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같지 않은 삶의 여정
얼마전 구한말 의병 조직의 태동과 확산을 그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으로 항일 무장투쟁사가 재조명되었다, 드라마를 보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말을 타고 만주벌판을 달리며 총을 쏘는 선구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멋있다.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독립된 나라의 꿈을 오늘 우리는 맛보고 있다. 이 드라마는 위기의 나라를 구하러 나선 민초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재소환하여 의병 활약과 선교사들의 역할을 본격 다루며 개화기 주체적 여성의 모습과 함께 친일·매국 문제를 오롯이 새겨 젊은 시청자에 강한 역사의식을 심어주었다.
드라마는 드라마였다. 이 독립운동가들의 삶은 드라마 ‘미스터션샤인’이나 영화 ‘밀정’처럼 결코 멋진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핍박에 맞서 쫓겨 다니면서 한시도 편히 잠들 수 없는 상황과 풀뿌리를 캐먹으며 굶주림과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사람들의 냉대를 받으며 36년 이상을 버텨야 하는 고난에 찬 삶의 여정이었다.
항일의병운동의 시작
19세기 일제는 대한제국의 개항을 강요하고 불평등 조약을 통하여 우리나라를 침략하였다. 그분만 아니라 우리의 자원과 식량을 실어 날랐다. 이런 경제수탈만이 아닌 정치 군사적 식민지화는 더 노골화되어 갔으며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에도 우리는 구경꾼이 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동학농민군은 항일전선의 첫 출발이라는 점에서 분명 ‘항일의병운동’의 시초라 할 수 있다.
1895년 일제는 낭인들의 손에 칼을 들려 궁중을 침입하게 하고 명성황후를 죽이고 시체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꼭두각시 정권의 하수인들을 통하여 상투를 자르게 하고 단발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자 유림이 중심이 되어 의병들이 확산되었지만 유림이외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그 이유는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평민들의 피해가 워낙 컸고 이들은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어 힘의 결집을 가져오지 못하였던 탓이다.
1095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외교권까지 박탈하고 이어 군사·경찰권까지 앗아갔다. 대한제국은 이름뿐인 껍데기가 되었다. 쌀같은 식량은 빼앗아가고 대신 기계로 짠 옥양목을 수입케하므로 농민경제는 식민지구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하여 다시 전국적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의병들은 예전과 달리 유림을 비롯하여 벼슬아치, 농민지도자, 포스 등 다양한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다. 이때부터 의병들은 단지전이 아닌 지구전을 벌였다. 도시에 출몰하기도 하였지만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유격전에 들어갔다. 하지만 일제의 대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의병들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중심지로 삼아 활동을 다양화 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무기와 식량부족과 일제의 강력한 화력과 포위작전에 버티거나 더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의병들은 전국적으로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한때 남한산성에 모여 서울 침공 작전을 시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 그러면서 수많은 의병들은 문경세재와 지리산 골짜기에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고, 임진강과 낙동강 물에 시체가 내던져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나 둘씩 의병부대가 해체되거나 이동하면서 일부는 의병운동의 기지를 만주일대로 옮겨가기도 하였다.
1907년 8월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가장 극렬한 저항운동이 일어난 곳이 강화였다. 강제 해산 당한 이곳의 구 대한제국의 진위대가 일본군과 조직적인 저항을 벌였던 것이다. 이곳 의병운동을 지휘한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은 과거 이동휘 장군 휘하에 있던 장교들이었다. 강화읍 잠두교회 교인이었던 김동수와 그의 동생 김영구, 그리고 사촌인 김남수 등 삼형제가 일진회원의 지목을 받아 체포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경기도 이천 지역에서도 민심이 술렁대기 시작하자 일본군 헌병대가 즉각 진주하였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덕뜰교회와 24개 예배처소를 돌보는 구연영 전도사와 그 아들 전도사 구정서를 체포 주민들이 보는 소시장 미루나무에 묶고 공개 총살하였다. 1907년 8월 24일 구연영 44세, 아들 구정서 25세였다. 성직자로 첫 순국자가 나오는 순간이었다.
