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공식수도로 인정하며 텔아비브에 있는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길 것이라고 말해 국제사회의 공분을 사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하면 국제사회가 벌떼같이 달려들어 반대할 것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는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트럼프가 국내에서 유대인들의 입김으로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려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니면 아무도 이 문제를 정리할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동수도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국제사회나 유엔에서 공인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수도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랍은 22개 국가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랍과의 공동수도라는 개념도 어불성설이다. 이는 싱가포르 국민의 74%가 중국계 사람들임으로 싱가포르를 중국과 싱가포르의 공동수도로 정하자는 말과 같은 괴담 수준의 생각이다.
사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문제는 어느 편의 입장에서 말하느냐에 따라서 극과 극의 입장 차가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하여 이렇게 생각한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 아랍 원주민들이 고대로부터 평화롭게 대대손손이 살고 있었는데, 수천 년 동안 나라를 잃고 유리방황하던 유대인들이 갑자기 몰려 들어와서 여기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우리 땅이라고 하면서 그들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중동의 갈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대충만 살펴보더라도 사실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팔레스타인 난민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정확한 인식이 없으면 중동 문제에 대한 시각은 왜곡될 수밖에 없다.
중동의 아랍 방송들은 수시로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설교를 방영하는가 하면 유치원 어린 학생들에게 까지 유대인을 죽이거나 그들과 싸우다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도록(꾸란9:111) 교육하고 있다. 아흐마디 네젓 전 이란 대통령은 "중동 및 세계 평화를 위해서 유대인들을 제거하고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라고 말했다. 아랍인이나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설교나 강연을 너무 자주 들어서 별로 새롭지도 않은 내용이다. 심지어 한 중동국가의 수도에는 이스라엘의 멸망일을 지정하여 매일 하루씩 줄어드는 대형 전광판까지 만들어 놓았다.
서로의 견해차이를 주장하는 것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스컴과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Fact)이 중요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기구와 국제 연합 팔레스타인 난민 구호 사업 기구(UNRWA)에서 말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정의'를 보면 "그 지역을 평소의 거주지로 하는 주민으로서 1948년 전쟁 직전 2년간 그곳에 거주하였던 자, 그리고 그 자손들"이라고 명기하고 있다. 즉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고대로부터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거기서 2년 정도 살다가 떠난 아랍인들과 그 자녀들을 난민으로 인정하고 지원해 주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실 성경의 블레셋 족속은 주전600년경에 역사에서 사라졌으며(렘47:1-7) 그 땅은 주민이 거의 없어서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던 버려진 황무지였다. 지금의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1880년부터 1914년까지 통계에 의하면 약 71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그 중 53개 마을은 오직 유대인들만 사는 마을이었고 아랍인들만 사는 마을이 9개, 유대인과 아랍인들이 섞여 사는 마을이 8개였다. 이 유대인들은 고대로부터 정착하여 그 곳을 떠나지 않고 지켜온 그 땅의 원주민들이었다.
1880년대에 러시아에서 시작된 유대인들에 대한 포그롬(조직적인 폭력)은 유럽으로 번져갔고 이에 안전한 피난처가 필요했던 유대인들은 데오도르 헤르첼(Theodor Herzl)에 의해서 조직화된 시오니즘 운동에 의해서 옛 이스라엘 땅으로 이주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유대인들은 그 땅에 와서 대부분 해외에 살고 있는 명목상의 주인들을 찾아가 비싼 값을 치르고 그 황무지들을 매입했다. 1900년대 초부터 부지런한 유대인들은 그 곳을 개간하여 키부츠라는 공동농장을 이루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고 그 땅이 비옥해지자 이에 주변국에서 아랍인들이 일자리를 찾아 그곳에 와서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핍박이 심해지자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땅이 필요했던 유대인들은 1917년 당시 영국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밸푸어에게 요청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국가 건설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밸푸어 선언이다. 그런데 이는 오스만 터키와의 전쟁 후 터키가 지배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의 국가를 세우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맥마흔(당시 영국의 이집트 주재 고등 판무관)선언(1915)과는 상충되는 내용이었다.
한편 영국이 1917년에 밸푸어 선언을 통해서 유대인들의 독립국가로 보장했던 팔레스타인은 현재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요단강 서편뿐만 아니라 요단강 동편에 있는 지금의 요르단 전체 땅을 포함한 지역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밸푸어 선언은 파리 평화회의(1919)에서도 재차 확인 되었는데 이는 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인 미국 영국 프랑스가 주축이 되어 "전쟁에 대한 책임, 영토 조정, 전후 평화 유지를 위한 조치" 문제로 모였던 회의였다.
