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없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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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지영 목사
내가 고등학교 시절 처음 교회에 출석하면서부터 끊임없이 밀려오는 것은 성경에 관한 의문이었다. 처음 교회에 출석하면서 성경을 읽게 되었는데, 어찌 성경 내용이 다 이해가 될 것인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모든 게 당연한 것이었고,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질문 대상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이 성경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거나 가르치고 나면, 설교나 강의에서 생긴 의문점을 가지고 그분들을 찾아가곤 했다. 그러나 나의 이런 태도를 처음에는 어느 정도 받아주는 듯했으나, 점점 귀찮아하고, 나중에는 의심하지 말고 믿으라고만 했다.

성경의 내용에 의문이 생긴 것을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무조건 믿는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만약에 그 궁금증이나 의문을 가슴에 묻어둔다면, 그 믿음이 과연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믿음이 될 것인가?

나는 그 시절에 교회에서 듣는 내용에 대해 생기는 질문을 목사님이나 전도사님에게 얘기했다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자, 교회의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그리고 대학생 형님 누님들께 물었지만, 그분들도 아무도 답을 해 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분들도 내가 가졌던 의문점을 궁금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아예 '궁금증 모드'를 가질 생각조차 못 했기 때문이라 추측해 본다. 교회에서는 의문점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가르치며 암시한다.

현재 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새가족반에서 그동안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본문을 다룬다. 그런데 이 본문을 다루면서 제일 먼저 그분들이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질문하기’이다. 그동안 당연시 여겼던 내용인데, 그 익숙한 내용에서 질문을 찾으라고 하니 적이 당황하는 모습이 태반이다. 그러면, 내가 그 본문에 해당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어떤 이들은 이 내용에서 저런 질문이 나오는 것에 신기해하고, 어떤 이들은, 사실 자기도 그런 의문을 품은 적이 있는데, 분위기가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하지 못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질문하면, 자기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으로 평가받을까 봐 적잖이 망설이다 포기하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목회자가 설교 시간이나 성경 공부 시간에 가르치는 것을 무조건 ‘아멘’하고 받아야 하는 분위기가, 그 설교나 성경 공부 중에 생긴 의문점을 해결하려는 교인들의 시도를 막아버리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게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질문 없는 사회가 되어 버린다. 목회자가 무엇을 얘기해도 무조건 ‘아멘’이다. 설교 시간에 “십일조를 안내면 암에 걸린다”고 해도 무조건 ‘아멘’이다. 그렇게 큰 교회에 적어도 지성인들이 어느 정도 있을 텐데, 이런 설교에 대하여 ‘왜 그렇지?’라고 의문점을 가진 지성인들은 없는가 보다. 만약에 그 설교 내용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하면, 머리로 판단하는 인본주의적인 자로 매도될까 봐 두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 중심이 아닌 인간 중심의 태도를 가진 자로 낙인찍히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이렇게 질문 없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나중에 자식이 생기면, 어릴 때부터 성경에 대해 던지는 아이들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한다. 그리고는 그런 질문은 아빠 엄마도 잘 모르니, 교회 목회자들에게 물어보라고 넘긴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넘겨진 아이들은 엄마 아빠가 겪었던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게 된다. 그래서 어린 나이 때부터 ‘의심하지 말고 믿는 것이 참 신앙’이라는 프레임에 갇히고 만다. 그래서 교회에서 정해놓은 틀 안에서 아이들이 자라면, 신앙 있는 청년이 되는 줄로 믿는다. 그러나 그들이 더 넓은 세상에 놓이게 되고 날카로운 도전을 받을 때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위축되고 마는 경우를 너무나 흔하게 목격한다. 이런 자녀들을 보고 부모들은 당혹해한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아이들은 의문을 가지면 안 된다고 배웠고, 그 틀 안에서 순응하며 자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혹시 신앙을 유지하게 된 자들은 다시 부모가 되었을 때, 당연히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다. 그리고는 신앙교육을 교회에 전적으로 떠맡긴다. 그것은, 자신들의 경험에 의하면, 성경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은데, 그 의문점들을 해결하는 과정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 믿으라고 하니, 믿는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았는가! 그러니 어찌 아이들의 질문에 당혹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그 아이들에게도 그냥 “그냥 믿어. 의심하면 안 돼. 믿음 떨어져. 구원 떨어져!”라고 할 것인가?

