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통합,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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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명예교수인 박영신 목사 1월 한복협 월례회 발표
연세대 사회학과 명예교수 박영신 목사 ©기독일보 홍은혜 기자

I. 현실 사회

우리 세대가 공부 길에서 마주한 가장 격렬한 사회학의 논쟁은 안정과 질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사회 통합론과 갈등과 변동에 관심을 쏟고자 한 사회 갈등론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었다. 지배 논리를 이루고 있던 통합 이론을 비판하고나온 갈등 이론은,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 통합 그 뒤에는 불만과 불화의 갈등이 도사리고 있다며 이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숱한 모순을 안고 있음에도 현재의 상태를 두둔하고 정당화하는 체제 옹호의 논리를 강화시키고 있다며 사회 통합론을 호되게 쏘아붙였다. 이 논쟁의 상황에서 ‘통합’을 강조하는 쪽은 ‘보수’로 불리고 ‘갈등’을 강조하는 쪽은 ‘진보’로 불리게도 되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현존하는 사회란 완전에서 멀리 떨러져 있다. 유토피아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자체 모순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다. 현존 사회는 누구도 신성시하거나 절대화할 수 없는 심히 불완전한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갖가지 재구성을 시도하는 ‘사회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눈여겨온 사회학도에게, 사회 통합은 현존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기득권 세력의 편리한 구호와 도구로 다가온다. 실제로 역사는 갈등에서 비롯되는 사회 운동의 힘을 받아 전진해온 변동의 역동 과정이었다. 이 논지를 쾌히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이미 잘 알고 있는 종교개혁으로 돌아가 이를 새삼 뜯어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은 안정과 질서의 체제를 귀히 여겨온 로마 교회와의 불화와 갈등에서 빚어진 운동이었고 유럽 전역에 걸쳐, 아니 온 세계에 심원한 갈등의 불을 붙인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지난 오백년 전에 일어난 단 한번의 ‘개혁’이나 한때에 ‘개혁된 상태’에 머물 것이 아니라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정수로 여겨, 교회에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고 일러주기도 한다. 이 주장은 현실 세계와 중단 없이 다투어 긴장과 갈등을 빚고 마침내 현존 질서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꾸어야 한다는 기독교의 본래 뜻에 곧바로 이어지는 믿음의 지향성이다.

아마도 이러한 뜻을 귀히 여기게 된 사회학도로 살아온 탓일 것이다. 나는 어느 특정 체제의 질서 유지를 내세워 이에 고착·집착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현존하는 것이란 그 무엇이든 변해야 하고 변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 관심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고 제도란 전혀 무의미 하고 질서는 통째로 부정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것이고 인간에 속한 것인 한 그 어떤 것도 결단코 절대화될 수 없고 신성화될 수 없는, 잠정의 정당성을 누릴 수 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이 생각에 잇대어 나는 사회 통합 문제를 바라보고 풀이한다.

2. 역사에서

지난 해 3.1독립운동 100돌을 맞아, 나 또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몇몇 주요 행적을 다시금 떠올려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새겨보면 새겨볼수록 이 겨레 운동은 참으로 놀랍다. ‘민족 대표’의 구성이 돋보이고, 운동 참여의 과정과 조직의 망 또한 도두보인다. 여기서 보듯이 기미년 만세운동을 일궈낸 것은 기독교와 천도교였다.

