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은 대부분이 겉을 보면 그 가치를 알 수 있다.
그런데 겉을 보아서는 알 수 없는 과일이 있다. 바로 수박이다. 수박은 냄새도 없고 색깔로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과일과 달리 두드려 보아야 알 수 있다.
그러나 두들겨서는 익은 것을 알 수 없거니와 더욱 속이 상하였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그래서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칼로 베어 내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도 마찬 가지이다. 정말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오늘 성경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사도바울은 2장에서 유대인 이라고 자랑하며 표면적인 것에 치중하면서 이면적인 의미들을 무시하는 유대인 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이 자랑하는 유대인 아라는 특권의식과 하나님이 그들만의 하나님이라는 자부심 그리고 할례를 받았다는 것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질타하고 있다.
그렇다면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다. (1-2절)
이방인들이 아직 캄캄한 우상 숭배에 젖어 있을 때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택하시어 저들에게 전 인류의 구원 계획을 계시하셨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다.
즉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신다는 약속이다. 여기에 유대민족의 역사적 사명이 있었음을 잊은 채
그들은 그러한 약속을 저버리고 마치 자기들의 받은 축복이 자기들 스로에게 나온 줄로 착각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대해 주님은 말씀 하신다.
“너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9)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으로 만족 할 수 있겠느냐? 바울은 반문한다.
2, 선민의식 이다.
많은 민족 중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민족이다. 이 세상에서 선택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이다. 선택을 받는다는 것은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어서 남달리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력만으로도 부족하다.
그래서 선택은 은혜라고 한다. 마찬 가지로 우리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그러면 택함 받은 것으로 다인가? 4절에는 ‘그럴 수 없나니라’고 반문 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 하였느니라(딤전 1:19).
믿는 자가 믿음에서 떠나고 양심을 저 버리면 비록 택함을 입었을지라도 징계 받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대인들이 특별한 지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바울의 견해는 특권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특권을 누리게 함이 아니라 특별한 임무를 주기 위함 이었다.
하나님은 말씀 하신다.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특별한 백성이다. 그러나 맡은 자들에게 사명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당부 하신다.
그들을 통하여 이방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유대인을 이방의 빛과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이방인들에 대한 책임을 진 자들이다. 우리로 하여금 믿지 않는 자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 얻게 하려는 것임을 잊지 말자. 그러기에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를 보여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거울이라 하였다. 에베소서 5: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 행하라고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너무도 사랑 하신 나머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시고 이 땅에 까지 내려오신 것이다. 그 큰 사랑을 우리도 행해야 한다고 당부 하신다
3, 신령한 이스라엘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8) 약속을 받은 유대인이 그 종교적 우월감과 민족적 교만에 빠져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왔으나 그를 배역함으로써 이방인이 메시야를 받아들인 신령한 이스라엘 즉 신령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존하게 하게 된 것이다.
“참 빛 세상에 비취는 빛이 있어나니 그가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 하였고 자기 땅에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니(요1:9-10) 그를 영접하는 자가 있었으니 곧 그들은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 이는 혈통으로나 사람의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들 이니라.(요1:13)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하나님의 교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그래서 교회를 영적 이스라엘 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교회는 오늘날 하나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전달하는 중대한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결코 종교적 우월감이나 교만함을 본받지 말고 그 말씀을 전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지 못하거나 등한히 하면 육적인 이스라엘처럼 버림받기 십상일 것이다.
본문 4절을 '사람은 거짓되되 하나님은 참 되시다 할 지어다‘ 했다.
사람들의 사랑은 거짓 될 수 있다. 겉으로만 사랑 할 수 있다. 죄로 인하여 부패하여 졌기 때문이다.
탈무드에 보면 공인 된 거짓말이 있다. 이미 물건을 산 물건에 대하여 좋다. 하는 것과 결혼한 부부에게 미워도 미인이라고 하는 것이라 했다. 사실 그렇다. 이미 아내나 남편이 물건을 사왔으면 좋은 것 사 왔다고 할 수 있어야 하고 이미 결혼 하였다면 미워도 미인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거짓말도 못하기에 가정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면 우리가 진실해서 그럴까? 처세술이 능하지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
사람은 행동도 거지되고 생활도 거짓되다. 남이 보지 않으면 눈가림 하고 불법을 행하며 견본과 실물 제품이 다르다고 한다. 이렇게 사람은 거짓되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은 참 디시다 (4절) 인간이 신실함을 자랑 한다고 해도 항상 상대적이며 변할 수 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의 원수가 되기도 하고 정치판에서 보는 대로 어제의 절친한 친구가 오늘 반대편에서 원수처럼 다 투기도 하는 것을 보는데 법정에서는 형제간에도 설전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절대 적이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 하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I-center에서 god-centered)로 바뀌는 것이다.
나는 거짓되지만 하나님만이 참 되시다.고 고백하는 것 이어야 한다. 때로는 힘들고 실패하여 이런 원망 저런 원망을 많이 하였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하나님만이 신실하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거짓되다. 그래서 자기의 생각이나 기준으로 남을 판단 하지말자.
빌립보서 2장13절에서 결론을 맺으려 한다. 너희 안에 거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무슨 일이든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람은 거짓되다. 하나님은 신실 하시다고 고백 하는 자가 되자 우리의 삶을 여기까지 인도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보다 큰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얻기를 바란다.
소리 내어 “하나님은 신실 하십니다“고 외쳐보자.
나는 그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자. 그 신실 하신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실 것을 믿고 그 분에게 나의 길을 맡기고 감사하자. 평강의 주님이 인도해 주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