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선한 길보다 악한 길, 의로운 길보다 불의한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진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세속적이고 거짓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결국 망하는 경우도 허다하게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축복 하시려고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항해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결국 그릇된 길로 가게 된다.
성서는 계속해서 그러한 인간의 거역의 행동이 고리처럼 연결되어 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당신의 종들을 보내시고 경고의 신호를 보내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최후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으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저버림으로 구원의 축복은 이방인에게로 흐르게 된다.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복음이 전하여진 것도 우리가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우리에게까지 흘러 들어오게 된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하는 바와" ”큰 근심“ 그리고 마음에 그 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음을 볼 수 있게 된다.
또한 우리 주님 부활 승천 하실 때의 제자들의 가슴에도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즉 로마의 압제로 부터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 되고 독립을 이루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도 이러한 불타는 염원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복 받는 일에만 안주하는 작은 성도로 머무르지 말고 미래의 꿈에 도취되는 성도가 되어보자.
1.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개개비’라는 작은 새의 이야기가 있다. 이 새가 알을 품고 있으면 뻐꾸기가 주변을 맴돌다가 개개비가 자리를 빈 사이에 날아들어 개개비가 낳은 세 개의 알 중 하나를 물어내 던지고 자신의 알을 낳고 키우는데 그 걸리는 시간은 불과 약10초 정도라고 한다.
이후 개개비는 전혀 눈치를 못하고 열심히 알을 품는다.
놀라운 것은 뻐꾸기의 알이 먼저 부화하게 되는데, 뻐꾸기의 새끼는 깨어나 눈도 뜨기 전에는 개개비와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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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개개비 보다 배 이상으로 자라게 되지만, 결국 개개비는 뻐꾸기의 새를 길러낸 꼴이 된다.
이렇게 뻐꾸기 새끼를 자신의 새끼인 것으로 오해하고 열심히 길렀는데, 알고 보면 자신의 알들을 다 둥지 밖으로 밀어내고 다른 새끼를 길러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개개비는 얼마나 억울할까.
이 광경을 상상하면서, 사람들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을 하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미 하나님이 예비하신 참 생명의 길과 구원의 길이 놓여 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신의 힘이나 행함으로 해법을 찾아보지만 사실은 잘못 가고 있다. 정 반대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일에 혼신을 기울이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지적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신 의가 있는데도 인간은 그것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의를 내 세우는 어리석은 행동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거역할 뿐 아니라 오히려 멸망의 길을 가게 됨을 말씀하신 것이다.
누구든지 인간은 결단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를 갖춘 사람만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다.
그러면 사람의 의라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자.
먼저 인간들은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범죄한 인간은 절대로 율법을 완전히 이룰 수 없다는데 있다.
말하자면 배가 침몰하는 경우와 같다고 할까?.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 액자가 기울어져 있고 책상이 삐뚤어져 있는 것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지금 배가 침몰 직전 인데 책상을 바로 놓았다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중요한 것은 파선된 배를 정상으로 돌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예비하셨다.
2. 하나님의 의
하나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셔서(요1:1) 당신의 의로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여 죄 없는 삶을 사셨고(고후5:21) 우리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고난을 받아 죽으셨으며,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 하셨다(행2:24). 다시 말해서 하나님 우리의 죄의 결과에 대가를 치르기 위한 모든 대가를 치르셨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요3:16).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아야 하고 영화롭게 하며(고전10:31), 영원토록 기쁘게 살아야 하는(계7:15-17) 그 원래의 목적들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태어날 때부터 죄인 된 사람(시51:5), 스스로 불순종의 길을 선택한 사람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엡2:1),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사람(롬8:8),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아래 있는 사람(롬1:18)들을 위해 죽으셨다.
미국의 장로교 선교사인 보우먼 선교사가 인도에서 선교 할 때의 일이다.
80세가 넘은 인도의 노파가 선교사의 전도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한 불신자가 노파에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이 믿던 종교에도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당신은 그 많은 신들에도 만족 할 수 없었나요?”
노파는 이렇게 대답 했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 나를 위하여 죽은 신은 아무도 없었소.”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을 의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도록 십자가에 못박아 죽으심으로 참 생명의 길을 여신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의가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을 본문에서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고 하셨다.
죄범한 인간이 의롭게 되기 위하여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필요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제물이 되시어 완전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가 이루어 놓으신 의는 믿음의 사람 에게만 유효한 것이다.
3. 불타는 심정
오늘 본문 1절에서 바울은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라 말한다.
이스라엘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미국 기독교인들의 모임에 한 유대인 지도자가 연사로 초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연설에서 “기독교가 이 땅에 존재하고 있어 우리가 안전 합니다”라고 선언해 박수 갈채를 받았다고 한다. 그 말은 기독교가 반유대 적이며, 세계 대전 동안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의 죽음에 대한 죄는 기독교가 책임이 있다는 비난에 대하여 반박하는 반가운 말이었다.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 들은 동포 유대인들을 깊이 사랑한 바울 사도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믿었던 것처럼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모든 나라의 구주시며 약속된 메시아라는 것을 깨달아 알기를 간절히 원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만약 자신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음으로써 유대인이 구원받고 축복을 받는다면 기꺼이 그 저주 까지도 감수 하겠다고 한다.
그들은 구약의 훌륭한 유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역과 반역의 길을 갔듯, 우리 민족 역시 그러한 어리석음을 재현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 또 분단의 아픔을 이겨내고 복음으로 민족 통일을 앞당기며 정의가 바로 서는 일에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며 복음전하는 일에 힘쓰는 우리 민족이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