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설교] 옥한흠 목사의 ‘마태복음’ 강해 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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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시 찾아든 행복 (마5:5)

* 본지는 사랑의교회를 개척한 故 옥한흠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故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 이미지 캡쳐

산상수훈 8가지 복에 대해서 보고 있다. 8가지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특별히 세 번째 복을 좋아할 것 같다. 이유는 부동산하면 사족을 못쓰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이 나라를 위해서는 너무 불행한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경제가 후진성을 면치 못하며 계속 멍이 들고, 선진국과 비교해서 여러가지 면에서 문제를 들여다 보면 망국적인 토지, 투기가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전국의 60만 평에 땅을 사두는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이 지도자로 있으면 이 나라에 미래는 절대 밝을 수가 없다. 아마도 한반도 이 좁은 땅에서 다 쓸어내고 자기 가족만 살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여러분 땅을 가지고 싶으십니까. 온유한 자가 되시길 바란다. 그러나 틀림없이 사람들은 땅은 가지고 싶은데 온유한 자가 되라는 말씀은 달갑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온유함은 좋게 다가오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자연히 유약한 성격을 가진 이미지를 생각하게 된다. 성경이 부드러워서 남에게 싫은 말을 못하고, 우유부단에서 일을 맡겨도 안심이 안 되고, 비굴하게 굽실굽실 거리는 사람을 떠올린다.

언젠가 나이 드신 부인이 자기 사위를 못마땅해서 불평을 했다. 심성이 좋고 법이 없어도 산다? 진절머리 난다. 자기 식구 하나 먹여살리지 못한다. 성깔을 부려도 제 식구를 먹여 살리는 사람이 백배 낫다고 한다. 이처럼 너무 마음씨 좋고 온유함에는 부정적인 시각이 있다. 더욱이 오늘 사회에서는 적자생존에 냉방원리가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강한 자가 이긴다. 자기 자식이 약한 모습 보이는 것을 보기 싫어한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을 얻는다는 말씀이 깊이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깊이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결국 천하가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진리라는 것을 알게 된다. 온유한 자가 가장 강한 자이다. 그럼으로 땅을 기업으로 얻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선천적으로 타고 난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다.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고, 주님을 나에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이 기대할 수 있는 후천적인 성품이다. 다시 말해 성령님이 우리 마음에 오셔서 우리 마음을 가난하게 하고 그 다음 애통하게 만드시며, 그 다음에 형성되는 마음이 온유이다.

우리 모두는 충동을 맞이하면 야생마처럼 난폭해지기 쉬운 마음이 있는데, 성령께서 이 성품을 통제하시고 균형을 잡아주실 때 나타나는 것이 온유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예수님은 온유하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균형잡힌 성품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한 성품이 육화되어서 예수 믿는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 온유이다.

예수님의 온전한 성품을 표현하는 9가지에 온유가 포함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5장에 오직 성령에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9가지가 모두 예수님의 한 인격을 나타내는 요소요 아름다운 장미이다. 이 가운데 온유가 있고, 성령님이 만들어 주신다. 예수의 영인 성령님을 마음으로 모시면 그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의 기질을 바꾸어 주실 때 비로소 온유해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온유는 우리 믿는 자들이 착용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장신구와 같다는 말은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정하기로 예수를 믿는다. 그렇기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성령을 모신다.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며 우리 안에서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다스리고 천국을 이루게 하시는 절대자로 다스리신다. 절대자로서 우리를 다스리시며 그렇다면 성령은 우리의 성품을 온유한 자로 만드신다. 따라서 성령을 모시고 산다 하면서 성격이 온유하지 못하다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고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내가 온유한지, 아닌지는 어떻게 분별하는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처신을 하는 사람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욥처럼 처신해야 한다.

주식으로 떼돈을 벌었는가.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있다. 내가 지고 있는 재산과 자녀, 자랑하지 말라. 다 없어 질 수 있다. 욥이 그것을 경험했다. 욥은 어떻게 했는가. 알거지가 되었을 때 욥은 처신하기로 겉옷을 찢고 머리를 밀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배했다. 이 태도를 일컬어 하나님 앞에 온유하다고 한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어 왜냐고 따지고 싶을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고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이것이 온유한 것이다.