알다시피 천도교는 동학의 후신이다. ‘동학’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서학’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 종교 운동이었다. 서양에서 들어온 가르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사회 갈등을 자아낸다고 이해했던 것이다. 유교라는 동양의 전통과 그 가르침을 빈틈없이 철저하게 따르고자 하여 엄격히 짜놓은 조선 사회의 통합과 그 질서의 틀이 서학에 의하여 도전을 받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학은 서학에 의한 흔들림을 바로세워보고자 했다. 조선 사회의 제도와 질서를 바탕지운 유교로는 시대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없다며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동학을 펼쳐야 한다고 했다. 상례와 제례를 비롯한 판에 박은 유교의 습속과 관행을 그대로 이어가고자 했지만 동학은 조선의 신분 질서에 도전하여 그 정당성을 부정하였다. 이에 동학은 조선의 유교와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개신교 기독교 또한 조선 사회의 질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것은 기독교의 믿음과 대립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와 동학은 공히 유교 사회의 질서에 순순히 순복하여 이에 부드럽게 통합될 수 없는 신앙 운동이었다. 조선의 기존 질서 쪽에서 보면 바깥에서 온 기독교와 안에서 일어난 동학은 조선 사회의 바탕과 틀로 기능했던 유교의 통합 질서를 혁파코자 한 성가신 갈등 세력이었고 불온한 ‘반통합’ 세력이었다. 그렇지만 기독교와 동학은 하나로 연합하여 협력하지 않았다. 오히려 반목하고 갈등하였다. 기독교는 동학이 용납할 수 없는 서학의 본체이었고, 동학은 기독교가 수용할 수 없는 신흥 민중 종교이었다. 그 기독교와 이전의 동학을 이어받은 천도교가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을 일으킬 때 하나로 뭉쳤던 것이다. 천도교는 길게 잡아도 동학의 창도로부터 겨우 반세기를 넘겼고 기독교의 본격 선교는 고작 서른 해 남짓이었는데도 이 두 신앙 집단이 3.1운동의 기획과 실행에서 함께 만나 그 엄청난 겨레 운동을 기획하고 실행했던 것이다.

이처럼 기독교와 천도교가 힘을 모아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고 해서,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단합된 모습을 보여준 자랑스럽고도 바람직한, ‘종교를 초월한’ 겨레 운동의 모범 이라고 이를 한껏 치켜 올려 예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섣부른 떠벌림이다. 이 두 종교는 각각의 신앙에서 물러서지 않았고 교리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조절한 것이 있다면 천도교 쪽에서 ‘무력’을 통한 사회 혁파를 시도했던 갑오농민운동 방식을 떨쳐내고, 포교와 교육의 운동 노선으로 선회하여 그 영역에 집중코자 한 것이 모두였다. 이른바 비폭력 평화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였다.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주창해온 기독교가 비폭력 노선을 받아들인 천도교와 함께 겨레 운동을 기획하기 위하여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두 종교는 종교를 ‘초월’하여 모이지 않았다. 각각의 종교를 지키면서, 다른 말로 서로 다른 신앙과 교리 그 어느 것도 손상하거나 약화시킴이 없이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특정의 일 곧, ‘겨레의 독립 운동’을 함께 일으키자는 그 수준에서 만나 의논할 수 있었고, 식민 통합의 질서에 도전하는 3.1운동의 청사진을 만들어 이를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이 겨레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동시다발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종교의 교회/교당과 이들이 세운 학교가 전국방방곡곡으로 널리 침투하여 퍼져 있었고 이러한 조직의 망을 동원하고 가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1운동을 펼친 이 두 종교는 놀라운 ‘통합’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이 능력은 식민 통치 체제에게는 놀라움과 두려움을 자아내는 거대한 ‘갈등’ 세력이었다.