그 결과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에 영국 정부에 의해 임명된 무프티(이슬람 고위 성직자) 하즈 아민 알 후세이니는 아랍인들을 선동하여 유대인 공동체에 포그롬(pogrom:조직적 폭력)을 행할 것과 페다인(Fedayeen:살인부대)을 풀어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하여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지배를 절대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심을 전 세계에 알리도록 하였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의 과격한 폭동에 놀란 영국은 아랍인들을 달래기 위해서 1922년 요단강 동편은 아랍인들의 거주지로 주고 요단강 서편은 유대인들의 거주지로 분리할 것을 선언했다.
그러나 급히 안전하게 정착할 국제적으로 공인된 땅이 필요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권리로 인정된 땅의 77%를 떼어주더라도 이를 수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아랍인들은 23%도 이스라엘에게 주어서는 안 된다며 이를 거부하고 유대인들의 독립을 끈질기게 방해하였다. 2차 대전 중 무프티 후세이니는 독일의 히틀러를 만나 유대인 핍박에 대한 동의와 협조를 구하였고 아랍 국가들이 이에 합세하였다. 그는 또 그 때 팔레스타인 통치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의 처칠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금하도록 협조를 구하였다. 나치와 유럽의 핍박을 피하여 팔레스타인에 이주하려던 유대인들은 입국이 허용되지 않아 그대로 유럽에 머물 수밖에 없어 나치의 제물이 되었으며, 팔레스타인에 입항하려던 약 7만명의 유대인들은 영국인들의 총에 맞아 숨지거나 강제 송환 당하거나 사이프러스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결국 히틀러의 명에 의해 유럽에 거주하던 약 900만의 유대인들 중 약600만 명이 학살당했던 참사는 다시는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될 인류 최악의 역사적 사실이다.
유대인들은 이유 없는 핍박을 당하며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이후 영국에는 1945년 유대인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클레멘트 애틀리가 수상이 되면서 유대인들의 도시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무기를 휴대한 것이 적발되면 사형에 처하였고 유대인저항군 지도자들은 체포 수감 후 공개처형 하는가 하면 아랍인들의 폭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취임 1년 만인 1946년에 트랜스요르단 지역을 넘겨주어 요르단이 국가로 탄생되었다. 그래도 아랍인들은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폭동을 일으키자 영국은 이 문제를 유엔으로 넘겼다.
1947년 11월29일 유엔총회에서 아랍지역과 유대인 지역을 분리해서 독립시키자는 안건이 찬성33표 반대13표로 가결되었다. 그 내용은 요단 서편에 유대인 지역을 주되 그 중에서 가자(Gaza)지역과 요르단 서안(West bank) 지역을 떼어서 아랍인 지역으로 주자는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이것마저 수용했으나 이미 영국으로부터 아랍인들을 위한 국가로 요르단의 독립을 승인 받았던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독립은 인정할 수 없다며 즉각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 주재 영국 위임 통치 정부의 협조를 받아 팔레스타인 아랍 고위 위원회, 아랍 연맹이 힘을 합하여 폭력 시위를 감행했고 유대인들은 이에 맞서 싸웠다. 유엔의 강대국들은 군사행동에 관한 결정을 한 일이 없어서 개입을 망설이는 동안 유대인들은 일방적으로 맹공격을 당했으며 전쟁을 위해서 해외에 있던 유대인들의 도움이 필요했으나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그들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아랍인들뿐만 아니라 이들을 돕고 있는 영국인들과도 싸워야 했다.
이 전쟁은 일방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었지만 유대인들은 목숨을 걸고 48년 4월까지 계속 싸우면서 결국 아랍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독립 선언한 바로 그 다음 날 아랍 5개국 연합군(이집트,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요르단)은 "순식간에 끝내버리는 대량학살"을 선언하며 이스라엘을 총공격 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예상을 뒤엎고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었다. 결국 이라크를 제외한 아랍 국가들은 1949년 휴전협정에 서명하였으며 이스라엘의 독립은 1949년 5월 11일 59개국이 모였던 유엔 총회에서 승인되었다.
이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은 페다인이라는 테러부대를 통해서 이스라엘 접경 도시 공격을 지시하여 1949-56년 동안 13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는 러시아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고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요르단 및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석유 공급로인 티란 해협을 봉쇄하고 1956년 대대적인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이집트를 선제 공격하여 3천명의 이집트 군인을 사살하고 6천명의 전쟁포로를 획득하면서 전쟁은 이스라엘의 대승으로 끝났다.
