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생명'보다 '선택' 선택하다... 낙태죄 위헌 판결 내려, 선택이 생명보다 상위 가치인가?

사회
사회일반
노승현 기자
shnoh@cdaily.co.kr
  •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다. 

낙태를 전면 금지하고 이를 위반해 낙태를 할 경우 형사처벌 하도록 하고 있는 현행 형법 규정이 임산부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해 위헌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헌재는 '생명'보다 '선택'을 선택했다.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생명'보다 '선택'이 더 우위에 있는 가치, 더 헌법적인 가치가 되어버렸다. 나라의 가장 상위법인 헌법을 다루는 헌법기관이 인간의 선택에 따라 얼마든지 생명을 죽일 수도 있는 합법적인 권한을 준 것이다.

미국에서 1973년 연방대법원에 의해 낙태가 합법화된 것처럼, 한국도 약 반 세기 후에 같은 길을 가게 됐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이제 무수한 태아들이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살해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헌법재판소는 11일 산부인과 의사 A씨가 자기낙태죄와 동의낙태죄를 규정한 형법 269조와 270조가 위헌이라며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7대 2 의견으로 위헌 결정했다.

이에 따라 1953년 제정된 낙태죄 규정을 66년 만에 손질하는 작업이 불가피해졌다. 임신 후 일정기간 내 낙태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으로 법개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자기낙태죄'로 불리는 형법 269조는 임신한 여성이 낙태한 경우 1년 이하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의 벌금으로 처벌하는 내용이다. 270조는 의사가 임신한 여성의 동의를 받아 낙태한 경우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하는 '동의낙태죄' 조항이다. 자기낙태죄에 종속돼 처벌되는 범죄다.

헌재는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다만 낙태죄 규정을 곧바로 폐지해 낙태를 전면적으로 허용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조항을 개정하라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 기한까지 법이 개정되지 않을 경우 낙태죄 규정은 폐지된다.

헌재의 이번 판결에 대해 기독교계에서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 개신교회 "깊은 유감"

낙태법 유지를 바라는 시민연대는 성명을 내고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에 대한 헌법 불합치 결정에 대해 생명을 지키고 보호하는 생명보호운동단체는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연대는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하여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며, 이는 2012년 8월 헌법재판소가 위헌정족수 6명에 못 미치는 4대4 의견으로 합헌을 선고한 지 7년 만"이라면서 "2012년 당시 결정문에서는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고, 이 세상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엄한 인간 존재의 근원이며, 이러한 생명에 대한 권리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태아가 비록 그 생명의 유지를 위하여 모(母)에게 의존해야 하지만, 그 자체로 모(母)와 별개의 생명체이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므로 태아에게도 생명권이 인정되어야 하며, 태아가 독자적 생존능력을 갖추었는지 여부를 그에 대한 낙태 허용의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라고 합헌을 선고하였다. 이후 의학기술의 발달로 임신 6주부터 태아의 심장 박동을 들을 수 있는 지금, 2012년의 선고를 뒤집는 헌법 불합치 결정은 시대착오적이며 비과학적인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헌법 정신은 '모든' 생명의 보호라고 되어있으며, 민법에서도 생명의 시기(始期)는 수태(受胎)한 때를 기준으로 하고 있으며, 2008년에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생명의 시기는 수정과 착상의 과정을 거치면서 시작되고, 형성 중인 생명도 생명이라는 점에서 태아가 생명권의 주체가 된다고 보았다. 이처럼 법정신이나 실정법이 태아가 생명임을 인정하고 있는데,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행위를 국가가 법으로 허용한다는 것이 얼마나 모순된 결정인가!"라고 덧붙였다.

또한 "오늘의 판결은 여론이 자연법칙을 이기고, 정치가 생명과학을 이긴 것이다. 그러나 법이 바뀐다고 해도 낙태하면 아기가 죽는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면서 "헌재의 선고에 깊은 아쉬움을 표하면서 향후에도 우리 단체는 헌재의 결정과 관계없이 여전히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중지하지 않을 것이며, 낙태하지 않고 태아의 생명을 지킴으로써 여성의 신체, 정신적 건강을 지키고 출산을 원하는 여성이나 남성의 권리를 보호하는 데에 힘쓸 것"이라고 천명했다.

한국 천주교회도 "깊은 유감"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날 의장 김희중 대주교 명의 입장문에서 "헌재가 낙태죄의 위헌 여부를 확인해 달라는 헌법 소원에 대해 헌법불합치 선고를 내린 데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수정되는 시점부터 존엄한 인간이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존재인 태아의 기본 생명권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원치 않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여성에게 고착시키고 남성에게서 부당하게 면제하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낙태는 태중의 무고한 생명을 직접 죽이는 죄이며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행위라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는 변함이 없다"고 강조했다. 주교회의는 낙태죄가 개정되거나 폐지되더라도 낙태 유혹을 어렵게 물리치고 생명을 낳아 기르기로 결심한 여성과 남성에 대한 지지와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밝혔다.

주교회의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한 여성과 남성이 용기를 내어 태아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선택하도록 도와줄 법과 제도의 도입을 대한민국 입법부와 행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천주교 서울대교구도 이날 헌재 판결에 유감의 뜻을 전하고 관련 후속 입법 절차가 신중하기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대교구는 대변인 허영엽 신부 명의 입장문에서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한다"며 "임신한 여성과 태아의 생명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법적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 사회가 출생과 사망에 이르는 생애주기 전반에서 생명의 문화를 지켜내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며 가톨릭교회도 필요한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