그는(욥) 어떻게 고백했는가. 주신 자도 여호와, 취하시는 이도 여호와시라며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하지니라하며, 절대로 입을 열어 범죄 하지 않았고,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온유한 자의 기념비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런 자세를 취하면 온유하다 하여 땅을 주시는 것이다. 욥은 나중에 땅을 얻었다. 잃어버린 것 보다 몇 배를 다 보상해 주셨다. 욥은 인생을 실패자로 산 것 아니라 땅을 얻었으니 승리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욥 정도에 기가 막힌 상황, 이해되지 않는 고통에 씨름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욥처럼 어떤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라. 그의 성실하신 약속들을 소망하고 기다려라. 저녁에 울음이 있다고 해서 그 다음날에 울음이 계속된다고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꼭 믿으시길 바란다. 그리고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할 수 있는 자가 되라. 이런 자세가 온유한 자의 자세이다. 이런 자에게 때가 되면 땅을 주신다.

온유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우리의 태도 뿐 아니라 사람을 향해서 우리가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는 것도 중요하다. 어떤 사람을 놓고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온유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 수 있다. 특별히 우리를 모함하는 자에게 향할 때 내 마음과 태도가 어떤지 보면 온유한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아마 모세를 놓고 우리 자신을 비교해 보는 것이 좋다. 민수기 12장 3절에 자신을 일컬어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하다고 말했다. 주님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말했다. 모세의 배경을 보면 이런 말이 납득이 간다.

모세는 하나님 다음으로 절대권위를 가진 지도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세의 형님과 누님이 결탁해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모세가 80세였고, 그의 형제들은 100살이 가까웠다. 형제 하나가 너무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다보니 질투가 생겼던 것 같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형제이다. 다른 사람은 존경을 해도 형제는 인정하지 않는다. 누님 미리암과 형님 아론이 백성들을 충돌질 하면서 인신공격을 했다. 모세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복수를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억울한 심정을 알아주실 것이라는 심정으로 조용히 기도하면 기다렸다. 이 태도를 보고 가장 온유하다고 했다.

온유는 화내고 격분하는 것과 많이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도를 많이 얘기했는데 ‘온유란 격렬한 분노와 전혀 화를 내지 않는 것에 중간’이라고 했다. 온유를 힘과 부드러움에 조화로 설명했다.

온유는 힘을 가진 자, 능력이 있는 자와 결부시켜서 얘기한다. 힘이 없어서 온유함은 감동이 없다. 다윗이 온유하다고 하면 진한 감동이 있다. 우리는 잘못하면 폭발하기 쉬운 분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잘 다스리고 길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얼마나 이것을 균형을 이루게 하느냐에 따라서 온유한 자가 되거나 안 되는 것이 결정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온유는 수행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철저히 다스려서 나타나는 온유를 말한다. 그래서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을 보라.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유익을 위해서 화를 내신 적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격멸할 때도, 박대할 때도 주님은 화를 한 번도 내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때는 백성들의 유익에 대해 필요하다고 할 때 내셨다. 성전에 들어가 경건하게 기도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장사꾼들 때문에 기도하지 못할 때 화를 내셨다. 이게 온유이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화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온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셨을 때 화를 내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화를 내셨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주님을 보면서 온유한 자로서 어떤 경우에 화를 내고 안 내는지 분별할 수 있다. 지금은 선거철이다. 정치개혁을 부르짖는 시민들에 소리가 많이 있다. 오늘 한국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면서 지역주의를 자극하고 조작하는 풍토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물러가야 한다. 지금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정치인들을 용납할 수 없다. 이런 것을 보고 분을 내는 자가 온유한 것이다. 부패한 정치 풍토를 보고 분 내지 못하고, 말 한마디도 못하고 동참도 못하는 것은 온유한 자가 아니요, 비겁한 것이다. 온유는 강한 것이다.

낚시터에 낚시꾼이 모이듯이 정치판에는 모리배 같은 정치꾼이 모여서 돈을 뜯어내고, 지방색을 가지고 표를 끌어 모아주고, 탈법을 해서라도 당선만 되면 된다는 풍토를 만드니까 양식이 있는 사람이 그런 더러운 판에 끼어들기가 어렵다.

그러나 피하지 말아야 한다. 비전을 가진 젊은이들, 뜻을 가진 사람들이 정치계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온유이다. 우리 모두는 가만있으면 안 된다. 비겁한 것이다. 말할 것은 해야 되고, 투표에 꼭 참석해야 한다. 참석하지 않으면서 말할 권한은 없다. 지역주의와 학연주의를 떠나서 확실한 사람을 밀어줘야 한다. 이것이 온유한 자가 가진 힘이다.

