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순호 칼럼]내가 겪은 6.25 전쟁

칼럼
美 에버그린한인교회 현순호 목사

6월이 오면 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1950년 7월 9일 평양에 살던 나는 이제 막 세상을 알아가는 앳된 청년이었다. 주일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거리는 너무도 차분하고 조용했다. 남한이 북침을 해서 용감한 인민군이 반격을 했고 인민군은 삼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낙동강까지 내려가 부산 점령도 시간문제라는 거짓 뉴스가 계속 나왔다.

마치 큰 태풍이 불기 전 잠깐 조용하듯, 앞으로 한국 전체를 화염으로 몰고 갈 악마가 숨을 고르고 있는 것을 무식한 나는 알지 못했다. 집 근처에 왔을 때 누군가 나를 부르더니 그 자리에서 신분증을 빼앗았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끌려 갔다. 징병이 된 것이다. 그리고 만 3년이 지난 후에야 꿈에도 그리던 부모님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부모님은 큰 아들인 내가 그렇게 행방불명이 되고 둘째 아들 마저 미군 폭격에 죽자, 1.4후퇴 때 어린 세 딸을 이끌고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와 대전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렀다. 두 분은 얼마나 고생하셨던지 키가 줄고, 허리가 굽어지고 연세도 훨씬 많이 들어 보였다.

나는 나대로 평양역으로 끌려가 창문도 없는 화물차에 던져졌다. 그곳에는 음식도 전기도 변기통도 없었다. 이 열차는 낮에는 폭격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다가 해가 지면 출발해 삼일 후에 강원도 덕원에 도착했다. 군복으로 갈아입고 수류탄 두개를 차고 바닥에 끌리는 긴 총을 메었으니 이제는 인민군 병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낮에는 폭격을 피해 방공호에 들어 가거나 또는 깊은 숲 속에서 군가를 배우고 미 제국주의 자들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밤마다 훈련을 하는 일은 너무도 힘들었다. 어느날 나는 사상이 불순하고 기독교적인 냄새가 진하다는 이유로 소대장에게 끌려 가 총살당할 뻔한 적도 있었다. 첫 눈이 내리는 10월 초 내가 속한 부대가 만주로 후퇴를 하던 날 밤에 한 민가에서 식사를 하는데 몇 방의 총소리가 났다. 나는 장교나 간부들이 모두 도망한 것을 확인하고 바로 지금이 기회다 하며 도망쳐 산에 숨어 있다 국군에 귀순해 포로 신세가 됐다. 그 후 부산을 거쳐 거제도 그리고 논산으로, 지옥 같은 포로 생활이 삼년이나 계속됐다. 더욱 슬픈 일은 그 안에서도 좌익과 우익의 싸움이 밖의 남북 전쟁만큼이나 잔인하고 처참하게 이뤄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휴전이 임박하자 포로들의 의사대로 이북을 가든지 또는 대한민국에 남든지 선택권이 주어 졌을때 나는 부모, 형제, 친구들이 있는 고향을 버리고 신앙의 자유를 찾아 한국을 택했고 얼마 후에는 석방되었다. 그러나 갈 곳이 없는 고아가 된 것이다.

6.25 전쟁은 너무나 희생이 컸다. 남북간의 인명 피해는 수백만명에 이르고 미국을 비롯한 많은 외국의 젊은이들의 피가 한국 땅에 뿌려졌다. 이 뿐만 아니라 전국의 공장들과 크고 작은 건물들, 농토는 정말 폐허가 되고 길에는 절룩거리며 도움을 구하는 상이 군인들, 깡통을 든 고아들이 차고 넘쳤다.

그러나 그 역경에서도 얻은 것이 많이 있었다. 즉 작은 개발국가인 한국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엄청난 피해를 받은 것이 알려져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나아가서 그 기회를 활용해 세계로 나아가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한강의 기적이 이루어졌다.

더욱 가치있는 일은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는 강심장이 된 것이다. 내 가족이 잘될 수만 있다면 도둑질만 아니라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생존의 투사가 된 것이다. 그 오뚝이 정신은 짧은 기간에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그 자녀들은 부모에게서 그 정신을 본받아 세계 만방에서 성공의 신화를 이루어 가고 있다. 나 역시 처절한 전쟁 속에서 살아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 하나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섬기는 삶을 기쁨으로 오늘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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