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복음을 통해 확장되는 하나님의 나라
복음은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이 죄와 죽음의 권세에 얽매어 있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하시고 구원하신다는 소식이 복음이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의 백성됨에 걸맞는 거룩한 행위를 요구하였다. 그들의 행위에 따라서 복과 벌을 주신다는 것이다. 율법은 신성한 것이지만 인간의 내면을 새롭게 하지 못했다. 그래서 율법은 제사장들 및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하여 왜곡되이 집행되고 의의 열매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율법과 예언이 증거한 하나님의 복된 새로운 의를 주신 것이다. 새로운 의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안식일에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신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였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예수는 이 글이 오늘날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이 복음의 실체가 바로 나사렛 예수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침노를 당하며,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말씀하신다: “세례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마 11:12). 하나님 나라는 단지 영적 실재만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현된 개인들의 변화 그리고 공동체의 변화를 통하여 확장된다. 하나님 나라는 누룩같이 사회에 확장되며 역사 속에서 유기체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사적인 실재이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를 떠나 있지 않고 역사 뒤면으로 퇴각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를 초월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역사의 의미와 목적이다.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이루시는 주체가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다.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다.
복음서 저자 사도 요한은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같이 증언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복음주의 신약신학자 조지 레드(George Eldon Ladd)는 하나님 나라를 다음같이 바르게 규정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가 인간들 가운데 그의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구속적인 통치라는 사실과, 이 세상 종말 때에는 묵시적인 행동으로서 나타날 이 하나님의 나라가 악을 정복하고 인간들을 그 세력으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 속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예수의 인격와 사역을 통하여 인류 역사 안에 이미 임하였다는 사실이다.”
V. 하나님 나라의 온전한 개념: 단지 영적 실재만이 아니라 도덕적, 종말론적, 사회적 변혁적, 보편적 통치의 실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존
하나님 나라는 단지 한 개인의 영혼 안에만 머무는 경건한 영적 실재만이 아니다. 말씀의 선포로 인해 개인과 공동체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지는 영적 실재는 도덕적, 종말론적, 사회변혁적, 보편적 통치의 실재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현재의 모습으로 이 역사과정에서 그 파편적인 모습을 갖다가 역사종말에 그 온전한 모습으로 완성된다. 그 완성은 종교적 개인이나 인간역사의 발전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수직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1. 도덕적 실재: 리츨과 하르낙의 경우
20세기 초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을 대표하는 알브레히트 리츨(Albrecht Ritschl)은 『기독교 강요』(Unterricht in der christlichen Religion, 1875)에서 그리고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기독교의 본질』(Das Wesen des Christentums, 1900)에서 예수가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당시 유대교와 비교하면서 두가지 혁명적 내용이 들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 예수는 개인의 영혼을 무한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하였다. 유대교가 민족적 선택이라는 민족 전체에 집중시킨 데 반해서 예수는 한 사람 개인의 인격을 중요시하였다. 예수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였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눅 9:25).
둘째, 예수는 도덕성을 강조했다. 당시의 유대교가 정결의식 등 종교의식을 강조했으나 예수는 각 사람의 도덕적인 행동을 강조하였다. 각 개인이 행하는 사랑의 행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여부를 결정한다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란 각 개인들이 서로의 인격을 무한한 가치를 가진 영혼을 지닌 자로서 대하면서 도덕성을 가지고 서로 의무와 책임 가운데서 행동하는 윤리적 공동체이다.
리츨과 하르낙 등 이들 19세기와 20세기 문화기독교주의자들에게는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이 탈락되고 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현실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소망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으로 행동하고 서로 연결되는 윤리적 공동체이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가 지니는 종말론적인 차원은 윤리적 차원에 해소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를 비종말론화시킨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과 정의가 서로 입맞추는 윤리적 공동체이나 이는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이 지상에서 수평적인 윤리적 네트위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수직적인 종말론적 개입에 의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진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인간에게 가져다 주는 종말론적 인자(人子)요 구세주이기 때문이다.
