은 하나님의 평화의 통치, 선한 통치, 구원의 통치를 의미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왕이시다’라는 선포를 내가 정말로 기뻐하는가?’ 하는 질문에 우리는 어떻게 답해야 할까?
[11] ‘나는 진정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을 천국행 티켓을 손에 넣은 것보다 더 기뻐하는가?’에 관해서도 답해야 한다. 이 질문은 우리가 지닌 기독교 신앙의 근원적 의미를 되짚게 한다. 우리는 자주 묻는다. ‘잘 되는 나, 육적인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까지 축복받은 나를 추구하지 않는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라고 말이다. 이 질문이 타당한 질문이라면 수많은 시험과 역경과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세상적인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복음의 근원적인 진리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았던 욥이나 바울의 삶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아야 마땅할까? 헛되고 헛된 삶이었다 조롱하며 비판할 수 있을까?
[12] '복음의 핵심', '완전하고도 온전한 복음'이란 예수 믿고 죄사함 받아 천국에 가서 영원한 삶을 살게 되는 그것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의 일에 최우선적 가치를 두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열매 맺는 그것에 있음을 기억하자. 예수 믿어 영생을 얻는 일은 복음의 핵심이 아니라 부차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기억하자. 요한복음 전체, 특히 요한복음 3장 전체가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여 순종이란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 참된 신앙이 복음의 핵심이고, 그것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들을 행동으로 이뤄드릴 때 이 땅에서의 육적인 복은 물론 천국에서의 영생이 선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13] 그간 문맥을 무시하고 한 절씩만 달랑 떼어 내서 암송해온 성경구절 탓에 '기복주의', '번영주의', '만사형통주의', '기도만능주의'가 이 땅에 생겨난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전후 문맥과 연결시켜 ‘순종함’을 ‘믿음’에다 보태서 첨가한다면 한 구절로서도 충분히 제대로 된 완전한 복음이 될 수 있음을 꼭 기억하자. 요 3:16절 말고 한 구절로 얘기할 수 있는 제대로 된 복음이 있다면 마 6:33절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그의 나라와 의’라는 우선적 중요성(priority)을 파악하지 못한 채 ‘이 모든 것’이라는 부차적인 내용에만 치중해서 살아간다면 기독교는 앞으로도 계속 '싸구려' '저질'의 '반쪽짜리' 복음과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14] ‘참 복음, 순 복음, 온전한 복음, 완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파악한 이상, 오늘부터 우리의 믿음은 새로운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 주께서 수난 당하신 수난주간을 맞아 남은 우리의 생을 어떤 모습으로 주님처럼 살아드려야 제대로 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를 꼼꼼하게 점검해보는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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