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오경의 율법은 곧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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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학술원 제 78회 월례발표회, 교회와 국가란 주제로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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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기독학술원(원장 : 김영한 박사)은 최근 양재 온누리 교회에서 제 78회 월례발표회를 ‘교회와 국가’란 주제로 개최했다. 이날 첫 번째 발표자로 안석일 교수(웨신대, 서울성경신대)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국가와 종교- 이 둘은 하나가 될 수 있는가?’를 주제를 전했다.

안 교수는 먼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나의 특별한 소유’, ‘나의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라고 선언하셨던 것”처럼 “이스라엘 정치 공동체와 신앙 공동체는 불가분의 관계였다”고 했다. 즉 그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그대로 이스라엘 정치에 적용됐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신학자 맥브라이드(McBride)를 인용해 “신명기의 율법(토라)은 이스라엘의 국가 정체로 이해돼야한다”면서 “토라는 신성의 권위가 부여된 사회질서였다”고 진술했다. 또 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공동체의 정치적 생존을 위한 수단이었다”고 강조했다.

가령 그는 “율법 안에는 토지 소유에 대한 친족의 원리, 희년 및 안식년 제도, 이자에 대한 금지, 노예의 권리 등이 포함돼 있다”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사회·경제적 틀을 제공해 줬다”고 했다.

특히 그는 “십계명은 이스라엘의 국가와 신앙의 기초였고, 이는 민법과 제의 법으로 구성됐다”고 전했다. 여기서 “사람들 사이의 문제와 어떻게 여호와를 섬겨야 할지를 언급했다”면서 “민수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성막의 질서를 부여하셨고, 이는 사회질서이기도 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계수하고, 군대 진영을 갖추게 하셨다”며 ‘이스라엘의 신앙적 질서가 곧 국가의 질서였음’을 말했다.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 형성 초기부터 국가와 종교의 구분이 있었음’에 주목했다. 그는 “광야 생활이 끝나고 가나안 입성을 앞두며, 모세는 정치적 지도자로 여호수아를 세웠다”며 “동시에 아론의 후계자인 엘르아살에게 제사장적 권위도 부여했다”고 전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사시대에는 군사적 지도자 바락의 권위와 여선지자 드보라의 권위는 함께 공존했다”고 밝혔다. 특히 그는 “기드온은 왕이 되라는 요청을 거부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최고 주권자는 오직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흘렀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은 더 이상 사사를 원치 않았고, 이방 나라들처럼 왕을 요구했다”며 “이는 이방 나라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고 꼬집었다. 결국 그는 “이스라엘은 군사적이며 중앙집권화 된 이방 나라의 방식을 따라, 왕정제도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이스라엘 왕은 제사장직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는데, 이는 통치자의 신성을 제한하여 권력 분립 효과를 창출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히브리어로 왕(멜렉)이란 단어는 하나님께만 적용될 뿐, 이스라엘 왕에게는 쓰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스라엘 왕들은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신격화되지 않았다”며 “신의 특별한 대리자로, 우주의 신성한 질서를 수행하고 신전에서 국가적인 숭배 의식을 주도했던 메소포타미아의 왕들과는 매우 달랐다”고 설명했다.

이와 같이 그는 “이스라엘 왕은 제사장직을 맡지 못함으로, 신성 통치를 통한 권력 독점을 방지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은 사무엘 대신 제사장의 기능을 수행하다, 결국 왕권을 상실했다”고 덧붙였다. 때문에 그는 “왕정 수립은 이스라엘에게 군사적인 보호차원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이는 이스라엘 왕은 종교 지도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고 말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유일한 왕임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안 교수는 다윗과 솔로몬 통치시기에 이스라엘 왕은 핵심적인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윗은 성전 건축에 심혈을 기울였고, 레위인들 중심의 성가대를 조직하는 등 종교적 일에 성심으로 자원했다”(대상 23-27장)며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국가적인 일로 격상시켰다”고 했다.

반면 그는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통해, 이스라엘 왕정을 정당화하기도 했다”며 “그러면서 솔로몬이 정치적인 동맹을 위해 이방 나라의 여인들과 혼인을 맺었다"고 전했다. 하여 그는 "이스라엘 종교는 무너지기 시작했다”(왕상 11:5-10)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방 종교가 이스라엘에 퍼지면서, 솔로몬은 배교의 길을 걸었다”면서 “그 결과 이스라엘 국가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어졌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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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교수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도 앞선 전철을 동일하게 밟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여로보암은 왕실에 예배처소인 벧엘과 단을 세웠고, 그 자신이 제사장처럼 행했다”며 “또한 제사장직에는 레위 사람이 아닌 다른 이들을 명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그는 “여로보암은 율법에 지정된 절기를 지킨 게 아니”라며 “임의로 절기를 지켰다”고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는 여로보암의 방식을 따라, 강력한 나라를 형성하긴 했다”며 “오므리와 아합은 결론적으로 배교의 길을 걸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이방 나라들과 외교적 강화를 위해, 가나안 종교를 적극 수입했다”(왕상 16:31, 왕하 3:2)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북이스라엘은 여호와 종교와 선지자들을 대우하기보다, 억압했다”면서 “이 시기의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 성소에서 예언을 선포를 하지 못했다”(암 7:13)고 밝혔다. 이유로 “그곳은 왕실의 성소였기 때문”이라며 “결국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다”고 그는 강조했다.

