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사는 사람마다 소원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개인뿐 아니라, 가정과 지역, 나라와 민족마다 공동체적인 소원이 있게 마련이다.
우리나라의 소원은 통일이요. 정치인들의 소원은 당선이요. 기업인들의 소원은 성공이라 할 것이다.
고전1장에 보면 사람이 세상을 살 때 추구해야 할 것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라고 했다.
희망은 삶의 원동력이요 추진력이다. 왈츠가 그린 “비파를 타는 여인”은 인간에게 희망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그림이다.
외로운 여인이 둥근 지구에 앉아서 비파를 타는데 그 눈은 멀었고 비파 줄은 모두 끊어 졌는데 오직 한 줄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고 그 뒤에는 별 하나가 눈에 띈다.
세상의 줄이 다 끊어질 지라도 희망의 줄 하나만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살 수 있음을 보여준 다. 사람은 세상의 많은 줄을 붙들고 산다. 부모 부자지간 세상 권세, 지식 명예의 줄을 붙잡고 사나 그 줄은 언젠가는 끊어질 날이 온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와 소망의 하나님이라고 호칭한다.
우리는 원래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소망이 없던 자들이었다.(엡2:12)
인간을 누가 만들었는가? 인간의 죽음은 왜 오는가? 죽음은 어디로 가는가? 끝이 나지 않는 질문을 던져보지만 끝이 나지 않는다. 성경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정확한 답을 가르쳐준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신성한 존재였다.
그러나 인생은 자기의 본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 악행을 저지르는 죽음의 길로 떨어져 내려갔다. 선한 인간의 모습은 순간이요. 악행을 저지르는 사탄의 모습은 영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인간을 시편140:2-3절에는 살모사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고후 11:3절에는 독사의 새끼로 비유 했으며 딤전1:13절에는 하나님의 일을 훼방 하는 자라고도 하였다. 이런 인간이 무슨 소망이 있겠는가? 그런데 소망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며 우리에게 산 소 망을 안겨 주셨다.
단순히 사는 소망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넘치는 소망을 안겨 주신 것이다. 디도서 1장2절은 영 생의 소망을 살전 5:8절은 구원의 소망을 디도서 2:1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의 복스러운 소망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소망은 죽음을 뛰어 넘는 영원한 천국의 소망이다.
무엇보다도 본문은 구원의 소망을 말하고 있다(8절).
예수님은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구원의 소망이 되신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죄인이며 죄 값으로 죽음의 절박한 운명 아래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 였다.
사도 베드로는 소망의 사도이다.
환란과 핍박이 심한 초대 교회의 신도들에게 믿음의 눈을 떠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권면하고 있다. (밷전1:3-4)
근세에 과학이 발전하고 문화와 문명의 꽃이 필 때 인간은 낙관적인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제 1,2차 대전을 겪고 난 후에는 이 모든 낙관적인 희망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잿더미 위에서 오직 희망은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고 몰트만 교수는 희망의 신학을 강조 했다.
시편 62편 1-5절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 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 하리로다.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 도다.
다윗이 그 큰 어려움을 이겨낸 비결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절망 직전으로 우리를 정복 하려고 한다.
사방을 보아도 절망뿐이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로마에 가면 원형 극장이 있다. 이곳이 한 때는 피가 땅에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고 한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사자의 밥이 되면서도 찬송을 부르며 순교의 현장으로 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대답은 성령의 강한 역사라는 것이다.
심리학자인 마스틴 박사가 3천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 당신은 삶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하고 물으니 94% 퍼센트가 “기다리는데 있다”고 했다고 한다.
기회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고 소식을 기다리고 물건을 기다리고 사람의 생애가 기다림으로 연결 된다는 것이다.
무엇인가 막연하지만 오늘보다 나은 소망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15:43절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했다.
얼마나 멋진 인생이며 소망이 견고한 사람인가?
사도행전 1:4절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다.
성경은 약속의 책이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이다.
로마서 8:24-25절에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 지니라”고 했다.
소망은 내가 만들어 내어 품는 소망이 있고 하나님께서 심어 주시는 소망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을 품어야 한다.
