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 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다. 누구든지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요 성경의 중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오셨다.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사역의 알파와 오메가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 하신 것이요 죽음에서 살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전 사역의 중심은 살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말로 '살림'이라는 말은 살려 낸다는 말이다.
요한복은 10:10절에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고 하심으로 예수가 오신 목적은 생명 그것도 풍성한 생명을 위해서 오셨음을 선포 하셨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교회의 목적이 아닐까? 그런데 현대의 교회들은 교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잃은 채 값싼 은혜를 팔아 대형 주의로만 지향해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한다.
생명을 가꾸는 일은 먼저 밭을 갈아 토대를 닦고 씨를 뿌리고 식물에 물을 공급해 주고 식물을 자라게 한다. 또한 식물이 자라는데 방해를 주는 요소를 제거해야 하고 열매를 맺도록 부단히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생명 운동을 어떻게 전개 하셨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단순하게 표현 하셨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의 하는 일은 무엇인가?
생명운동은 첫째 음성을 듣고 알아주는 일이다. 음성을 알아준다는 것은 한 마디로 인간의 아픔과 기쁨 형편과 처지를 같이 공유하는 것이다.
교회는 바로 이 땅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국민들의 음성을 들어 주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하거늘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의 음성만 듣거나 희 희 락 락하고 노래하는 사람들의 음성만 듣는다면 그 교회는 편견과 이념에 사로잡힌 교회로 바른 사명의 교회라 할 수 없다.
예수님은 갈릴리 민중들에게 찾아가 그들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과 탄식을 들으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부르시며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다.
두 번째는 아픔을 기억해 주는 것. 이름은 그 사람만의 가진 대명사이다. 이름은 한 인간의 인격이요 가치이며 가능성과 존엄성이다. 이름을 서로 불러 주지 못하는 사이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없다.
우리가 이름을 알아주고 그 이름을 섬겨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대접을 해주는 것이 목회요 교회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 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선지서의 본뜻이다(마 7:12).
생명 운동의 세 번째는 목숨을 던져 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오늘 성경 말씀에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을 알고 양은 나를 안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요 15:10) 이 말씀에서 목숨을 바치는 서약을 하셨다. 이것은 정치인들의 구호와는 사뭇 다르다.
그들도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국민을 위하여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고 곧잘 맹세를 한다. 국민들의 아픔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격적인 존중도 못하면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은 국민들을 속이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무슨 맹세도 떡 먹듯이 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이 없거나 경우에는 언제든지 배신과 배역을 물 마시듯 하는 자 들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도둑이라고 규정 하였다(요 10:10).
교회가 나아 갈 길
교회는 앞서 말한대로 생명 공동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살아남는 길은 생명 공동체 의식을 살려 나가야 한다. 이에 대해 대나무 숲을 예로 들고 싶다. 대나무는 그 몸체가 1m 이상 길쭉하게 뻗어 올라간다. 그런데 그 몸체에 비해 뿌리는 대단히 가늘고 짧게 박힌다.
그런데도 큰 폭풍이 불 때에 소나무의 큰 가지가 뚝뚝 꺾이고 포포풀러 나무가 쑥쑥 뽑히어도 대나무는 큰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남는다. 왜 그럴까? 대나무는 집단으로 함께 사는 집단 군거식물(群居植物)이기 때문이다. 약한 뿌리는 옆의 약한 뿌리와 베를 짜듯이 얽힌다. 결국 태풍이 불면 힘없는 가지가 부디치지 않도록 서로의 간격을 유지시켜주며 앞의 나무가 쓰러지면 뒤에 나무가 밭쳐주고 열 개, 백 개가 죽 받쳐주면서 태풍을 이겨낸다.
강한 태풍이 불 때에는 넘어 가는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탄력을 가지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대나무가 위기를 극복하는 힘은 유감없이 공동체적 결속과 유언 과 탄력에 있다. 그래서 지조와 절개를 자랑하는 사군자로서 유감없이 화폭에 그릴 수 있는 대나무가 된다. 대나무 숲을 통해 위기를 맞은 한국교회가 교훈을 삼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16절에서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산업으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산업사회의 팽창으로 인한 자원고갈, 제국주의 국가들의 세계지배 야욕 등은 인류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거기에다 핵무기의 개발과 원자로의 건설 등은 더욱 인류의 운명을 불행을 어둡게 한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분열과 분쟁의 역사를 청산하고 세계에 자주민임을 선포하고 평화통일을 이루어낸 민족으로 나아가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나 혼자 선하게 사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물론 지켜야 할 지조, 윤리적이고 확실한 신앙적 고백, 이것이 기초임에 분명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명을 회복하는 일에 한국교회가 나서야 할 때이다.
예수께서는 다른 우리의 양도 데려와서 한 목자 아래서 한 무리의 양떼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여인들은 가정에서 살림을 잘 해야 한다. 알뜰히 살림을 잘하면 집을 사고 재산이 증식되고 온 가족이 편하게 살 수 있다. 남자는 살림을 잘하는 여자를 만나야 가정생활이 행복해 질 수 있다. 우리는 모든 살림을 맡은 살림꾼으로 부름 받았다.
국민을 살리는 것이 정치요, 나라 살림을 맡은 것이 정부이다.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살림 잘하는 정치인이 누구인가 눈여겨보자.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하면 국민을 죽이는 도적이요, 국민의 세금을 횡령하고 사리사욕을 위하여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강도가 뽑힐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역사에 등장해서 민중을 억압하고 지배자로 군림한 수많은 독재자 들은 살림을 위해서가 아니라 도적질 하고 노략질 하는 강도들이다. 예수님께서도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 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인자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다고 하셨다.
살리려는 사상운동이 있고 죽이려는 사상운동이 있다. 살리려는 운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이요, 죽이려는 사상운동은 사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려고 때려 거반 죽게 되었다. 마침 한 제사 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레위인도 마찬가지 이렇게 어느 누구도 죽어가는 그를 돌보지 않는 때 사마리아 인은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싸매주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가서 돌보아 주고 진료비를 주인에게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탁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 지구상에는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들이 많이 있다. 여기에는 사람을 죽이려는 강도가 있고 사람을 살리는 사마리아인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인종의 장벽을 넘고 유대교와 이방종교의 이데올로기 벽을 넘는 살림운동을 한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교회가 맡은 가장 큰 사명은 예수님의 생명살림의 운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 만난 자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지나간 제사장과 레위인은 바로 우리 자신들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인류를 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림의 표상이요, 모형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이 민족을 살려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부름 받은 자들이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증언하였고, 그들 자신도 부활의 신앙으로 심령이 살아났다. 복음은 살림이 되는 것이요, 살림운동이 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2020년은 이 살림운동이 불화산처럼 타오르기를 소원하고 기원한다.
이선규 목사(대림다문화선교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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