반면에, 자신이 그 의문점들을 고민한 적이 있고, 그것을 풀어보았던 경험을 가진 부모는 아이의 질문에 곤혹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질문을 흥미롭게 여기고, 자신이 나름대로 발견한 것들을 아이들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대물림의 한 부분이다. 혹시, 그 질문이 다 풀리지는 않았을지라도, 자신이 탐구했던 과정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수는 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아이들은 부모를 이어 그 질문을 위한 탐구를 이어갈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나누는 과정을 통해 성경을 좀 더 친숙하게 느낄 것이기에 나름의 탐구가 가능해질 것이다.

다음은, 스탠포드대학교의 교육대학원에서 최고기술책임자와 부학장으로 있는 폴 킴의 대담 일부를 녹취한 내용이다.

“질문하지 않는 사회, 그런 사회가 무서운 사회예요. 쉬운 걸 찾는다. 편한 것만 찾는다. 생각하기 싫다. 어떤 사회적인 현상이 일어났을 때, 뭘 그걸 질문을 해? 그냥 그런가보다 그러면 되지. 질문하지 않는 사회에는 변화가 없고, 배움도 없고, 혁명도 없어요. 우리나라 최근에 큰 질문을 했잖아요. (촛불집회에서) ‘이게 나라냐?’ 이런 질문을 했기 때문에 변화가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많은 사람이, ‘그게 나라가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원래 그랬으니까 그렇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합니다.) 부모가 그렇게 얘기하면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그런 사회가 될수록 배움이 없고, 변화도 없고 혁신도 없는 거예요. 그런 것이 없을 때 위험한 사회가 된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지요.”

폴 킴의 말을 근거로 현재 교회 현장을 진단해 보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들썩거리고 있다. 공포감이 밀려오자 인간의 숨어있던 속성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있다. 교회는 이 바이러스의 강한 전염성 때문에 공예배를 드릴 수 없는 상황에 부닥쳤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응이 다양하게 튀어나온다. 예배당에서 예배 의식을 거행하지 않으면 마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으로 여겨서, 죽으면 죽겠다는 식으로 예배당으로 모이는 교회가 있다. 예배를 자제해 달라는 정부의 권고를 두고 교회를 핍박한다는 식으로 저항한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서 확진자가 나오게 되어, 그들이 교회당 밖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옮기게 되는 형국이 벌어진다. 자신은 순교자가 되겠는 지는 모르지만, 자기로 인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는 살인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고려하지 않는가 보다.

이렇게 ‘묻지 마 신앙’에 전도된 자들의 행태를 보면 신천지 집단과 무엇이 다른지 구분이 되질 않는다. 목회자의 말에 거역하면 하나님의 저주가 내릴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거역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들의 가르침에 아무런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이 없기에, 그 지시를 거부하는 것 또한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질문을 용납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바로 그 교회는 위험한 교회가 될 가능성이 크지 않겠는가? 그 교회의 구성원들이 무너져 내릴 것이고,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가 타격을 입을 것이니 말이다.

이번 코로나 19 바이러스 사태를 계기로 지금까지 행하여 왔던 ‘예배’에 대한 질문이 수없이 터져 나오게 될 것이다. 더불어 그동안 수면 밑으로 눌러 두었던 신앙에 대한 여러 질문이 수면 위로 마구 떠 오를 것이다. 어쩌면 목회자는 성도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예상치 못한 상황을 통해 생겨난 질문에 대해 어떤 태도로 임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할 때다. 만약에 이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그냥 믿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태도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누른다면, 그 공동체의 체질은 허약해질 것이다.

질문을 가지고 오는 교인들이 있다면, 그리고 그 질문이 참 답하기가 어려운 질문이라면, 솔직하게 현재 상황을 인정하고 함께 그 질문을 풀어갈 길을 연구하기를 제안한다고 해서 교인들이 목회자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보고 목회자를 더 신뢰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던져지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 되고 있다. 이 위기를 기회로 삼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껍질이 아니라 그 속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위해, 교회는 질문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져야 한다.

어떤 질문이라도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그리고 진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던지는 질문이라면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무시할 질문은 없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한 질문이지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거부하기 위하여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어떠한 질문도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진지한 질문, 솔직한 질문을 왜 하나님이 싫어하시겠는가? 궁금증을 가지고 나오는 우리를 왜 귀찮아하시겠는가? 기탄없이 질문하시라. 진지하게 탐구하시라. 아는 것만큼 우리는 자유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안지영 목사(달라스 나눔교회, 미드웨스턴 실천신학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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