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숙 칼럼] 수령 신(神)교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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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 미션 인터넷 선교 사역자 박현숙 목사 ©리빙지저스 박현숙 TV 캡쳐

요즘 한국 사회는 도덕적 상대주의와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적 이념의 팽배로 인해서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이 가중되고 국민들의 불안감과 위기감이 심화되고 있다.

뉴스를 통한 정치 상황을 보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크게 매료되었던 베트남의 초기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불안한 마음마저 든다.

반만년 역사를 지내오면서 피를 나눈 우리 민족끼린데 왜 그토록 경계를 해야 하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전후 세대의 대한민국 국민들 일반 속에 공통적으로 깔려있는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남한의 대통령과 판문점에서 악수와 포옹을 하고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숭글숭글한 북한 수령의 투박한 미소와 소탈하고 진득한 말씨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세계관을 알아야 한다.

세계관이란 그 사람이 전체적인 인생과 세계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세계관에 따라 행동규범을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족과 이웃과 진정한 소통을 가지려면 자신과 상대의 세계관을 바로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하물며 다른 체제나 국가간에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북한의 공산주의가 뿌리를 둔 막시즘은 자연주의에 기반한 세속적 인문주의에 속한다. 크리스찬 인문주의 선언은 세속적 인문주의와 구별하기 위한 동기로 1982년도에 나왔다. 칼빈, 에라스무스, 존 밀튼 등을 크리스찬 인문주의로 칭한다.

세속적 인문주의자 선언에는 열려진 민주사회를 지지한다고 나와있어 막시즘을 거절하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지만 막시즘과 세속적 인문주의는 성격상 자연주의적인 성격을 띈다.

자연주의는 현실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를 물질로 보기 때문에 유신론의 요체가 하나님의 본성이라면 자연주의의 요체는 코스모스-우주의 본성이다. 여기선 물질만이 영원한 것이며 신은 존재치 않는 것이다.

칼 막스는 최고의 인문주의자로서 막스의 인본주의는 19c 두 철학자 헤겔(1770-1830)과 포에르바하(1804-72)와의 조우로 형성되었다.

헤겔의 철학은 이상주의의 한 형태로서 헤겔의 신이나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은 세계로부터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세계 안에서 점진적으로 자신을 실현해가는 실체이다.

이 정신의 실현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대립관계를 가져오는 갈등을 통해 진행되는 변증법적 성격이다. 헤겔은 정신이 표현되는 최고의 매개체를 사회로 보았는데 19c 서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것이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헤겔에 있어서 우리가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절대정신"이라 인식되는 하나님의 목적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포에르바하는 인간을 먹는 존재로 규정할 만큼 지독한 유물론자였다. 그러기에 그가 종교를 인간의 고안품이라 주장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른다.

포에르바하에게 신이란 인간이 잠재적으로 실현하고 싶은 이상의 투영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생각은 인간이 개발한 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개발의 노력은 안하고 신에 기대어 신의 비위나 맞추면서 대리만족을 얻게 하는 그런 나약하고 게으른 존재가 되게 하는 해로운 기능을 담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포에르바하는 헤겔의 정신 개념도 비판했는데 이것은 헤겔이 기독교의 하나님을 약간 세속화한거지 하나님을 부인한게 아닌걸로 보았기 때문이다.

막스는 포에르바하의 종교비판을 아주 충심으로 수용했기에 대부분의 막시즘은 다 무신론적이다. 막스는 포에르바하의 헤겔비판에 착안하여 헤겔의 이상적인 정신개념을 구체적 인간의 물질적 개념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변증법적인 과정만큼은 진실된거라 보았다.

막스에게 역사는 물질인 인간이 물질을 생산해내는 시스템이 바뀔때마다 생기는 사회계급층간의 충돌로 나아가는 계급투쟁의 역사인 것이고 역사의 목적은 완전하고 이상적인 인간사회를 구현하는데 있다고 보았다.

한편 막스는 자본주의를 이끌어낸 같은 변증법적 힘이 자본주의 사회내의 부의 집중화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를 양산해내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수밖에 없지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다수 계급이므로 계급투쟁의 역사가 종식될거로 보았다.

막스는 종국에 이렇게 도래할 새로운 무계급사회가 새사회주의자 즉 새사회주의적 개인들로 살아가게 만들고 이들은 덜 개인적이고 덜 경쟁적이고 남을 위한 일에 더 열심을 내고 성취하려는 사람들일거란 환상을 품었다.

이로써 이전사회의 문제였던 계층간의 괴리는 없어지고 차별없고 평등과 공유가 이뤄지는 새롭고 높은 차원의 이상적인 인간의 삶이 나타날거라고 주장한거다.

막스가 미래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소멸될 것으로 지목한 국가와 종교는 빗나간 에언이 되었고 그가 세운 공산주의 이념만이 자멸의 길을 걸어온 셈이다.

생각컨대, 과연 인간의 역사가 이상적 사회를 향해 진행된다는 막스의 믿음이 어디서 나왔느냐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섭리나 헤겔의 역사에 내재한 절대정신 마저 부인하는 막스로선 그런 기대를 할만한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닌가?

기독교의 역사는 하나님의 거룩한 예정된 목적이며 역사자체가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적인 계시의 형태를 띈다. 그러나 자연주의 역사관은 예정된 목적이 없이, 사라지고 말 인간의 운명처럼 무심히 흘러갈 뿐인 것이다.

막스는 또한 더 나은 미래사회를 위해 일하고 착취를 근절해야 한다는 노동의 규범에 대한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도덕가치에 대한 기반이 그에게 있느냐는 것이다.

