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온누리교회를 개척한 故 하용조 목사의 생전 주요 설교를 요약해 [다시 읽는 명설교] 코너에서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끝이 났는가. 그렇지 않다. 만약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거기서 끝이 났다면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비전을 잉태하게 해서 부활의 축복을 온 인류에게 전달되게 했는데 이것이 ‘비전터치’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바로 승천하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을 만나기 위해 40일을 소비했다. 여기에 위대성이 있다.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어떤 일을 하기 보다 비전을 심어 주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배신한 그 상처 때문에 예수님께 쉽게 접근을 못 한다. 결국 고기잡이로 돌아갔는데 거기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어찌하여 날 부인했느냐’하고 묻지 않고 세 번씩이나 사랑을 물었다. 왜 그런가. 세 번을 실수한 자에게 세 번의 기회를 주신다. 제자들과 있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과 의심에 상처받은 제자들을 40일 동안 함께 하면서 치유해 주시며 기다리신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40일 지상에 계시는 동안 세가지 사건을 알 수 있다. 먼저 부활 전에 육신의 몸이 아니라 부활 후에 몸으로 40일을 계셨다. 육과 영이 함께 공존하는 몸이다. 우리가 죽으면 가지는 몸이다.
두 번째는 제자들에 치유와 회복의 시간을 가졌다. 세 번째는 부활 이후 비전을 주셨는데 개인의 비전이 있고 공동체의 비전이 있다. 오늘 말씀은 개인비전이 아닌 공동체, 교회에 주는 비전을 보고자 한다.
마태복음 28장 16~17절에서 열한 제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빠진 한 명은 ‘가롯 유다’이다. 우리는 가롯 유다를 보면서 두 단어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섭리와 예정, 그리고 자유의지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예수님도 배신의 쓴 잔을 마신 경험이 있다는 것과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도 허물이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간이 있는 곳에는 완전한 조직이 없다.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은 회개하고 완벽주의를 벗어나야 한다. 상대방의 실수와 연약함을 이해하고 인정해야 한다. 인간은 실수를 통해서 완전해지지 완전함을 통해서 완전해지지 않는다.
본문 16~17절을 보면 예수님께 예배하는 자도 있었으나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배우는 것은 인간의 믿음은 불안전하다. 아브라함은 믿음이 부족한 자였다. 들락날락한다. 인간의 노력으로 인한 믿음은 불안전한 것이다. 인간은 불안전한 생각 속에 하나님의 비전이 들어가면서 온전해지는 것이다.
본문 18절을 보면 말보다 중요한 것은 말하는 사람이며, 그 사람에 인격, 권세, 그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가령 내가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변하지만, 예수님이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이처럼 누가 말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하늘의 권세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나님의 권세요, 또 하나는 하늘의 권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세가 있으셨다. 하늘의 권세는 천국의 권세를 말한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그것을 이행하는 분은 예수님이며, 심판의 기준이 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세를 다 예수님께 이양했기 때문이다. 땅의 권세는 창조의 권세와 구원의 권세와 그리고 역사 섭리(이 땅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의 권세를 말하며 이 모든 것이 예수님께 있다.
개인적으로 돌아오면 예수님께서 태풍을 잠잠하게 하는 기적의 권세가 있고, 모든 병을 치유하시는 권세와 귀신을 떠나는 권세가 있다. 가장 위대한 권세는 사랑과 용서의 권세였고,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섬김과 봉사의 권세가 예수님께 있었다.
이 모든 권세를 우리에게 위임을 했는데 그것은 마치 임신한 것과 같다. 임신의 특징은 아기가 자란다. 비전은 처음부터 크게 오지 않는다.
인간적인 비전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그 비전이 자기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가정환경, 역사 환경, 책과 스승, 상처와 한이 배경이 된다. 비전은 항상 미래적이다. 하지만 이 비전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은 잉태하는 비전으로, 성장하고 발전한다. 그러나 자라나다가 죽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을 ‘유산’이라고 한다. 우리의 비전은 유산되지 않길 바란다. 자라난 비전은 때가 되면 해산의 수고와 같이 고통을 수반해서 태어난다.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비전의 실체는 네 가지이다.(본문 19~20절인용) 첫째는 가라, 둘째는 모든 이를 제자 삼으라, 셋째는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넷째는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유언과도 같다.
무엇을 하든지 궁극적인 목표는 이 네 가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진리는 ‘가라’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지시한 땅으로 가라고 했다. 믿음을 세워 아브라함은 나아갔다. 기득권에 안주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노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둔 사람은 위기의 인간이다. 모험과 도전, 창의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냥 죽어가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 정치가 혼란스럽다. 다 기득권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주님은 고아와 나그네를 잘 돌보라고 했다. 실상 잘 사는 사람은 우대해주고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에게 박대하는 잔인한 자화상이 우리의 실체이다.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 모든 부족에게 가서 예수를 전하라. 그리고 전도해서 세례를 주는 것 까지 가야한다. 우리 교회의 비전과 같이 열심히 말씀을 배우고, 가르쳐야한다. 교리와 삶이 일치해야 한다. 여러분 안에 비전의 잉태가 임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