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소:서울 남서울교회(담임 화종부 목사)
본문: 수 5:13~15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너는 누구를 위하느냐?
지금은 온 세상이 코로나와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총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불안함과 두려움을 주고 있습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교회는 더욱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회개하고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들을 구하는 일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대하 7:14 말씀대로 하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오늘도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편 가르기에 익숙해 있습니다. 공동체에서 약간의 갈등만 있어도 “너는 누구 편이냐?”며 편 가르기를 합니다. 다 아시는 대로 지금 우리나라는 국민들이 이념적으로 아주 심각하게 분열하여 다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내 편과 네 편으로 분류됩니다.
이런 분열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북한의 분열도 너무나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인데 남한의 국민들도 이렇게 나누어져 싸우고 있으니 어찌해야 할 것인지?
이런 심각한 분열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지만 일차적인 책임은 정치지도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당이나 여당이나 정의로움과 공정함을 추구하기보다 당리당략과 내로남불로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분열에는 집권세력의 책임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집권자들은 국민 모두를 생각하며 정치를 해야 합니다. 자신들의 지지자들은 물론 반대자들도 배려해야 합니다. 강한 자들보다 약자들을 더 배려하는 것이 통치의 원리입니다. 부모는 건강한 자녀보다 연약한 자녀에게 마음을 더 기울이는 것과 같다 하겠습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저지른 잘못이 무엇입니까? 경제적 강자들로 하여금 약자들에게 갑질을 하게 만든 것 아닙니까?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강한 자들로 하여금 갑질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어떤 공동체에서건 최고지도자는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여간 정치인들은 제쳐두고서라도 지금의 이 상황에서 우리 기독교지도자들의 책임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분노와 증오의 어두움이 우리를 덮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목회자들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도 좌우로 나누어 서로의 정당성을 변호하며 싸워야 할까요?
이런 질문 앞에 서면 솔직히 저는 아주 심한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 무력함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 아닙니다. 저 안에 있고 저가 자초한 무력함입니다. 저는 연약합니다. 이런 저가 언제나 올바르고 확고한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왕좌왕하는 쏠림이 과연 저에게는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깨지고 상한 이 나라를 어떻게 치유하고 통합시킬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를 돌파하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나아갈 길을 낼 수 있을까요? 저는 자신 없습니다. 저는 이런 일을 생각할 때마다 짓누르는 좌절감 때문에 가슴에 통증을 느낍니다. 가끔은 불을 끄겠다고 나섰다가 불을 지피는 사람이 되고 마는 저를 봅니다. 저는 신념이 약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우리 사람들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는 하나님을 위하느냐?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자기 앞에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을 보자말자 “너는 누구를 위하느냐?”고 묻습니다. 곧 ‘너는 우리 편이냐? 아니면 우리 원수들의 편이냐?’고 물은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향하여 “너는 누구 편이냐?”라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가 이 기도회를 갖는다고 했을 때 어떤 성격의 기도회냐고 묻는 기자들이 많았습니다. 보수냐 진보냐 하는 것이지요.
"너는 누구를 위하느냐?"고 묻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지금 왔느니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서 “아니라(No)”는 말에 힘이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다. 나는 단순히 누구의 편을 들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다. 나는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 여기 왔느니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 대답에는 “여호수아 너는 누구 편이냐? 나에게 누구 편이냐고 묻지 말고 네가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지 너 자신에게 먼저 물으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너는 참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하겠다는 결심이 서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군대장관으로 나타났던 이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때였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요단강을 건넜고, 할례도 행하였으며, 유월절도 지켰습니다. 이제는 드디어 약속의 땅을 정복하는 전투가 시작되기 직전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성 가까이 갔습니다. 여리고성은 가나안의 관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바라보며 어떻게 저 난공불락의 성을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인가를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느 주석가는 ‘여리고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여리고를 생각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군대장관이 나타났습니다. 이 일이 상징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생각합니다.
대권자 중의 대권자이신 그리스도
우주의 역사와 만물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만유의 주이십니다. 모든 능력과 모든 권세가 그에게 있습니다. 그가 대권자이십니다.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모든 권세를 독생하신 아들 그리스도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무슨 일에나 주님 앞에 나가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순명’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그의 뜻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정치에 더 관심이 많을 때가 있습니다. 대통령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의 대통령들은 그 권세가 황제급입니다. 이미 고인이 된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들이 동시에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경상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이 후보들을 대한민국을 구원할 메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떠받들며 지지했습니다.
