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가치의 전도(顚倒): 세상 가치 기준과 다른 하나님의 가치 기준
참 복의 8가지 선언은 예수의 설교를 듣는 제자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그대로 알려준다. 제자들은 가난하고, 굶주리고, 애통하며, 미움과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눅 6:20-23). 하나님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세상적인 기준은 뒤집힌다. 하나님의 가치 기준은 세상의 가치 기준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산상설교의 역설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로 인하여 박해받고 어려움 속에 있는 자들은 참으로 복된 자들이다. 이들에게 천국의 복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8복의 선언이란 가치의 전도(顚倒)를 말한다.
이 8복은 종말론적 선언으로서 이러한 복이 현실 속에서는 복음을 영접한 개인적 심령 속에서 파편적으로 이루어지나 종말에 가서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로서 보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인 개인에게는 약속되지 않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막연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미래의 약속이 성령 안에서 현재에 다가온다. 예수와 동행한다면 새로운 척도로 살게 되고 미래의 복은 현재로 다가온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에 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 20b-21). 예수의 하나님 나라 약속은 현재의 어려운 고난과 환난을 통과하면서도 고난과 박해를 통과하는 신자의 마음 속에 평안과 희락으로 현재하며, 미래에 인자로서의 예수의 강림 속에서 온전히 실현된다. .천국의 가치 질서는 이 세상의 가치 질서와 다르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목사의 아들인 독일의 철학자요 무신론자인 니체는 반기독교적 선언을 하면서 전통적 가치의 전도(顚倒)를 선언하였다. 그는 낡은 기독교 신을 대체하여 초인(Übermensch)이라는 새 인간의 모습을 제시한다: " '낡은 신은 죽었다'라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마치 새로운 새벽이 동터 오르는 듯이 느낀다." 도래하는 신'은 축제의 희생양 디오니소스(Dionysos)를 의미한다. 니체는 디오니소스를 택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게서 점차 등을 돌렸다. 니체에게는 디오니소스가 새로운 구원의 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전통적 기독교의 가치를 부정하고 차안의 생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가치의 전복(顚覆)(Umwertung)를 주장하였다. 그는 세속화된 기독교가 진정한 삶에의 의지를 약화시키고 현실 인간의 비참과 고통을 피안과 결부됨으로써만 구원된다고 가르쳤다. 그는 산상설교가 가르치는 기독교의 도덕을 노예도덕(Sklavenmoral)이라고 비판하고 초인의 군주도덕(Herrnmoral)을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군주도덕은 삶의 미래와 개방성을 거부한 인간을 신격화하는 현세주의에 입각해 있다. 니체는 십자가에 달리신 자에 대항하여 디오니소스(Dionysos gegen den Gekreuzigten)를 새로운 신으로 대체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서 해체의 길을 열었다.
사도 바울은 그의 전도의 삶에서 이러한 가치 전도(顚倒)의 삶을 경험하였다. 바울 등 사도들은 유대인과 불신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속이고, 무명하고, 죽은 자요, 징계받은 자며, 근심하는 자, 가난한 자요, 아무것도 없는 자로 여김을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은 참되고, 유명한 자이며, 살아 있고,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항상 기뻐하고,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하고, 모든 것을 가진 자로 존귀하게 인정받았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b-10).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과의 내면적 관계로 인하여 외부의 곤경에 예속되지 않고 답답한 일에 낙심하지 않고 박해 속에서 버린 바 되지 않고 쓰러져도 망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8-9). 십자가에 못박힌 자에 대한 신앙과 충성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죽임을 당하기 이르렀고,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지혜롭고, 약하나 강하고 존귀하며, 비천하게 주리고 목마르며 매맞으며 모욕을 당하여 만물의 쓰레기 같이 되었으나 실상은 부유한 자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9-13).
사도 바울은 니체가 말하는 가치의 전도가 이미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신자들의 삶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가 복음 안에서는 미련하고, 세상의 풍요가 복음 안에서는 가난함이 되고, 세상의 영광이 복음 안에서는 수치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신자의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는 세상의 미련이 하나님의 지혜요, 세상의 가난함이 영적 풍요함이요, 세상의 수치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3. 나사렛 예수는 팔 복이 실현된 자들의 원형
팔 복 받을 마음이 온전히 갖추어진 자는 나사롓 예수다. 팔 복 선언은 인간 예수의 내면에 숨겨진 그의 인품의 초상화다. 팔 복을 선언하는 예수의 설교 배후에는 그의 인격, 그의 마음이 있다. 예수는 "...라고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양식으로 유대교가 신앙의 표준이라고 생각해온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가르침을 선언하신다.
