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련이를 만난 것은 중3 때였다. 여자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리더십을 갖춘 친구는 언제나 내게 든든한 버팀목 같았다. 불행하게도 큰 형이 중풍을 맞아 쓰러지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잘 살던 친구가 가난의 늪으로 떨어졌지만, 비굴하거나 기죽지 않고 언제나 당당하였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했던 친구는 신학교를 들어가고 전도사가 되었다. 한 번도 힘들다, 어렵다 이야기하지 않던 친구가 나에게 간증 하나를 하였다.
친구는 방을 구할 돈이 없어 교회 문간방에 머물면서 전도사 사역을 했다. 신혼 때였는데 아들에게 분유 살 돈도 없어 힘들어하였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 시절 그 친구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 날 어린 아들은 고열로 칭얼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야 하는 데 돈이 없었다. 친구는 아들을 끌어안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자기 처지가 너무도 처량하였다. 아빠가 되어서 병원에 데려갈 돈이 없는 게 부끄러웠다. 기도하는 데 눈물이 났다.
“하나님! 아버지가 되어서 이렇게 무능합니다. 병원 갈 돈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부는 눈물 콧물 흘려가며 기도하는데 보채던 아이가 조용히 잠들었다. 쌔근쌔근 자는 아이를 눕혀놓고 부부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였다. 아침에 아들의 머리를 만져 보니, 열이 기적처럼 사라졌다. 친구는 하나님께서 아들의 병을 고쳐 주었음을 간증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나는 친구가 부럽기도 하고, 시기도 났다. ‘왜 나에겐 저런 믿음과 능력이 없을까?’ 나도 사역자인데 병 고치는 능력을 받았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였다. 그날부터 난 은근히 우리 아이가 아프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딸아이가 감기가 걸렸는지 열이 나기 시작했다. 아내는 병원에 가려고 준비하는 데 내가 야단을 쳤다.
“사람이 그렇게 믿음이 없어서 되겠느냐! 이리 데려와라 내가 기도해줄게.”
아이를 붙잡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이는 발버둥을 치면서 크게 울었다. 더는 기도할 수 없었다. 나는 금방 포기하였다.
“빨리 병원에 데려가라!”
그때야 깨달았다. 내가 정말 믿음이 없구나.
그 후로 목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나의 믿음은 너무나 부족하다. 가끔 믿음이 있다 하는 사람을 만나면, 부럽기 그지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라고 했다. 왠지 이 말이 위로가 되면서도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바울이 말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기를 원하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바리새인이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가득하였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 로마의 압제 하에서도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진리를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살려고 힘썼다. 바울은 존경받는 바리새인이 되고 싶었다. 그는 위대한 랍비 가말리엘에게 성경을 배우며 당대 최고의 바리새인이 되었다. 그는 망해버린 조국과 타락한 유대교를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적당주의, 세속주의, 물질주의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유대교를 혼탁하게 하는 것들을 척결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그런 바리새인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한 분이 예수님이었다. 거룩한 삶을 살려고 매일같이 몸부림치며 애쓰는데.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기도하는 일에 앞장서는 사람들인데. 왜 예수님은 그들을 비판하였을까? 그것은 저들에게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기준을 정해 놓았다. 그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고, 훈계하고, 야단쳤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서 자기도 감당하지 못할 멍에를 사람들에게 지운다고 비판하였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바리새인은 없을까?
나는 합동 측 장로교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장자 교단이란 말을 들었고, 합동 측이야말로 정통 보수 신앙을 지킨다고 배웠다.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교리가 우리 삶의 표준이 되었고, 그것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고, 판단하고, 비판하였다. 때로 정죄도 하였다. 그러나 바른 교리가 바른 사람을 만들지 못한다. 바른 교리에 반드시 사랑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의 지난날 모습은 마치 자기도 감당하지 못할 멍에를 다른 사람에게 지우는 바리새인과 같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주변에 바리새인이 참 많다. 가끔 영성 있다 하는 분들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종종 본다. 설교 중에 반말은 예사고, 자기 기도가 얼마나 신령하고 신통한지를 자랑한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이 마치 계급장 인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나 기도했느냐? 얼마나 영성 있느냐로 구분한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도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가끔 큰 교회에서 제자훈련받았음을 자랑하는 분들을 만난다. 이름을 대면 다 알만한 교회에서 유명한 목사님에게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고 지도자 과정까지 마쳤다고 하는 분들을 본다. 설교를 조금 못하는 목사를 보면 은근히 비꼬기 일쑤다. 바울은 말한다. ‘내가 …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고전 13:2).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사랑 없는 믿음이 저지른 범죄가 얼마나 큰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서양사를 살펴보면, 믿음의 문제로 많은 사람을 죽였음을 알 수 있다. 이단 논쟁에서 종교전쟁으로 그리고 마녀 사냥으로 사람들을 죽였다. 가톨릭과 기독교가 싸우고, 나중엔 개신교끼리 싸웠다. 믿음 전쟁은 말릴 사람이 없었다. 결국 세상 정부가 나서서 종교인들에게는 해결책이 없으니 (믿음으로는 답이 없으니) 상식이 통하고 이성이 통하는 우리(불신자)가 다스려야겠다고 하였다.
그러면 정말 믿음이 문제일까? 원래 믿음이란 어떤 특정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니었다. 믿음의 원래 뜻은 ‘누구를 신뢰한다, 누구를 사랑한다, 누구에게 마음을 준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가장 위대한 계명을 이야기할 때 진실로 믿어야 한다고 하지 않고 사랑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 하고 힘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음은 사랑이었다. 믿음과 사랑은 분리할 수 없고, 분리해서도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과 사랑을 분리함으로써 폭력, 비판, 손가락질, 야만적인 행위를 믿음의 이름으로 자행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고의 사랑은 ‘십자가’이다. 자기 목숨을 아낌없이 다 내어주신 사랑이 ‘십자가’이다. 초대 교회 믿음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자기 생명을 다 주어 사랑함으로써 생명(부활)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믿었고, 또 그렇게 살았다. 초대 교회의 힘은 십자가에서 나왔다. 그것은 사랑 때문에 죽는 일이요, 낮아지는 일이요, 섬기는 일이다. 믿음은 사랑이다.
만일 믿음에서 사랑을 빼버리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남을 해친다.
사랑 없는 믿음은 무섭다.
사랑 없는 믿음은 정죄한다.
사랑 없는 믿음은 공격적이다.
사랑 없는 믿음은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사랑 없는 믿음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 배경락 목사는 기독교 인문학 연구소 강연자로, '곧게 난 길은 하나도 없더라' '성경 속 왕조실록' 등의 저자이다. 그는 일상의 여백 속에 담아내는 묵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인문학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