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는 것은 율법이 죄인에게 임할 때에 자기 다죄를 깨닫게 되고 죄를 깨닫게 되니 불가불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고 돌아오니 은혜가 넘쳤다는 것이다
그러면 .은혜가 넘쳤다고 해서 죄를 지어도 될까? 바울은 본문에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죄에 거한다고 하는 것은 죄에 머문다(고전 (16:8) 보존한다. (롬11:23)등의 뜻이 있는데 본문은 죄에 머문다는 의미이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고 살리요? 신앙 신앙생활을 하면서 죄에 저항 하지 않고 그냥 죄 가운데 머문다고 하면 바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죄를 던져버린 사람이며 동시에 다 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은 사나 죽으나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 이어야 한다.
예를 들면 자녀가 부모님의 용서의 의미를 아는 자녀라고하면 부모가 싫어하는 일은 생각지도 못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1절에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라고 반문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겠는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다.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발견 할 수 있다.
첫째 죄에 대해서 죽은 모습이다.
죄에 대해서 죽은 죽었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할 수 없듯이 아무 죄도 범할 수 없는 존재로 변화 되었다는 뜻이다.
이 사을 상징하는 의식이 바로 본문 3절에서 예로 들고 있는 세례이다.
(3-4절)세례는 노아 때는 홍수사건으로 모세 때는 홍해를 통과하는 것으로 구약 때부터 그림자로 정결케 하는 예식이 있었다.
제단과 회막 사이에 물두멍이 있어 결례 예식 때 사용했다 .이것이 세례 요한 때 구체화 되었고 예수님이 친히 받으셨으며 교회가 세상 끝 날까지 지켜야 할 예식이라 했다. 세례의 영적인 뜻은 무엇인가?
죄 씻음의 표이다.
너희가 각각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세례는 죄를 씻는다는 표요 예식이다, 물세례는 껍데기요 성령 세례는 알맹이이나 껍데기 속에 알맹이의 존재가 가능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청산해 주셨다. 그러므로 믿고 죄 사함 받은 자는 이 예식을 받아야 한다.
또한 깨끗함을 보존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중생 했다는 표이다.
중생은 표가 없으나 세례를 받으므로 중생의 표로 삼는다. 중생이란 인간 대표인 첫 아담의 범죄로 죽었던 자가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를 입고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생명은 사망이 침범 할 수 없는 생명이요 온전한 생명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표이다
세례를 받으므로 우리는 한 몸이 되었고 예수님과는 포도나무와 가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요. 이들이 모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 바로 교회이다.
2, 그러면 하나님 된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나? (4절)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듯이 하나님께 대해서는 산자가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성도가 살아가는 방식이다. 결코 죄의 종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종, 종 그럴 수 없나이다. 라고 대답 할 때가 있다. 법이 그렇지 않으니 그럴 수 없다느니 체면상 그럴 수 없다느니 하는 경우이다.
바울은 왜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했나? 주님의 은혜가 너무나 고마 와서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은혜가 어떠해서 그러했나? 롬3: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하나님의 정죄 아래 있으면 결국은 어떻게 되나? 죄의 삵은 사망이라 했으니 영벌을 받을 수밖에 없던 존재들 이었다 죄인은 죄의 종으로 죄에 매여 허덕이다가 결국에는 지옥 불에 던져 질 수 밖에 없는 가련한 인생이다.
우리도 다 그런 처지에 있던 자들 이었다.
이런 자들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이 되었다.
아무런 공로가 없이 거져 무죄 선언을 받은 것이다. 의로 여김을 받았으니 영벌을 면제 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올리버 삭스는 그의 저서 ‘화성의 인류학자’ 에서 버질 이라는 한 남자에 대해서 이야기 한 다. 어릴 때 실명을 한 그는 수년이 지나 수술을 받고 시력을 회복 하게 된다.
그러나 베데스다 연 못 밖에서 예수님으로 부터 치료 받았던 장님처럼 (막 8:22)그는 처음에는 보는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얼마 동안은 그의 행동은 그가 장님 이었을 때와 같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볼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장님으로 서의 나는 죽어야 한다.
새사람으로 다시 태나야 한다.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전의 장님으로서의 나는 죽어야 한다.
그 말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서는 구습과 행실곧 나 자신을 장사 지내야 한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이다.
깊이 배어든 과거의 습관과 태도는 잊어버리자. 말라서 나무 가지에 달려있는 가을 낙엽처 럼 될 것이다.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제는 죄가 더 이상 우리의 주인 아니다.
이렇게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거절해야 한다.
3, 의, 의 도구로 살자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디에 쓰느냐? 에 따라서 그가 차이가 드러난다.
값이 비싸고 좋은 아무리 물건이라도 나쁜데 사용하면 없는 것만 못한 경우가 있다.
사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기에 그와 연합하여 하나님의 쓰시는 도구가 되어야 하고 항상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몸은 부모님을 통하여 세상에 태어난 하나님의 선물이며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 하신 귀중품이 되었다.
곧 죄와는 멀어지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야 할 존재들이 되었다.
(4절)여기서 새로운 피조물 그리고 새사람 (newman)이라 함은 하나님께서 영광의 능력으로 죽어 장사 된 가운데서 살려주신 그야말로 생명의 새로움을 일컫는 말이다. 고후 5:17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했다. 새 생명은 중생한 생명을 말하는 데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입었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하셨다.
이제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가 살리심을 받아 (엡 2:1)생명의 새로움을 체험 하 였다.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요5:24) 마치 씨가 있다하자. 그 씨 그대로 있으면 천년만년이 되어도 그대로이다.
그러나 땅 속에 묻히면 그 땅에서 생명이 솟아 나온다. 이와 같이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씨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믿는 즉시 우리 속에 들어온다. 이것을 성경은 새로운 피조 물이라 또는 중생 새사람 이라한다.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씨가 들어와서 우리의 생명을 새롭게 하였다. 이는 돌 감 람 나무가 참 감람나무에 접붙이면 참 감람나무가 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줄을 믿나니 나무의 생사는 가지의 생사와 같다. 부활의 생명은 구원의 생명이요 (요한 3:16)그 부활의 생명은 죽지 아 니 하는 영생의 생명 (요11:25)(롬 6:4)으로 주와 함께 죽으면 부활에서 주와 함께 사는 생명이다 .
즉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진 것이다. 요한 5:28-29“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 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롬 6:4)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라라.
이것은 미래에 부활을 의미 한다 (롬 6:11)너희 자신이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 지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는 함께 죽고 함께 살아서 영원히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 요11장에는 죽은 나사로의 얘기가 나온다.
오빠의 죽음으로 울고 있는 두 자매가 예수님을 뵙는 순간 예수님 조금만 빨리 오셨더라면 오빠의 죽음은 오지 않았을 텐데 조금 원망스러운 어투로 예수님께 항의를 한다
그때에 예수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이 말은 인간 에게는 끝난 것이나 나의 생각을 묶어 놓는 것 내 마음을 노예처럼 만드는 것 나의 자유를 빼앗는 것 십자가에 못 박고 감사하며 살 수 있는 나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