더불어 그는 “종교와 국가의 통합은 남 유다에서도 나타났다”고 전했다. 그는 “여호사밧 왕은 사법개혁을 단행하며, 종교문제와 국가문제를 판결할 최고 법정을 세웠다”며 “그러나 판결은 제사장과 유다 가문 지도자의 감독 하에 동시적으로 이뤄졌다”(대하 17:7-9)고 했다.

게다가 그는 “유다 요아스 왕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동시에 백성들과 언약도 맺었다”며 “이는 그의 두 가지 직무를 규정했다”(왕하 11:17)고 설명했다. 그는 “왕의 권위를 종교뿐만 아니라 국가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재차 말했다. 아울러 그는 “남유다 왕조에선 종교와 국가의 통합은 지속됐다”며 “이는 유다 마지막 왕의 시드기야 왕에 이르러 그 정점을 찍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시드기야는 정치적 권위와 종교적 권위를 결합시켰다”고 했다. 또 그는 “그가 임명한 제사장은 단지 성전 관리를 위한 하급 신하에 불과했다”(렘 20:1; 29:26)고 진술했다.

결국 그는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 모두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겼다”며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아, 이방 나라의 손에 넘겨졌다”고 강조했다. 즉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정복됐다”며 “주전 587년,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정복됐다”고 그는 밝혔다. 이로서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포로로 팔려갔다”며 “정치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사라졌다”고 진술했다.

이 대목에서 안 교수는 바벨론 포로기 동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신 부분 두 가지를 전했다. 그는 첫 째로 “바벨론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말하며, “예레미야는 포로 생활이 길 것이며, 바벨론에 정착할 것을 충고했다”(렘 29장)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하나님 백성의 샬롬은 이방 나라의 샬롬과 연결돼 있다”며 “때문에 다니엘과 세 친구는 바벨론을 위해 기도했고,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을 섬겼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우상 숭배하는 이방나라에서 하나님을 증거 했다”며 “이를 통해 이방 국가의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포로기 동안 이스라엘의 공동체는 전적으로 종교적 근거에 기초했다”고 진술했다. 나아가 그는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 중요성을 훨씬 강화해 갔고, 이를 통해 하나님 공동체는 회복돼 갔으며, 믿음과 약속의 공동체성을 유지했다”고 밝혔다.

결국 그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바벨론 포로기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은 더욱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시켰다”며 “이를 위해 비교적 자비로운 페르시아의 유화 정책도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를 거친 후,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는 주체에 있어 시각 전환도 주목했다. 그는 대상 17:14절과 삼하 7장 13절을 비교했는데, 다음과 같다.

“내가 영원히 그를 내 집과 내 나라에 세우리니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대상 17:14절)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 7장 13절)

안 교수는 “사무엘하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솔로몬의 나라를 세울 것’을 언급하셨다”며 “그러나 바벨론 포로기 때에 기록된 역대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하나님의 집을 세우시고, 거기에 솔로몬을 세우실 것’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그 차이에 대해, 그는 “포로후기 시대에 정치적인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지만, 재건된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가 재개됐다”며 “공동체의 종교적인 삶이 회복됐다”고 밝혔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솔로몬의 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삼하 7장 13절), 이와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대상 17:14)고 역설했다.

하여 그는 “역대기는 포로 후기 시대 종교적 삶이 회복되면서, 이스라엘의 종교와 국가 분리를 의미 없는 것이 돼 버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그는 “포로 후기의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였다”며 “그들의 삶은 신실한 종교적 삶 이었다”고 전했다. 따라서 그는 “역대기가 바라본 하나님 나라는 결국 이스라엘의 국가와 종교를 모두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라며 “정치적 국가 또한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구성될 것”이라고 했다.

나아가 그는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실패하지 않으며, 그분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국가와 종교를 포함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장성길 박사(서울성경신대원)가 논평에 나섰다. 그는 “우리가 살고있는 대한민국과 고대 이스라엘은 태생적으로 다른 기초와 사회 구성원을 갖추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고대 이스라엘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약백성이지만, 대한민국 국민의 70%는 여전히 비기독교인”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그는 “구약 백성들에게 적용된 토라와 세부적 법조항을 오늘 우리 사회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고 되물었다.

특히 그는 “세부적 법조항은 하나님 나라 통치에 위배되는 우상숭배를 금하고 있다”며 “그렇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은 현대 국가와 사회의 법과 규정들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고 지켜야 할지에 대한 경계”를 주문했다.

한편 기독학술원 78회 월례회에서는 1부 예배로 총신대 이상원 교수가 설교를, 김영한 박사가 개회사를 전했다. 두 번째 발표로 김재성 교수(국제신대 부총장)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본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를, 논 평은 이상규 교수(백석대 석좌교수)가 맡았다. 세 번째 발표로는 최윤배 교수(장신대)가 개혁교회 전통에서 본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 평은 정성구 교수(전 총신대 총장)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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