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 17;20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우리가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왔던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너희가 행하지 못할 일이 없으리라’는 논리는 바로 이 구절에서 비롯된 것이다.
[2] 하지만 이보다 비논리적이고 주님의 의도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비성경적인 발상은 없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다수의 목회자나 성도들은 그러한 사실도 모른 채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은혜를 받고 있기도 하다는 점이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잘못된 내용을 가르치고 설교함에도 의문을 제기하거나 따지고 드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슬프게 한다.
[3] 고등학교 시절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구나가 다 상식으로 알고 있던 그 논리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왜냐하면 본문 속에 나오는 예수님의 대답 때문이다. 예수님이 안 계실 때 한 사람이 간질병으로 고생 중이던 아들을 제자들에게 데려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제자들이 애써봤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주님이 오시자 주님께 아들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하게 됐는데, 주님은 제자들과는 달리 단 번에 그 아들의 간질병을 고쳐주셨다.
[4] 그때 제자들이 주님께 왜 자기네는 고칠 수 없었냐고 물었는데, 그에 대한 대답이 본문을 푸는 키가 된다. 20절 상반절에 그 해답이 들어있다.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작은 까닭이니라.” 바로 이 내용이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뭐라고 하셨나? 원문을 보면 제자들이 작은 믿음을 소유했기 때문에 병을 고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믿음이 예수님처럼 큰 믿음이 아니고 작은 믿음이어서 그들은 간질병을 고칠 수 없었다는 말씀인데,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만 있으면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 매듭지음이 가당키나 한 말인지 한 번 생각해보라.
[5] 의사가 엑스레이를 보면서 환자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마지막에 처방전을 제시하지 않는가? 예수께서 제자들의 믿음이 당신처럼 크지 않고 작았기 때문에 병을 고칠 수 없었다고 문제를 제기하시면서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처방전을 제시하시는 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이다.
[6] 그렇다면 이처럼 제자들과 예수님의 차이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본문에 기록되어 있음에도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으면...’이라는 말도 안 되는 엉터리의 발상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되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상식처럼 퍼지게 된 데는 예수님이 비유로 사용하신 ‘겨자씨’가 큰 역할을 했음을 숨길 수 없다. 겨자씨가 아주 작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잘못된 번역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겨자씨 한 알만큼만 있어도’ 혹은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라는 번역과 조건 말이다. 겨자씨가 큰 것이라면 결코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7]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사용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당시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가 여럿 존재했었다. 그중에 하나가 ‘담배나무 씨’라는 것이다. 성지순례를 다녀온 분들이 현지에서 사온 겨자씨라며 성도들에게 자주 보여주는 아주 작은 씨가 하나 있다. 하지만 이는 겨자씨가 아니라 담배나무 씨이다. 겨자씨는 그보다 수십 배나 더 큰 씨이다.
[8] 그러면 왜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들이 있었음에도 주님은 겨자씨를 사용하셔서 전하고자 하시는 교훈을 남기셨을까? 여기에 정답이 들어 있음을 눈치 채야 한다. 담배나무 씨처럼 당시 겨자씨보다 더 작은 씨들이 있었지만 그 씨들은 다 자랐을 때 겨자씨만큼 폭발적으로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겨자씨는 가장 작은 씨는 아니지만 다 성장했을 때는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새들이 깃들고 사람 키보다 더 클 정도로 커지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씨를 사용해서 말씀을 전하신 것이다.
[9] 손바닥에 겨자씨 한 알을 놓고 쳐다보면 그 크기가 작기 때문에 하찮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한 알 속에는, 다 자랐을 때는 새들이 깃들고 사람 키보다 더 커질 정도의 엄청난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최고 양질의 내용물이 들어 있음을 놓쳐선 안 된다. 겨자씨는 나무가 아니라 풀과의 식물이다(아래의 사진을 참조하라). 그럼에도 겨자씨 ‘나무’라 표현하신 의도도 바로 그 엄청난 확장력과 성장력 때문이다.
이것은 복음의 씨앗이 자라서 때가 차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온 세상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천국 백성이 될 것을 암시하는 내용이다(겔 31:5~6).
[10] 때문에 예수님의 의도와 문맥의 자연스런 흐름을 살려서 제대로 번역을 하면 다음과 같다. “만일 너희가 겨자씨 한 알과 같은 (엄청난 잠재력과 무한한 가능성과 최고 양질의) 믿음(hos kokkon sinapeos, as a mustard seed)만 소유했다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여기에 ‘만큼’이란 내용의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같은’(as)을 의미하는 헬라어 ‘hos’가 사용됐을 뿐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들과 자신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그 이유를 설명하신 유일한 대답이 바로 이 내용이다.
[11] 이제 정리해보자.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언제나 제자들에겐 ‘믿음 부족’(“믿음이 작은 자들아”)의 문제가 제기됨을 볼 수 있다(마 6:30, 8:26, 14:31, 16:8, 17:20, 눅 12:28). 그래서 눅 17:5절에서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add)’라고 반응한 것이다. 그렇다. 작은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다. ‘큰 믿음’, ‘이만한 믿음’(마 8:10, 눅 7:9)이라야 된다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12] 오늘 내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예수님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확실히 굳게 신뢰하는 강하고 큰 믿음인가, 아니면 제자들처럼 늘 의심하고 염려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작은 믿음인가?
신성욱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설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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