거기에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겉보기에 똑같은 계란도 유정란이 있고 무정란이 있다.
깃털로 품는 것은 자유이다.
그러나 그 결과의 차이는 비교가 안 된다. 유정란은 기한이차면 생명이 잉태되어 나오는 기적을 볼 수 있지만 무정란은 그 속까지 곯아 썩어져 버린다.
내 맘대로 나의 욕망을 따라 이렇게 되어 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우리 인생마저도 곯게 만들 수 있음을 잊지 말자.
반드시 주님이 주시는 소망을 품고 살자. 그럴 때 반드시 새 생명이 부화하게 된다.
왜 그런가? 그 안에 성령의 능력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요셉의 생을 생각해 보자. 그야말로 소설 같지 않은가?
형들에 의해 보디발의 집으로 팔려가고 그 아내에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옥에 갇혀 옥살이를 하다가 드디어 관원의 꿈을 해몽해 주어 왕 앞에 불려가게 되며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이 모든 사건을 하나 떼어 놓고 보면 아주 우연한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을 유심히 통찰해 보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움직이는 톱니바퀴처럼 정교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본문은 이 대목을 이렇게 기록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소망을 이루는 데는 사람의 노력도 필요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 구하자. 이 두 가지를 병행할 때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하나님의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진다.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신다.
믿음 안에서 기쁨이 생기고 평강이 넘치는데 누가 주시느냐?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참된 기쁨과 소망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우리의 정서 상태가 우리 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예를 들어 2007년 미국 심장 협회학회에 실린 논문을 보면 희망을 잃을 때 그것이 몸에 나타나는 부정적인 영향이 나와 있다.
이 논문 요약을 보면 심한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후 4년 동안에 동맥 경화병에 걸릴 확률이 20퍼센트 늘어난다고 한다. 다른 연구 결과들도 절망감을 품을 때 심장병이나 심장마비 또는 사망과 관계가 있다고 말하 고 있다.
사람이 정신 건강과 육체적 건강과의 상관관계는 현대에 와서야 발견한 것은 아니다.
구약 잠언 17:22절에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심려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고 하였고 또 “지혜는 그것을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된다”고 잠언 4:22고 하였다.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바른 관계를 맺으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유익하게 된다.
이때에 우리가 복으로 받는 선물이 우리를 건강하게해 주는 소망으로 가득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어 진다. 그 소망이란 곧 죄의 완전한 용서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영생을 확신하는 것이다.
낙관주의는 “기운 내”라고 말하고 소망은 “하나님을 바라보라. 너희 구원이 다가오고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기독교적 소망은 아브라함과 같이 바랄 수 없는 없는 중에 바라며 인내 하는 것인데, 인내는 인격을 낳고 인격은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러한 절망의 묘지에서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중심적인 소망을 붙잡고 나가야 한다.
1941년 제인 화이트는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설교가 였던 남편 알렉산더가 10년 전에 세상을 뜨자 그녀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절망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남편의 친구가 찾아와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 “당신의 가장 큰 관심은 무엇 입니까”라고 남편 친구가 물으니 “죽을 준비를 하고 있지요”라고 화이트 부인이 대답했고, “왜 살기 위해서 준비 하지 않습니까?”라고 친구는 되물었다. 바로 그 질문이야 말로 화이트 부인이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헤어 나오기 위해 들을 필요가 있는 말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녀는 그제서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살아서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의 삶은 바뀌었고 2년이 안 되어 스위스 제네바의 선교 단체를 조직하고 인솔하여 선교에 큰 공헌을 하는데까지 이르게 된다.
삶은 때때로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보일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신다. 바울 사도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함깨 하시기를 원하노라. (롬15:13:)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라고 했다.
나의 환경이 어떠하든지 죽을 준비를 하지 말고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자. 믿음 안에 서서서 충만해 져서 다시 살 준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의 역경이 우리를 허무하게 만드는가? 아니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하여 더 낫게 만드는가?
어떠한 환경이나 문제 앞에서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희망이 남아 있다. 배를 저어 가자. 건너 저편 언덕에 주님은 절망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위해 물위를 걸어 오셨다. 물에 빠져 가는 베드로에게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