2. 종말론적 실재: 바이스와 슈바이쳐의 경우
요한네스 바이스(Johnnes Weiss)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예수의 설교』(Die Predigt Jesu vom Reich Gottes, 1892)에서 하나님 나라가 도덕적 실재가 아니라 초월적으로 다가오는 종말론적 실재라고 보았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최종 사실을 망각한 것을 지적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하나님 나라는 순수종말론적이다. 신약학자 알버트 슈바이처도 바이스의 입장을 따랐다. 바이스와 슈바이처의 연구에 따르면 예수의 메시지는 철저히 종말론적이었다. 예수의 설교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이 왔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개념은 현존 세상 질서의 종말로서 임박한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자유주의적 세계관의 입장에 서서 역사적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는 현존 질서를 부정하는 현실도피적이라고 보면서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유대교의 묵시록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비종말론화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슈바이처는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생존 당시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독교는 강력한 비종말론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나님 나라 메시지의 임박한 종말론적 성격을 재발견한 것은 공헌이다. 이들은 여태까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간과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차원을 다시 부각시킨 것이다. 그러나 슈바이처는 그가 바이스에서 수용한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메시지를 실재적으로 다가오는 것으로 믿지 않고 후기 유대교의 묵시론적 세계상에서 온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종말론적 메시지는 현대과학시대에는 타당성이 없는 시대 착란(錯亂)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사상을 신화론적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해석은 초월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신화 아닌 실재로 묘사하는 성경 본연의 세계상에 타당하다고 볼 수 없다.
3. 현존질서를 변혁하는 실재: 몰트만의 경우
독일 소망의 신학자 몰트만은 『소망의 신학』(Theologie der Hoffnung, 1964)에서 하나님 나라를 현존질서를 변혁시키는 다가오는 정치사회적 질서로 파악하였다. 몰트만은 종말론을 마지막 일에 대한 이론으로서 희망의 빛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인식하는 조망으로 본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세계와의 불화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약속된 미래를 향해 쏘는 것은 모든 충족되지 못한 현재의 몸 속에서 가차없이 준동한다.” 몰트만은 하나님 나라를 바이스나 슈바이처 같은 묵시론적 세계종말의 관점에서 아니라 세계변혁의 내재적 종말론, 정치신학적 종말론의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이러한 몰트만의 입장은 리츨이나 하르낙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성격이 도덕적 차원 또는 바이스나 슈바이처에서처럼 묵시론적 차원에 편중되는 것에 반하여 정치사회적 변혁의 차원을 강조함으로써 1960년 이래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미 신흥 민중혁명에 이론적 논거를 제시해주고 기독교 신앙의 현실 변혁성을 강조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너무 사회정치적 변혁이나 정치적 혁명을 정당화하는 제한성을 지니고 있다.
4. 인류 공동체가 이루는 정의와 평화의 왕국: WCC의 하나님의 선교신학과 제2차바티칸 공의회 이후 세속주의의 경우
오늘날 WCC의 하나님 선교(missio dei)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류의 노력에 의한 평화와 정의로 나아가는 역사과정으로 이해한다. 피조물 전체가 다 오직 하나의 역사인 샬롬(Shalom)의 역사이며, 이 샬롬의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그리고 제2차바티칸 공의회(Concilium Vaticanum Secundum) 이후 가톨릭 자유주의 신학자들 역시 하나님 나라를 평화와 정의가 지배하고 생태계를 보존하는 새로운 세계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를 인정하여 모든 종교의 과제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위하여 다같이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다른 종교인들로 하여금 개종하라고 요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인과 타종교인과 불신자들의 협력으로 하나의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문화 공동체를 형성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여기서 이들 WCC 하나님 선교 신학자들과 제2차바티칸 공의회 이후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류공동체와 동일시하고 있다. 신앙과 종교는 인류공동체라는 이상적 세상이라는 사회정치적 목적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19세기 개신교 문화주의사상이 추구했던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인류공동체는 인간이 상상하는 관념주의적 이상주의 산물 이외 아무것도 아니다.
1989년 동구의 민주화와 더불어 지구촌에서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자유주의가 공산주의를 승리하고 헤겔이 말한바 이성의 이상향(utopia of reason)으로 나가는 줄 알았다. 그런데 2001년 9월 11일 이슬람의 근본주의자들에 의한 미국 뉴욕 맨허턴 비행기 납치 자살테러가 일어나 세속주의적 자유와 평화 이상주의는 딜렘마에 빠져 있다. 2014년부터 중동에서 일어난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 Islam State)의 무차별적 테러로 1천만의 시리아 난민의 발생하고 오늘날 세계는 이슬람 국가와의 전쟁 속에 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시 오심과 더불어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는 초자연적 나라다.