그때 부산과 광주에서 목회자들이 각각 모여 기도했습니다. 자기들이 지지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때 그분들이 하나님께는 제대로 한 번 물어보았을까요? 그 후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강원도 어느 마을을 방문했을 때 그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대통령을 향해 “전하”라고 불렀습니다.
때로는 목회자들 중에서도 기도보다 데모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의 자리보다 정치집회가 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는 진보적인 목회자들이 그러더니 지금은 보수주의자들이 그럽니다. 기도보다 정치에 더 많이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주목하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그를 기대하며 그에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로드십에 대한 진실한 신앙고백
저가 저 자신과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일은 우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에게 로드십, 곧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실천적인 신앙고백이 매우 허약하다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이런 외식과 위선을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
위 말씀의 지적대로 먼저 우리 목회자들부터 잘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주의 주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존귀하심과 그 권세와 능력에 대하여 합당한 경외심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합당한 경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실제로는 세속적인 가치관에 경도된 사상을 따라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로드십에 대한 신앙고백이 희미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거운동입니다. 총회장이나 어떤 기관의 장이 되겠다고 돈까지 쓰며 선거운동을 했던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전보다 많이 순화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서 선거운동이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이젠 평신도들까지 교회에서 중직자가 되겠다고 선거운동을 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이런 믿음과 경외심 없이 회의도 하고 선거도 합니다. 선택하는 사람들도 선택을 받는 사람들도 모두 자신들이 주도적인 판단을 하고 주장을 합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들이 왕을 세웠으나 내게서 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도자를 세웠으나 내가 모르는 바…”(8:4)라고 말입니다.
심지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두려움 없이 교회를 아들에게 세습하는 일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주권과 영광을 찬탈하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의 주권을 침해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영광을 탈취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우리를 향하여 거듭 말씀합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네 신을 벗어라”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를 향하여 “네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신에는 세속의 때가 묻어있습니다. 우리는 신을 싣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닙니다. 그래서 세상의 흙이 묻고 세상의 풍조에 물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신을 벗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은 거룩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입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과 구별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보다 우월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우월해야 한다는 정도의 뜻도 아닙니다. 믿음의 대상인 주님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며, 삶이 다르고, 목표하는 바가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세상을 배척하는 배타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세상을 섬기기 위한 거룩함입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기 위한 구별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려움과 진실함으로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회개하고, 주를 경외하므로 그 앞에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여호수아처럼 그분 앞에 엎드려야 하겠습니다. 말씀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여호와의 군대장관 앞에 엎드린 여호수아는 “내 주여 무슨 말씀을 하려하시나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우리도 범사에서 이렇게 질문해야 하겠습니다. 기도가 바로 이런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롬 12:2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먼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대”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힘든 말입니다. 영어성경[NIV]은 “the pattern of this world”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말씀은 이 세상의 패턴을 따르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삶의 패턴이 있습니다. 전통이 있고 습관과 풍습이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있습니다. 좀 더 크게 말하면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고 세계관이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정리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 속에 깊이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인들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주목하라는 말씀입니다. 정신 차리지 않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세상 풍조에 휩쓸리게 됩니다.
세상 풍조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마음은 지성과 의지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세계관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가장 큰 문제들 중 또 하나는 신앙의 대상은 바뀌었으나 가치관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회심하였다고 하지만 여전히 이 세대를 본받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보수적인 교회들 중에는 샤머니즘에 빠진 교회들이 많고, 진보적인 교회들 중에는 단순한 휴머니즘에 빠진 교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성경에 계시하신 말씀과 우리의 마음을 조명하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이 선한 것인지,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인지, 그리고 치우치거나 부분적이 아닌 온전한 뜻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특별히 정치적인 이념으로 나뉘어서 갈등하고 있는 이때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겠습니다.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라며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말씀과 순명” 아니겠습니까?
결언
시편에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1:3)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터가 무너져가고 있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과 순명으로 세상의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대강(大綱)은 공의와 사랑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둘은 하나님나라의 통치이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터요 기둥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세상의 중심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세상을 치유하실 것입니다.
정주채 목사(향상교회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