또 안중근의사는 27세에 자기 재산을 모두 털어 진남포에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으로서 신교육 구국운동을 전개하는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이었으며, 스스로 의병부대를 편성하여 항일 의병전쟁을 감행한 의병대장이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대신과 만주 분할지배를 협의하려고 1909년 10월 만주를 방문하게 되자, 자기의 활동 지역에 들어온 적 수괴에 대한 의병 작전의 일환으로 이토를 처단하였다.
이런 민족적 수난에서 기독교의 항일운동은 여러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애국계몽운동’과 ‘의병투쟁’이다. 경제적 ‘납세거부운동’과 1907년의 ‘국채보상운동’등만이 아니라, 한글운동, 야학, 농촌계몽, 여성운동 등 합법적인 방법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한 곳이 기독교 교회와 사립학교였다.
당시 교회가 망국의 울분을 달래는 구국기도회 등은 종종 열었으나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한국교회를 보호 유지해야한다는 차원에서 선교사들은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려 했고 ‘정교분리’를 내세움에 따라 무력항쟁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민족과 조국을 재발견한 열사들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십자가 군병'이라는 구국적 신앙으로 결단하고 무장한 소수의 사람들이었다.
독립투사들의 치열한 독립운동의 전개
1910년 8월, ‘병합’으로 대한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조선 총독부가 설치되어 한민족을 통치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완전히 식민지화하였다. 이때부터 독립투사는 그 이전의 의병과 확연히 구분된다.
또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은 "삼천리 금수강산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서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조국에"라는 노래를 부르며 옷고름을 다잡았다. 이렇게 만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독립운동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와 일제의 관청과 군부대를 습격하는 일이었다.
1920년 홍범도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연합 독립군은 두만강 건너 봉오동에서 일본군 수백명을 유인하여 몰살시켰고 이어 백두산 줄기인 청산리와 어랑촌에서 홍범도, 김좌진, 이청천 등의 연합독립군으로 일본군 천 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연출한 청산리전투의 영웅적 활동상을 알고 있다. 이들은 무장활동에 그치지 않고 국내의 인재들을 모아 군인양성의 무관학교를 열고, 탄압을 피해 넘어온 동포들에게 농토를 개간하게 하였고 가르칠 학교를 세워 나운규, 윤동주, 문익환 같은 인물들이 명동학교를 통하여 배출되었다.
이들은 피나는 노력으로 생업을 꾸리고 생업을 결과를 가지고 독립항쟁을 동시에 벌였다.
그러나 일제는 만주의 괴뢰정권과 손잡고 우리 동포와 독립군들을 무수히 죽였다. 남은 독립군들은 산 속에서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싸웠고 나머지는 러시아 땅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부는 중국본토인 북경과 상해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먼저 독립운동의 기지를 만든 이가 신규식, 박은식과 같은 독립투사들이다.
기독교인들의 항일운동이 급진적인 무력항쟁의 모습을 보이는 것은 을사조약 이후부터다. 그러나 교회조직에 매이지 않은 개별적 인물들의 테러활동이었다.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와 정순만 등은 평안도 장사들을 모아 수차례에 걸쳐 을사오적 암살을 기도했고, 평양교인 최재학 이시영은 격문을 뿌리고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강화도에서는 경성에서 독립선언서를 들고 온 연희전문학교 출신 황도문과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갑곶전투’후 의병이 된 유봉진 권사는 ‘길상전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으로 상해 임시정부가 태동하게 된다. 이래서 상해는 우리 독립운동 투사들이 모여 들었다. 임시정부의 요인 외에도 이회영, 신채호, 여운형, 김창숙, 정인보 같은 지사 학자들도 모여들었다. 이때에는 3.1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 자금이 그전보다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몇 년이 못 되어 그 방향성을 가지고 분열이 일어나고 말았다. 임시정부에서 나온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적 독립운동을, 안창호는 하와이 등지에서 시민운동으로 독립심 고취를, 박용만은 미군 사관생도의 양성과 군사교육에 열중하였다.