이 산상설교는 숨겨진 기독론이다. 빌립소서에 기록된 그리스도 찬가(Christus Hymnus)는 이를 말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그리스도 찬가는 그리스도의 마음이란 그의 신성과 겸허한 낮아지심이라고 다음같이 피력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여기시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어 인간과 같이 되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참 복은 그 분 자신의 신비에서 나타난다. 그 분은 하나님을 내면적으로 인격적으로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사렛 예수는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이 없는 분: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으로 정말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는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지신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9).
그는 마음이 청결한 분이며, 우리를 위하여 핍박받으시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고 애통하셨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세우신 분이시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28). 예수를 모시는 자는 그의 제자가 되고 그 마음 속에 예수의 성품을 지닐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성령을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새 사람이 되게 하시고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세상의 물욕과 정욕을 버리게 하시고 청결하고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하신다.
4. 사 화(四禍) 메시지: 저주 선언
누가는 그의 복음서의 예수 산상설교에서 축복 선언(Blessed are you)에 이어 저주 선언(Woe to you)을 기록하고 있다. 예수는 악한 자들에게 임할 화와 저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는 이 저주 선언을 예레미아 17장과 시편 1편에서 볼 수 있는 형식에서 취하고 있다. 누가는 예수의 산상설교 기록에서 사회적인 곤궁의 적나라한 궁핍을 더욱 강력하게 반영하며 그러한 궁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축복에 대응하는 저주 선언이 보충된다. 이는 완악한 부자들, 불의한 권력자들, 권모술수가들, 윤리적 방종자들 등에 대한 것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사회적으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편애가 특별히 예리하게 선포되며 세상적으로 완악한 부유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 심판의 임박함이 선언되고 있다.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the rich ones)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눅 6:24).
부자와 나사로 비유(눅 16:19-31)에서 예수는 세상적으로 호의호식하며 살았던 부자가 내세에 당할 저주에 당하여 말씀하신다. 관리는 붉은 색의 옷을 입고, 보통 사람은 붉은색 옷을 입지 않는다. 부자는 붉은색 옷에 또 흰색 옷을 입는다. 아주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은 돈이 많고 생활이 부유한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부자는 붉은색 옷에 흰색 옷을 입고 아주 호화로운 삶을 살았다. 단순히 부자라서 지옥가고 가난해서 천국간다는 게 아니라 물질에 대한 주의 경고, 청지기로서의 자각, 재정관리의 법칙, 무엇보다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는 인색함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말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those having been filled)여 너희는 주리리로다"(눅 6:25a).
불의한 권력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수탈하여 배를 채우고 있다. 예언자 이사야는 불의한 권력자의 수탈을 정죄하고 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사 10:1-2). 이들에게 하나님의 벌하시는 날에 멀리서 환난이 다가 올 것이다. 포로되어 가고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서 엎드려 질 것(사 10:3-4)이라고 예언자는 경고하고 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those laughing now)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b).
세상의 열락에 취한 자들은 자기의 책무와 사명을 방기하는 자들이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 세상의 열락에 취한 자들을 다음같이 묘사하고있다: "너희가 기뻐하며 즐거워하여 소를 죽이고 양을 잡아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면서 내일 죽으리니 먹고 마시자 하는도다"(사 22:13). 이들에 대하여 하나님은 "진실로 이 죄악은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사 22:14)라고 심판을 선언하신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눅 6:26).
세상 사람들의 칭찬에 사로 잡힌 자들에게 화(禍)가 있다. 이들은 사회정치적으로는 포퓰리스트들이다. 이들은 진리와 공도(公道)보다는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을 추구한다. 그리하여 사회의 진정한 유익과 진리의 추구보다는 자신들의 인기에 연연한다.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사람들의 인기를 추구한다. 그리하여 이들은 사회적 불법 가운데서도 평화가 세워진다고 거짓을 진실처럼 유포한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질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