전통적 기독 유신론에서는 도덕의 선험적 기원과 기준을 영원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으로 보고 있다. 도덕체계는 인간의식 외부의 초월적인 것-즉 하나님이 도덕 가치의 근본이 된다.

기독교 교육을 받은 두 사람인, 몽테스키의 법의 정신이나 존로크의 헌정 민주주의나 자연권리 사상등에는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법에 앞서 신적이고 선험적인 것이 기본적인 도덕이나 법 규범의 근간에 깔려 있다.

그러나 자연주의에 기반을 둔 인문주의자 선언문에서 도덕적 가치는 인간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인간 문화의 산물로 본다. 도덕은 인간이 필요에 의해 상황에 따라 자율적이고 자치적으로 만들어간 것이 된다.

얼마 전 조국 전 법무부장관이 과거에 인민의 자율 규범으로 법을 대체한다는 논문을 썼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이와 더불어 시대적 과제니 역사적 대의니 또 근로대중의 주체성이니 하는 표현들이 지닌 함의를 우리는 막시즘 사상의 기저를 통해 예민하게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법 정신의 근간이 되는 선험적인 규범가치를 간과한채 막시즘에 근간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하는 개념을 추종하고 답습하는 것은 세계관의 부재가 가져온 어리석은 무지의 소치이다

자연주의는 도덕 자체에 가치를 두지 않기 때문에 도덕가치는 다만 개인적이고 선택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집단적 이익을 위해 집단이 추구하는 목적에 부합되는지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 개념 자체에 당위성이 결여되어 있다.

이 또한 현 정부가 정치 행정을 통해 보이고 있는 사례이다.

생각컨대, 정의나 공평 같은 도덕이 인간이 만든 개념적 고안품이라면 막스가 자본주의에 대해 분개하고 정죄하는 근거가 모호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자가당착은 일인 독재에 의한 소수 지배층의 권력과 부의 독점으로 북한의 정치 현실이 여실히 증거하고도 남음이 있다.

막스의 또 다른 심각한 문제는 그의 인간성에 대한 이해와 근본적인 인간 문제에 대한 분석에 있다. 요컨대 이기주의와 탐욕이 오로지 가진 것이 없고 계급이 분화되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다. 환경이 좋으면 우리 인간을 근본적으로 선하게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은 인류 최초의 최고 최상의 환경인 에덴동산에서 인간의 타락과 비극이 탄생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역사상 공인된 사회주의 사회의 실상을 우리는 익히 알지 않는가? 인간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선 어느 시스템이든 막론하고 교묘하게 조종하는 기술이 매우 탁월하다는걸 충분히 경험으로 말해주지 않는가?

막스의 문제는 그가 인간을 순전히 물질로, 유물론적인 시각으로 보는데에 있다. 노동과 경제적 요인이 인간사회를 만드는데 중요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경제보다 더 중요한게 있는 것이다.

분명히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나라에서도 많은 젊은이들이 그들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현실이지 않은가?

성경적인 인간관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 되었으나 타락하였으며 그 후 불완전하나마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존재로서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순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사후에도 영생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존귀한 존재이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그저 인간을 우연한 진화과정의 산물로서 고도의 복합적인 생화학적 기계로 본다. 따라서 죽음으로 해체되면 사후 개체적 존재도 생명도 없어지고만다고 여긴다.

김정은 정권에서 암암리에 들려오는 친지나 부하들의 잔인한 처형 소식은 곤궁하나마 그들의 자연주의적 인간관으로 밖엔 달리 억지로 이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유물론에 기반한 북한 정권은 저들의 역대 수령에게 만은 예외적으로 유심론을 적용하는 변칙을 사용하고 있다.

저들이 삼만여개의 영생탑을 세워 죽은 수령들의 영원불멸을 기원하는 것은 저들이 자신들의 세계관에 대한 기본 개념도 없을 뿐 더러 자체 모순적이고 망령된 맹목적인 권력욕에만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저들은 역대 수령들을 신격화하고 그들의 생일을 태양절이니 광명성절이니 호칭하는데 이는 이사야 14장에 나오는 아침의 아들 계명성인 사탄의 존재와 일치한다.

김정은이 백마를 타고 백두산정에 오르는 보도를 한 조중통의 보도 내용을 보면 "역사의 흐름을 정의와 진리의 한길로 주도해가시는 김정은 동지의 전설적인 기상이 빗발치고 있다"라고 나온다.

이는 엉뚱하게도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백마를 탄 주님의 모습을 기록한 내용과 같은 것으로 '신실'과 '진리'로 부르는 주님께서 백마를 타시고 정의로 심판하며 싸우시고 계신 장면을 모방한 것이다.

보아하니, 북한에서는 소수의 정치 기득권자들이 자신들의 정권 유지를 위해서 그들의 수령을 신격화 하는 작업에 온갖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 우상화 작업을 위해 성경의 말씀 조차 악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

저들은 유물론도 아니고 막시즘도 아니고 '수령 신'교 당원들이다. 일인 세습 독재를 위해 김씨 부자들을 불멸의 혁명정신 운운 하면서 영원불멸의 존재로 신격화하고 있는 저들의 폭정에 같은 민족이라는 감상주의에 젖어 저들의 궤계에 어리석게 넘어가선 결코 안될 일이다.

우리는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정권의 배후에 있는 정사와 권세, 어두운 세상의 주관자, 하늘에 있는 악한 영의 세력을 확실히 인지하고 모두가 성령 안에서 기도에 하나가 되어 주님의 이름으로 악의 세력을 결박해야 한다.

무고하게 심각한 감시와 몰인권 체재 안에서 이념의 노예처럼 철저히 통제 받으며 이 모양 저 모양으로 고난받는 북한 동포들과 생명을 걸고 사역하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