이때에 의열단이 만주 길림성에서 본부를 옮겨오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테러를 위해 국내에 침투하여 총독부와 경찰서 그리고 농민수탈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가하면 일본으로 진출해 천황이 탄 수레에 폭탄을 던지는 등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이런 흐름에 맞게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군 대장 등 여러 명을 폭살시키므로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소련에서도 많은 지사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를 맡았다가 러시아로 가서 독립자금을 끌여 들였고, 홍범도는 만주에서 다시 망명하여 러시아를 돌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는 3.1운동과 6.10만세사건이 있은 후 일제의 탄압은 간혹했다. 이런 상황을 신채호 선생은 “강도 일본이 헌병 정치, 경찰 정치를 행하여 우리 민족은 조그만 행동도 마음대로 못하고, 언론·출판·집회의 자유가 일체 없어 고통과 울분, 원한이 있어도 벙어리 냉가슴이나 만질 뿐이요, 눈뜬 소경이 되고 말았으며, 자식을 낳으면 일어를 국어라, 일본글을 국문이라 가르치는 노예 양성소(학교)로 보내고,…”라고 하며 ‘조선혁명선언’을 하게 된다.
해외의 항일 독립운동
1930년 신간회를 발족하면서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이 방향성이 달랐다. 또 분열로 단일대오를 형성하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신간회는 체포된 독립투사의 무료변론을 비롯하여 일제의 불법을 고발하고 농민, 노동자의 보호에 나섰다. 이런 와중에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모든 운동단체를 불법화하고 친일단체를 육성시켰다. 이런 탓에 조선 공산당이나 건국동맹과 같은 단체들은 지하운동으로 나갔다. 이러면서 중국쪽도 지지부진하였다. 간도나 북경, 상해도 독립군의 기지가 될 수 없었다. 일제는 용정의 우리 동포마을과 교회를 불태우고 주민을 모조리 죽이기도 하였고 첩자들을 풀어 독립투사들을 검거하였다. 그래서 임시정부도 중경 등지로 옮겨 갔으며 의열단도 남경 등지로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항일 독립운동 투사들은 1940년 9월 17일 총사령에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우리 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한국광복군총사령부(광복군)를 조직하였다.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용대도 1941년에 여기에 통합되었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쌓으면서 2차대전 참전을 준비하였고, 중국 오지인 연안이나 태항산 지구에서 항쟁을 벌였다. 이렇게 끝까지 항쟁을 벌였다. 이들은 겪은 고초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
고난받는 민초들과 함께 항일 독립투사들은 나라 잃은 설움으로 나그네 신세가 되었고 온갖 학대와 수모, 굶는 일, 노상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지내야만 했다. 이뿐만 아니라 헤어진 누더기 옷을 입고 추위에 떨어야만 했고, 체포되면 팔 다리가 부서지는 고문을 겪으면서도 ‘독립 조국’의 꿈을 놓지 않았다. 이회영과 신채호는 이렇게 대련의 감옥에서 옥사하였고, 김창숙은 다리가 부러져 앉은뱅이가 되었다.
이렇게 ‘독립조국’의 꿈을 가진 민중들도 만세만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라가 빚더미에 쌓였을 적에 ‘국채보상운동‘으로 여성들은 금비녀를 뽑아 바쳤고, 상인들도 독립투사들이 군자금을 모으면 몰래 돈을 거두어 주었다. 여기에 지주도, 자본가도, 양반도, 양반도, 백정도 있었다. 독립투사들이 피신하면 목숨을 걸고 숨겨주는 일이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도리가 되었다. 만주와 상해의 동포들도 밭을 갈거나 노동을 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지원하였다.
이렇게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요, 세계대전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런 독립운동이 없었더라면 나라와 민족정신을 유지하고 이어가는 원동력은 잃었을 것이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며 항일운동,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기억해야 할 수많은 민초들, 이름 없는 영웅들, 무명의 의병과 독립투사들의 독립운동을 되새기면서 민족의 정신를 회복하여 그 에너지를 통일의 밑거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