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후회가 있는 세월과 후회가 없는 세월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행복은 어느 쪽이 더 많았던가에 따라 달라 질 것입니다.
후회가 심할수록 과거가 순탄하지 못하거나 아름답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마땅히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최선을 다하지 못 했다는 후회들이 우리들의 앞길을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인생의 패배자들은 과거라는 고치 속에 들어가 후회의 실을 뽑아내 자신을 감싸고 살게 됩니다. 결코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아니하고 후회의 넋두리를 늘어놓습니다.
그러다가 아예 미래와는 담을 쌓고 지냅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자들은 뒤를 돌아보느라 결코 앞을 보려고 해도 볼 수가 없습니다. 불행한 인생을 사는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후회가 가져오는 하나의 함정이 있습니다. 소위 책임을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전가시키기가 쉽습니다.
후회 할 일이 생기면 대부분 핑계를 대면서 주위 환경이나 타인을 비난의 대상으로 삼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선뜻 인정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변명 거리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환경만 잘 타고 났어도. 그 일이 잘 풀리기만 했어도. 내 팔자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부모 탓, 이웃 탓, 형제, 친구로 원인을 돌립니다.
이런 이들은 그 사람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 이렇게 남 탓하기에만 분분합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로 전가 시킵니다.
자기의 잘못은 생각지 않고 주님의 탓 하느라 바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기 때문 이라고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 하신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겪게 하신단 말인가? 잘못은 자기가 해놓고 그 모든 탓을 하나님께로 돌립니다.
아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하나님의 책망을 듣자. 그 상황을 모면 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여자가 따 먹으라”고 했다고 그 책임을 둘러댑니다.
자신의 책임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뚱단지 같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여자를 들먹거리며 그 하나님께로 돌려댑니다.
이런 것을 성경에는 착각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의 축복을 받아야 할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도 축복도 받지 못했을까요? 바로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면 되었을 것을 변명하기에만 급급한 것입니다.
삼상 15:1절에 사무엘이 사울 임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주셨는 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아람과의 전쟁에서 아멜렉을 진멸하고 얻은 소와 양과 모든 것을 진멸 하라고 하셨음에도, 사울왕은 소의 가장 좋은 것 어린양과 모든 좋은 것은 남기고 진멸하지 아니 했습니다.
(1절) 하나님이 근심거리가 되었다.
불순종하는 자는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사무엘이 왕에게 대하여 책망을 합니다.
삼상 15:19절에는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하시나이까?”라고 기록됐습니다.
변명을 합니다. 다 멸하였다고. 21절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행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하나님께 제사 하려고 양과 소를 취하였나이다.“ 그때 사무엘의 말은 이렇습니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 보다 더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왜 불순종할까요? 교만에서 나온 것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생각 하는 것이 가장 좋고 당신들은 모르고 하는 말 이라고 생각하기에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계속되면 불순종은 체질화 되고 습관화 되고 맙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러했습니다. 자꾸 불순종을 하더니 이 후에는 불평을 털어 놓습니다.
그것이 또 습관이 되니 구제 불능의 사람이 됩니다. 심히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우상을 숭배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목적을 상실하는 불행한 존재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하면 인생의 실패자가 됩니다.
주초에 인이 박힌 분이 교회를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끊기 위해 본인도 다방면으로 노력을 하였고 나도 계속해서 관심을 가져 봤지만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루는 늦은 밤에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인생이 사는 목적이 무엇 입니까?”
전화로 오래 말 할 수 없어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한 마디로 목적 상실이 근본적인 잘못입니다. 목적을 바로 알아야 인생으로 행복한 삶을 누 릴 수 있습니다.”
그 분이 듣는 듯 했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제일 먼저 공부 할 것은 순종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내가 존경 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려고 예수를 믿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바로 알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 인생을 바로 사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양식에서 본 예화입니다.
윌리암 보텐 씨는 1904년에 시카고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큰 농장의 법적 상속인으로 이미 백만장자가 됩니다.
그의 부모는 그런 그에게 세계 일주를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시아 중동 그리고 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고통 받는 사람들을 직접 목격한 후로 마음에 큰 부담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일생을 전도 사업과 그 일에 대한 준비에 바치겠다는 편지를 써서 부모님께 보냅니다.
그가 이러한 결심을 했을 때 그의 성경 뒷 표지에 ”지체 할 수 없음“ 이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 뒤 그는 예일 대학을 졸업 하면서 좋은 보수가 보장된 일자리를 거절하고, 이번에는 ”후 퇴 없음“ 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얼마 못 살고 결국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전도 사업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성경 뒷장에는 “후회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남들은 그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생각 했지만, 그는 후회 없다는 말로 자신의 뜻을 성취 이루었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 시키셨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라도 “후회 없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1만여 명의 교인을 뒤로하고 농촌 오지에 가서 제2의 삶을 시작한 백주년 기념교회 이재철 목사의 모습이 신선하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후회가 없는 삶
노벨평화상을 받은 두 명의 여성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빈자의 어머니라 부르는 마더 테레사(mother ters)인데 그는 인도 캘커타 변방에서 가장 헐벗고 가난하고 못사는 빈민촌에 들어가 병자들과 더불어 동거동락 하며 일생을 헌신 했던 분입니다.
그가 노벨상을 수상 했을 때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여기에 온 것은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곳에 가라고 명하셨기 때문에 순종하고 왔을 뿐입니다. 나는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마음과 뜻을 기울여 그 일을 수행 한 것 뿐입니다.”
얼마나 가슴에 와 닿는 말입니까? 한국에 이러한 정신으로 사역하는 자들이 많아지기를 기원 할 뿐입니다.
또 한 분은 제인 아담(jane adams) 여성입니다.
그녀 역시 시카고 빈민촌에 들어가 노숙자들과 함께 하면서 일생을 불살랐습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후 그의 간증을 들어 봅시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셨고 그 부르심에 순종 했을 따름입니다. 내가 받을 영광이 있다면 그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려야합니다.”
부족하지만 본인이 다문화 선교 센터에 몸담고 온갖 모욕과 어려움을 참고 견디면서 일해 온 것은 오직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무슨 말인가요. 사명을 완수 했다는 선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서의 사명을 완전히 성취 했다는 의미입니다.
후회 없는 인생을 원하십니까?
바르게 생각하고 위를 바라보고 미래를 보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내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약속 된 복을 누리며 후회 없는 삶을 사는 누리는 자들 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