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가끔 스스로에게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가를 묻고 싶어진다.
성경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존재로서 우주 만물보다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과 영원히 동거하며 영생하는 존귀한 존재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기에 죽음이 아니라 살 가치가 있기에 죽지 말고 “살라”고 하신다.
유교는 지명사상(地命思想) 을 강조한다.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한다.
생명은 영어로 라이프(life)요 라틴어로는(vita)라고 한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살아 있는 생명 즉 목숨이란 뜻이다. 인생론의 저자 안병욱님은 생명이란 무엇이냐에 대해 (生)“살라”는 하늘의 진지한 명령이요 하나님의 진지한 명령이라고 했다. 과거에 살아온 목숨도 중요하 고 현재살고 있는 목숨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살아야 할 목숨은 더 중요하다. 그러기에 생명의 포기는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에 대한 거역이요 자살은 진지한 명령에 대한 배신이라고도 했다.
생명은 신비한 것이고 생명은 존엄 하다. 따라서 그 생명은 내 마음대로 끊을 수도 있고 포기 할 수도 있는 내 전용물이나 내 소유물도 아니다. 생명은 그분에 의해 내게 맡겨진 보물이다
그리고 위탁받은 자는 그 분이 돌려 달라고 할 때 까지 그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갈고 닦고 빛내고 섬겨야 한다. 우리의 목숨은 대명이다. 크고 소중한 목숨 이란 말이다.
나의 핏줄기 속에는 부모의 혼이 깃들어 있고 조상의 얼이 있기에 목숨은 나 개인만의 것 이 아니다. 내가 어머니의 몸에 잉태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수없이 기도 하였고 아버지는 귀한 생명이 탄생하기를 바랐고 온 가정이 희망과 기쁨과 정성 속에 나를 기다렸다. 나는 부모님의 한없는 수고와 사랑과 희생으로 오늘의 내가 되었다고 믿는다.
아버지의 태산보다 큰 은혜와 어머니의 바다보다도 더 깊은 사랑 속에서 나는 양육되고 성 장 하였다. 하나의 생명을 낳아서 기르고 키우기 위해서 온 가족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던가? 생명은 정성의 산물이요 수고의 결과요 사랑의 결정체요 생의 결과요 피와 땀의 결실 이다. 진자리 마른자리를 수 없이 가려누인 어머니의 수고로 내가 이만큼 성장 했다.
그 뿐인가? 우리 생명 속에는 위대한 가능성과 놀라운 잠재력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들이다. 우리의 몸속에는 금은보석이 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자는 이렇게 고백 하였다.
"주여 바라는 이 당신뿐이요 어려서 부터 믿는 이 야훼 당신입니다. 모태에서 부터 나는 당신께 의지하였고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당신은 나의 힘이었으니 나는 언제나 당신을 찬양 합니다. (시71:5-6)
그 분은 생명을 주기도 하고 도로 찾으시기도 한다. 그 분만이 줄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다. 그 분 아닌 누구도 마음대로 생명을 앗아가선 안 된다.
이 땅에 태어난 자는 모두 다 “살아” 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다.
요즘 우리 현실이 절박하고 심각해서인지 최고 학부의 지성인들(고위 정치인, 법관 사업인 기업인)들이 많이 죽어가고 있다.
물론 나름대로의 절실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한편 동정심도 가게 된다.
여기에는 사회의 책임도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금번 30대의 젊은 부부가 어린자녀 두 남매를 끌어안고 자동차 안에 불을 피워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그 부부의 행동을 안타깝게 생각 하면서도 조금만 이웃과 정부의 관심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런 일이 더 이상 계속 되지 않기를 기원해 본다.
중국영화 부용진의 주인공이 파괴하는 행위가 나온다. 체포되어 끌려가면서 자기 아내에게 “돼지가 되어서라도 살아 남아라. 소가 되어서라도 살아 남아라” 외치고 갔다고 한다. 우리말로는 개, 돼지가 되어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산다는 것이 죽기보다 어려운 때가 있다. 죽을 용기로 죽지 말고 살아서 비리를 해결 하는데 노력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존엄한 근거는 첫째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고로 타살이나 자살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을 파고하는 행위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값을 주고 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생명을 경외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는 자살 하지 말라는 금지 구절이 없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자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은 문제가 있다. 가룟 유다가 자살했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일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했다. 고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골로새 3:3절에는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 졌느니라“고 했다. 고로 그리스도인은 이미 육욕과 세상에 대해 죽은 자이다.
그래서 이제는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 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 43:1)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바울 사도는 담대하게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 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다닐 지라도 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분명히 이 약속을 믿고 죽으나 사나 주의 것이라는 각오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 8절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겠다는 다짐과 주님을 위해서 죽겠다는 마음이며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신앙 고백 위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기에 살 걱정은 하지 말고 오직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만 살 것을 다 짐 하자.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 할 수 있느냐?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한다.
어떤 책에서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조사해 통계를 냈다.
걱정 하는 것의 40%는 절대 일어날 가망성이 없는 것들이고 또 걱정의 30%는 과거의 일 과 관련된 걱정이라고 한다. 또 12%는 건강에 관련해서 불필요한 걱정이고 10%는 중요 하지 않은 사소한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한다. 오직 8%만이 자기일과 관련된 문제를 가지고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6:25-34절에서 우리가 먹고 살 걱정을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 할 것이요 한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갔지만 자신이 죽지는 아니 하셨다.
먹고 마시는 것을 염려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는 것이다. 먹고 사는 것으로 자꾸 걱정하게 되면 믿음이 약해지고 낙심되기도 하고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구약 잠언15:13절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 고 했다.
빌립보서 1:21-25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했다.
바울의 생각대로 라면 죽고 싶었겠지만 주님의 뜻을 생각 할 때 아직은 살아서 동족을 위해서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는 것을 단념하고 삶을 택했다
한번은 존 번연이 자살하려고 할 때, “자살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라는 천사의 외침을 듣고 죽는 것을 중지 했다고 한다. 그는 사는 것이 죽기보다 괴로운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저 유명한 ‘천로역정’을 후세에 남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의 길을 갔지만 자신이 죽지는 아니했다.
영국의 무신론자 죠셉 바커가 영국 북부 광산촌에 가서 강연을 하고 결론을 맺을 때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의 신화에 불과 했다는 것을 설명 했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셨으리라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단을 내려가려고 할 때 탄 가루가 몸에 묻은 광부 하나가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나는 보시는 것처럼 하나의 광부에 불과 합니다. 지금 하신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는 하나의 신화의 존재라고 말씀 하셨는데 내가 그 뜻을 모르니 다시 설명해 주십시오. 3년전 까지만 해도 우리 가정은 비참한 상황 이었습니다. 나는 처자식을 버리고 술로 탕진을 했고 도박으로 몰두하여 재산을 탕진했고 내 입에는 음란패설로 가득했고 그러던 어느 날 어느 분이 찾아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지금 나는 처자식을 사랑하게 되었고 모든 것이 만족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이 신화라니요? 이것이 신화라면 나 같은 술주정뱅이 방탕아가 그 신화의 힘입어 이렇게 변화 할 수 있습니까?”
그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 있었고 강연을 들은 사람들은 광부의 간증에 크게 감동을 받고 일어서서 큰 박수를 치고 할렐루야 하면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라고 찬양하면서 그 자리를 떠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누구를 위해서 살 것인가? 우리는 이미 주님의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것이니 그분께 모두 맡기고 자살은 절대 금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보자. 모든 문제는 실타래 풀려 지듯 풀려지게 되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