3. 참여에서

통합과 갈등의 기묘한 물림과 엇물림은 다만 지난 시대의 역사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의 현실이다. 민주화 운동에서, 통일 운동에서, 시민의 영역 운동에서 서로 엇갈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만나 함께 일을 꾸린다. 나 또한 이러한 체험을 하고 있다. 시민 단체인 ‘녹색연합’ 사람으로 20년 넘게 이 영역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회원이다. 이 운동 조직체의 상임대표의 일을 10년 넘게 맡은 바 있고, 이어 자매기관(사단법인 녹색교육센터)의 이사장 일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운동 단체는 특정 종교 단체가 아니며, 종교 단체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회원뿐만 아니라 공동 대표와 이사의 배경은 가지각색이다. 종교 신앙을 논한다면 서로 첨예한 갈등을 뿜어내며 밤새껏 논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이 운동 단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가 익히 알고 있다. 강령이 밝히고 있듯이, 회원 모두가 “자연을 거스르는 문명에는 인류와 생태계의 미래가 없다”며 “삶과 삶터를 녹색으로 바꾸기 위해” 그리고 “삶의 터전인 지구를 지키기 위해” 함께 만나 일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 강령을 따르는 회원들 가운데는 채식주의자, 육식절제주의자, 공리주의자, 공동체주의자가 있고, 나무나 돌이나 산과 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물활론자도 있고, 돼지 머리 앞에서 무릎 꿇고 절해야 한다고 믿는 전래전통의 수호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살생을 금해야 한다는 불교 쪽 사람도 있고 창조질서를 회복해야 한다고 믿는 기독교 쪽 사람도 있다. 상임대표의 자격으로 모든 회의를 주제하기는 하지만 공동대표 가운데는 승려도 있고 신부도 있고 목사도 있고 무종교인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이들의 주장과 신념 그리고 종교 신앙에서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성을 가진 사람들이 산업 문명의 한계를 들추어 살펴 ‘녹색 생명’ 운동을 펼치기 위하여 녹색의 깃발 밑에서 함께 만나야 하고 참여해야 한다는 다짐에서 한 자리하여 하나를 이룬 것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믿는 궁극의 관심사를 두고 논쟁하지 않는다. 일방의 주장으로 획일화시킬 수 없는 너그러운 관행과 서로를 존중하는 관용의 습속을 만들고 이를 지키고자 한다. 모든 회의는 언제나 ‘묵상’으로 시작한다는 제도화된 의례가 있으나 그것은 특정 종교 신앙의 내용이나 형식을 강제하지 않는다. 묵상은 신앙의 자유와 양심을 존중하는 한에서의 공동 의례이다. 각각이 믿는 신앙의 빛에서 녹색 가치와 녹색 윤리를 제시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녹색 운동을 함께 펼치자며 힘을 모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서로 마음 문 열고 귀 기울어 듣는다. 서로 가르치고 서로 배운다. 그 수준에서 하나가 된다. 녹색 가치를 무시하고 묵살하는 산업 성장과 소비만을 치켜세우는 회색 가치에 맞서기 위하여 함께 어깨동무한다. 모든 것은 협의와 토론을 거쳐 다수결로 결정한다. 이러한 시민다움의 품격을 함께 익혀간다. 다수결로 결정된 결과를 선뜻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과 신념과 신앙이 자신 속에 굳게 진치고 있어도, 정당한 절차를 밟아 결정된 것인 한 그 결정을 존중한다. 자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음 기회를 기다리면서 설득의 논리를 다져가야 할 따름이다.

다양한 견해와 주장의 여지는 시민 사회의 성숙도와 비례한다. 오늘날의 시민 사회는 서로 마음의 문을 열어두는 시민다움을 요구한다. 참여자는 자기 독선에 갇혀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신앙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게 표상되고 표현될 수 있다는 관용의 미덕을 지녀야 한다. 깊은 뜻에서 이 관용은 인간의 것이란 그 어떤 것도 절대화할 수 없다는 초월 존재에 대한 절대 순종과 인간에 대한 절대 겸허에 뿌리내리고 있다.

4. ‘모자라는 존재’이기에

관용은 종교개혁이 남긴 정신 유산이다. 진리를 증언하는 자는 불의에 맞서 굽히지 않고 싸워야 할 전사의 삶을 살아야하지만 그 또한 유약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 진리를 증언하는 전사들의 공동체로 남아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천사들의 공동체일 수는 없다. 온갖 유혹에 이끌리어 끝내 지켜야 할 진리를 지켜내지 못한 채 자기 변호에 급급한 별수 없는 ‘아담’들의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너무도 당연한 이 진실을 다시 확증시켜준 해외통신 하나를 우리 모두가 접하게 되었다.