온유는 강한 것이지 약한 것이 아니다. 신은 죽었다고 떠들던 ‘니체’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예수님이 말한 온유는 약자의 덕이지, 강자의 덕은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초인을 들고 나왔다. 슈퍼맨의 정신을 가져야 세상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결국 정신병에 걸려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히틀러’가 이 니체의 슈퍼맨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세계를 정복하자는 결과는 끔직한 재앙을 치렀다. 온유가 빠진 슈퍼맨의 정신은 저주받은 폭력이며, 지옥 같은 파멸을 가져왔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너무 잘 알고 있다. 온유를 비웃던 니체와 히틀러는 영원한 약자가 되어버리고, 패자로서 역사에 남아 있지만,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은 영원한 강자요, 승자가 되어 경배와 찬양을 받고 계심을 우리가 본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온유한 자 모세처럼 하자가 아니라, 욥처럼 해야 한다. 나를 대적하는 사람 앞에서 온유한 자는 바로 모세처럼 해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대할 때 화를 낼 것인지 안 낼 것인지는 예수님께 배우자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적용해야 한다. 온유한 자가 되면 제일 먼저 행복한 것은 가족이다. 그럼으로 가정에서부터 온유한 자가 되어야 한다. 내가 가정에서 온유하지 못하면 제일 먼저 부인과 아들이 다친다. 주변에 있는 식구들이 다 다친다. 가정상담사가 말하기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부부 사이에 제일 힘든 것이 상존하는 분노이다. 다시 말하면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가 남편과 아내에게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어느 학자는 ‘얼어붙은 분노’라고도 했다.

부부가 예수를 믿고 성령을 그 마음에 모시고, 성령이 그 마음을 통제하도록 적극적으로 의뢰하면 성령에 손 안에서 악한 것이 고개를 들지 못한다. 성령이 반드시 온유한 자로 만들어주는데 온유가 부족하면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이 된다.

어느 상담사가 말하기로 사회적인 성공은 능력과 연관이 있지만, 가정에서 성공은 성격과 연관이 있다고 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두 가지가 있다. 칭찬의 안경과 비난의 안경이 있다. 비난의 안경을 쓴 사람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도 불행하고, 칭찬의 안경을 쓴 사람은 어느 배우자를 만나도 행복한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거래분석학이라는 이론이 있는데 이 이론에 의하면 나의 과거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상대방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변하면 상대방도 변한다. 우리 모두 당신부터 변해야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내가 변하는 것이다.

건강한 성격이 행복의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 중에 예수님이 교훈하신 온유함만큼 건강한 성격이 어디 있겠는가? 남편이 온유하면 가정이 행복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건강한 성격이기 때문이다. 온유한 성격이 아내를 비난하겠는가. 온유한 아내가 남편을 충돌질 하겠는가. 두 사람의 마음을 성령이 다스리도록 전적으로 다스리고 기도하고 그 분의 말씀대로 살려는 진지한 노력이 없으니까 마음에 여전히 얼어붙은 분노가 있어 계속 갈등하여 행복할 수가 없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고 했다. 행복을 논하기 전에 자기 자신의 성격부터 따져보라. 유업으로 받는 것이다. 온유한 자가 받는 것은 가만히 있으면 주님이 주시는 것이다. 온유함이 지는 것 같지만 결국 땅을 얻는다. 온유하면 남편이라는 땅, 아내라는 땅을 얻는다. 온유한 부모는 자녀를 땅으로 얻는다. 가족들이 온유하면 기쁨과 행복, 심령의 자유의 땅을 소유하는 것이다. 특별히 비난하는 가족과 이웃이 있는가. 온유 하라. 틀림없이 그 사람을 땅으로 주실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자신을 위해 화를 내지 말라. 자기 자신을 위해 화를 내지 말고, 남의 유익을 위해, 악을 위해서는 화를 내라. 용기가 필요할 때는 누구보다도 강자로서 악과 대립해야 한다.

잠언 16장 32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누가 용사보다 강한가. 마음을 다스릴 줄 아는 온유한 자이다. 누가 성을 점령하는 군사보다 강한가. 성령의 통제를 받으면서 화를 낼 때와 내지 않을 때를 분명히 알고 자기의 감정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사람이 가장 강한 것이다. 그러므로 온유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소유하는 멋진 아름다운 인생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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