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칼럼] "갈등을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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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규 목사(대림다문화센터 대표ㅣ대림중국교포교회 담임)

종종 국내나 외국에 나가게 되면 동물원을 찾게 된다. 곰이나 호랑이, 사자나, 늑대 같은 맹수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저렇게 무서운 힘을 가진 놈들이 철창 속에 갇혀 있으니까 망정이지 만일 저런 동물이 밖으로 뛰쳐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무서운 힘을 가졌다고 해도 저 철창 안에 있으면 그 힘을 발휘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저 철창 같은 장애물이 나 에게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도 장애물이 있음을 감지하고 이에 대해 한탄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악을 행하는 도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주의 일을 하려고 할 때 가장 큰 장애물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 자신임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내 속에 두 인격이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겉 사람이고

둘째는 속사람 이라고 했다.

이 겉 사람은 속사람의 반대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대해 세네카는 말하기를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했고 역설의 화신이요 모순 덩어리라고 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서로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 서로 갈등을 일으키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말이다

우선 사람은 선택의 문제로 부터 결혼 문제, 직장문제, 학교문제 등의 선택의 문제에 직면 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한마디로 우리의 삶 자체가 갈등의 연속이다

로마서 본문 6장 15절에서 바울은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않는다”고 갈등을 표출하고 있다.

사람이 갈등을 겪게 되면 마음과 생활이 파괴되고 가정생활 직장생활에 고통을 겪게도 된다. 바울은 본문에서 이 갈등 문제를 이렇게 표현 했다.

“내가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니 곧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여기 ‘내가’라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 하신 주님을 만나고 3층천에 올라갔던 바울 을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바울에게도 선하게 살고 싶은 마음을 자꾸만 깎아먹는 악한 마음이 꿈틀 거리고 있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신비를 누구보다 많이 체험하고 하늘의 경험했던 그에게 이런 갈등이 있었다면 오늘날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나타나는 대인관계에서 갈등을 겪는 사람이 얼마일까?

갈등이 생기면 반드시 치명적인 결과가 나타나는데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

여기에 곤고하다는 말은 ‘달라이 포로스’ 라는 뜻으로 이 말은 마음과 생활이 고달프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피곤하고. 고달프다, 불행하다는 뜻으로 이 말은 사도바울의 자기발견에서 나오는 고백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고백이기도하다. 그리스도인은 빛 되신 그 리스도 앞에서면 반드시 자기를 발견 하게 되어있다.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발견하지 못 했다면 신앙의 자세가 바로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1, 진실한 자기 발견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얼마나 진실한가? 인간이란 누구나 자기를 미화하기에 정신이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를 과시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 거린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진실이 아니며 허영이거나 욕심일 뿐이다.

바울이 신앙적으로 성숙 했을 때 자기의 곤고함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신앙의 성숙에 이르게 되면 자기를 곤고한 사람이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한 자기 발견이다 21절에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라고 했다 죄의 법 아래로 끌려가면서도 반항하는 자기이다. 100전 100패하는 무기력한 자기인데도 죄를 거부하려는 죄의 법대로 살면 편할 것을 기어이 그 법을 탈출 하려는 거룩한 자기 발견이다. 그리스도인의 이런 발견이야 말로 참된 자기 발견이다.

2,행복한 자기 발견이다.

25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로마서 14:23절에는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라고 했고 요한일서 3:4절에는 죄는 "불법" 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법에 어긋난 모든 육신의 일을 총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정도는 어디에 있나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길 되신 주님을 따라야 하고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을 믿고 생명이신 주님에게 붙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갈등의 해결은 무엇인가 25절을 보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 문제를 없애 주셨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갈등을 생기게 하는 죄를 없이해 주셨다는 말이다.

초대 교회의 뛰어난 신학자였던 어거스틴은 (354-430) 금지 된 것에 대해 그 자신이 느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참화록 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우리 집 부근에는 포도원 근처에 많은 배가 열린 배나무가 한 구루 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악동들은 배서리를 하러 나깠다

엄청나게 많은 배를 땄지만 그 배를 먹지도 않고 돼지들에게 던지는데 쓰고 말았다. 금지 된 과일을 맛보는 재미를 느길 정도로 먹은 것이 전부였다.

맛있는 배였지만 내 가엾은 영혼이 그렇게 갈망하던 것은 배가 아니었다. 집에 더 많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순이 도둑이 되어 보고 싶어서 서리를 한 것이었다. 우리 인간들은 어떠한 법이 주어지면 우리는 어길 대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법을 어기는 것을 용서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다. 본문에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 하였음이라”

강원도 원주신림에 살던 최이녀 권사님은 전도하러 찾아온 성도에게 욕을 퍼붓던 할머니였다고 한다.

그러던 분이 예수를 믿고 구부러졌던 팔이 펴지어 건강해 졌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후 일 년을 하루같이 먼 거리 임에도 예배에 참석 하였다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변했을까? 예배드리는 것이 그렇게 즐겁고 말씀 듣는 것을 그 어떤 것보다 더 기다린 것은 말씀의 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맛은 쉽게 없어지지만 말씀의 단맛은 평생토록 남아 우리 영을 살찌우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하고 모든 갈등을 해소시켜준다.

예수를 믿어도 자기중심, 생각을 해도 자기생각이 앞선다.

루이스, 베디즈의 "위임과 돌봄이라는 저서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의 한편에는 잘 웃는 건강한 내가있고 다른 하나는 잘 토라지는 신경증 환자인 나를 본다. 사도 바울은 고백 한다. 하나님의 법을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바울 사도의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는 비탄의 신음 소리가 아니다. 건져주시는 이를 향한 감격의 표현이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 이라면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받는 선물 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도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의 절대적인 은혜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버리고 의와 거룩함을 이루고 갈등을 극복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참 자유를 누리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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