지난 섣달 그믐날 교황이 미사에 앞서 여느 때처럼 만면에 인자한 웃음을 띠며 바티칸 광장에 나타났다. 모인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눌 때였다. 어느 열성 여성 신도가 교황의 손을 잡고 싶은 간절한 욕망에 사로잡힌 나머지 손을 내밀어 교황을 손을 확 잡아당긴 일이 벌어졌다. 어느 희비극의 한 장면에서나 나올법한 비참한 인간의 모습을 바로 그 교황 자신이 연출하여 보여주었다. 한 여신도의 갑작스런 행동에 교황이 그만 자제력을 잃고는 그 여신도의 손등을 내려쳤던 것이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이나 친 것이다. 카메라는 이 모든 것을 가감 없이 다 담아내었다. 이 영상물은 삽시에 온 세계로 번졌다. 폭력을 행사한 교황의 손뿐만이 아니라, 여신도의 손을 두 대 친 다음 몸을 뒤로 홱 돌린 교황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카메라에 잡힌 교황의 얼굴에는 인자한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난데없이 들이닥친 노염으로 일그러진 성깔 사나운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교리와 체제의 힘으로 통합을 이뤄내고 있는 막강한 교황청의 교황도, 아무리 으리으리한 호화 의상을 걸쳐 입고 사람들 앞에 군림하여 위엄을 떨쳐 보이고자 하는 그도 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숨기지 못할 사실을 한 순간에 온 천하에 드러내어 보여주고 만 것이다. 어느 인간 어느 조직체도 정도 이상으로 격상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의 판단과 주의주장은 어쩔 수 없이 ‘모자라는’ 인간의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 안에 있는 잠정의 것이다. 하늘과 땅을 호령할 수 있는 절대의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에게서 나온 것은 그 어떤 것도 초월 영역과 등식화하거나 일치시키지 못한다. 자신의 국가이든 겨레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신앙이든 그 모두는 초월의 빛으로 점검 받아야 할 대상물이다. 그 수준에서, 오직 그 수준에서, 겨레 운동을 위하여, 녹색 운동을 위하여, 특정 목적과 가치를 위하여,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만나고 하나로 뭉칠 수 있을 따름이다. 현실 영역의 문제가 아무리 절박하고 긴요하다고 하더라도 그 어떤 것도 초월 영역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 세상의 것을 초월의 것과 유착시켜 한 덩어리로 삼는 순간 무서운 자기 독선과 아집의 구렁으로 떨어진다. 세상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은 우상숭배 행위이다.

초월의 빛 안에 들어오는 현실의 폭은 넓다. 현실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한한 인간인 한 그 누구도 정답의 독점자로 행세하지 못한다. 이 조건 밑에서 인간이 그리는 ‘통합’은 영구히 잠정의 것일 수밖에 없다. 간단없는 ‘갈등’의 분출은 통합 잠정성의 반증이다.

5. 분별된 삶

사회란 공공의 삶터이다. 혈연, 지연, 학연과 같은 사사로운 비좁은 친분 관계의 틀에 묶이어 살고, 삶의 뜻을 온전히 물질의 풍요에 두고 경제의 힘을 숭상하는 천한 의식의 틀에 박혀 있는 한, 공공의 삶을 기대하지 못한다. 이 가치 질서에 모두가 합의하고 몰입하여 이것으로 사회가 ‘통합’되고 있다면 이 사회는 병든 사회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맵고 끊음이 없이 둥글둥글 모나지 않게 이 사회의 흐름에 장단 맞춰가며 원만(?)하게 살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병들게 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 질병을 치유하는 길은 병든 사회에 대한 순응이 아니라 병든 사회를 질타하고 공격하는 것이다. 병든 사회와 ‘갈등’할 수밖에 없다. 비좁은 삶에서 벗어나 공공의 삶에 동참하여 공동의 선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통합은 건강한 통합을 말할 수 있다.

통합은 누구 중심으로 논의되고 그것은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갈등은 왜 마주칠 수밖에 없는지, 삶의 현실 안에서 진리를 사모하며 치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집요하게 묻는다. 마땅히 모든 것을 헤아려 새김질하고 가린다. 그리고 공동의 선을 향하여 마음 문 열고 단색의 사람들 그 테두리를 넘어 여러 색깔을 가진 사람들을 만난다. 편협한 이해관계를 벗어나 더욱 넓은 공동의 선으로 나아가기 위해, 겸허히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잠정의 합의와 결론을 이끌어 낸다. 그리고 힘을 모아 서로 두우며 일한다. 공동의 선으로 가는 길은 굴곡지고 험난하다. 힘없는 자들을 변두리로 밀어내는 힘 있는 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현존 제도와 불화하여 ‘갈등’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삶의 희생도 치른다. 공공의 선에 헌신하는 참된 시민은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이처럼 사회 통합은 갈등의 억제와 탄압을 통하여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어설픈 방책이 아니라, 빗발치는 갈등의 골짜기를 함께 걸어가는 순례자들의 삶을 통하여 그 수준을 높여간다.

/자료제공=한국복음주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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