그 후 1965-66년 이스라엘이 사막을 개간하여 농지로 변환하는 과정에서 요단강 물을 지나치게 많이 사용한다는 이유로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농장 키부츠 마을에 총격을 가하였다. 이스라엘은 즉각 복수하여 시리아의 전투기 6대를 격추시켰다. 그러나 시리아는 포기하지 않고 이집트의 나세르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이집트는 시나이 사막에 대군을 파견하면서 유엔 주둔군들을 철수하라고 했으며 이라크와 동맹을 맺었다. 나세르 대통령은 67년5월15일 유대인들의 인종청소를 외치며 전쟁을 준비했다. 2차 중동전에서 패배한 중동의 맹주 이집트가 10년 동안 준비해 왔던 전쟁이기에 승리는 확정적인 것처럼 보였고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비교할 수 없이 약했다. 그러나 6월5일 이스라엘은 그들의 공격을 기다리지 않았고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유대인들의 전투기들을 출격시켜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던 이집트 전투기 300대를 모두 폭파시켰고 요르단과 시리아 국경에서 근접한 이라크의 공군 기지들을 폭파하였다. 그 결과 아랍 연합군은 1만8천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5600명이 전쟁포로가 되었고 세 나라 연합군 장비의 70%가 파괴되었다.(이스라엘군 776명 사망 2600명 부상) 그 결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 웨스트뱅크, 가자지구, 골란 고원을 얻었는데 이는 유엔에서 인정한 이스라엘의 영토의 3배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6일 전쟁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1948년과 1967년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랍 지도자들이 방송을 통해서 아랍군대가 유대인들을 무차별 공격하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아랍인들은 그 땅을 떠나 도피하라고 적극 권고했다는 점이다. 그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을 무차별 공격하여 몰살시키고 나면 다시 들어와 살아도 되니 임시로 피해 있으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함께 일하던 아랍인들에게 계속 머물면 유대인들과 똑같이 대우하며 많은 혜택을 주겠다고 설득했지만 많은 아랍인들은 전쟁이 두려워 그 땅을 떠나는 쪽을 택했다. 이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팔레스타인 난민의 대부분은 유대인 군인들을 보지도 못하고 그 땅을 떠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의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 때 떠나지 않고 그 땅에 남아있던 아랍인들은 지금까지도 이스라엘 땅에서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인구의 20.7%를 차지하고 있는 160만 명이 넘는 아랍인들이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서 이스라엘 국적을 받아 아무런 제재 없이 평화롭게 공존하고있다.
또한 아랍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 역시 아랍을 떠나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갔다. 중요한 것은 1948년 전쟁 때 팔레스타인을 떠났던 53만 명의 아랍인들과 1967년 전쟁 때 그 땅을 떠났던 18만 명의 아랍인들보다 아랍지역에서 강제 추방된 유대인들의 숫자가 82만 명으로 더 많다는 점이다. 아랍지역에 살던 유대인들은 대부분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빈손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으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들을 영접하고 정착을 도와주었고 이들은 아랍국가에 손해배상이나 보상청구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랍국들은 팔레스타인을 떠난 아랍인들을 받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아랍 고위공동체(Arab Higher Committee)는 팔레스타인 부근의 아랍 국가들의 국경을 봉쇄하고 그들의 입국을 저지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도 귀환할 수 없었다. 이를 허용하면 과격 무슬림들이 섞여 들어가 치안유지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난민이 된 것이다. 이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이라고 불린다.
이스라엘은 이들의 동결된 은행계좌를 열어주고 잃어버린 부동산에 대해서는 이미 보상금을 지불했다. 그러나 아랍 세계는 탈취했던 유대인들의 재산에 대해서 한 푼도 보상하지 않았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동정을 얻기 위하여 어린이들과 민간인들을 인간방패로 사용하는 테러를 자행하기도 하며 매스컴을 통해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사실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요르단이라는 이름으로 이미 독립했으며 이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의 독립이나 영토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멸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영토문제라면 넓은 땅을 가지고 있는 22개 아랍국에서 얼마든지 이들의 정착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난민들의 복지 문제라면 넘쳐나는 오일달러의 극히 일부만 투자해도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절대로 돕지 않는다. 그들의 희생을 통해서 국제사회가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심을 품도록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자기 자녀들에게 유대인들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싸우라고 부추기며 이스라엘과 싸우다 죽는 것은 순교이며 이는 무슬림으로서 최대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아랍인들이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근본적 이유는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를 독립한 것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하디스에 7세기부터 이미 유대인들을 저주하라고 명하고 있기 때문이라(꾸란98:6, 꾸란5:51)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위 글은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4him.or.kr)에서 가져온 글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