5.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 판넨베르그의 경우
독일 신학자 판넨베르그는 『신학과 하나님 나라』(Theology and The Kingdom of God)에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성과 보편사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한다: “미래성은 예수 메시지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에 관한 것이었느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오고 있는 현재”를 선포했다. 그는 불트만 학파와 영국의 신약학자 다드(C. H. Dodd)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메시지가 지닌 미래성을 유대교 사상의 잔재(殘滓)로 보고 이를 폐기했다고 비판한다. 판넨베르그는 미래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강조한다: “미래가 현재에 대하여 명령하며 요구하며 먼저 하나님 나라를 구할 것의 긴급성과 배타성을 모든 사람들에게 각성시켜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에 의하여 실현된다: “오고 있는 통치의 하나님은 유한한 모든 것과 관계가 있으며, 현재 있는 모든 것의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다.” 하나님은 미래를 결정하는 힘이며 하나님 자신이 바로 미래다.
판넨베르그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개념의 공헌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우주적 통치를 강조한 것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 나라 개념은 보편 이성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하나님 나라의 초자연적 묵시론적 차원을 도외시하거나 그의 보편적 역사과정의 개념 안에 흡수되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보편사의 하나님이시긴 하나 그는 역사적 이성에 의하여 누구나 보는 눈에 있는 자에게 인식될 수 있는 역사적 이성에 실증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역사 적 이성을 포괄하면서 그것을 너머서 역사의 과정을 통치하는 초자연적 실재다. 1차 세계대전이나 2차 세계대전은 서구의 계몽주의와 19세기 문화개신교신학이 예견하지 못한 것이다.
6.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현존: 종말론적 오심과 새 창조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는 그의 인격과 그의 복음 사역 안에서 현존하는 영적 실재이다. 이 영적 실재는 리츨과 하르낙이 강조한 도덕적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바이스와 슈바이처가 강조한 바 같이 종말론적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몰트만이 강조하는 바 같이 기득권을 주장하는 현존질서를 변혁시키는 질서를 지니고 있으며, 판넨베르그가 강조하는 바같이 세계의 진정한 존재로서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미래의 힘으로서 하나님의 보편적 통치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는 나사렛 예수의 인격 안에 왔으며 그의 복음 사역 안에서 그 가시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역사의 과정 속에서 구원사를 통하여 역사의 작은 무리에서 시작하여 보편적인 차원으로 확대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는 나사렛 예수와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두 분을 연결시키는 성령의 역사 속에서 그 범위를 예루살렘 교회에서 소아시아와 유럽(그리스, 이탈리아 등)과 북유럽과 북미와 남미와 호주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확대되어 나간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자유주의자와 세속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세상에서 인간의 도덕성과 정치적 기술로 이루어지는 세계평화의 이상향이 아니다.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는 다양한 측면이 있으며 역사의 과정 속에서 이러한 다양한 측면이 실현되어 간다. 이 가운데서 가장 결정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과 더불어 이 지상에 세우시는 다가오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역사 안에서는 초라한 모습을 띤다. 이 나라는 겨자씨처럼, 모든 씨앗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앗과 같다.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놓은 씨가 역경을 거쳐 잘 여물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것과 같다. 이 나라는 인간에 의하여 세우지는 나라가 아니라 다니엘의 인자(人子, the Son of Man) 사상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온 뜬 돌에 의하여 세워지는 묵시록적 하나님 나라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세상에 대한 심판과 더불어 세워지는 새로운 창조다. 현존 세상과 오는 새 세상은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진다. 오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먼저 현존 세상에 대한 심판과 총체적 파멸을 유도하고 다음으로 옛 창조 타락과 오염에 대한 총체적인 변혁으로서 새로운 세상의 창조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 3:12-13). 그러나 옛 창조는 전적으로 파멸되지 않고 엣 창조의 기반 위에서 수행되는 측면에서 연속성을 지닌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a).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계 21:24).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