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한디스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때 나라의 독립 운동을 위해 앞장을 섰던 분이었다.
그는 힌두교인 으로서의 그의 종교의 근본적 변혁을 가져오는 영향을 끼친 자 이었다.
그가 젊을 때에 예수를 믿기로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지역의 한 교회에 참여하여 교인들의 예배에 참여하는 모습과 그들의 생활 모습을 보고 실망에 빠지기도 하였는데 그가 본 기독교인의 모습은 기독교의 모임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속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 같이 보였다고 전해진다.
결국 간디는 ‘그들은 특별히 신앙심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기독교가 힌두교 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로 부터 그는 기독교에 등을 돌리고 말았다.
우리도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다.
우리가 기독교를 버리지 않는 것은 단지 관습 때문이요 사람들과 사귈 수 있는 좋은 장소이기에 교회를 다니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닌지 심각하게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인도의 간디를 실망 시킨 그리스도인이 우리 가운데도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 고백대로 살고 있는가?
사도 바을은 누가 참 유대인인가?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 찌니 (29절) 라고 유대인을 비판 하고 있다. “유대인”:이라는 말은 원래 찬송이라는 뜻이고 “유다”라는 말은 야곱의 12 아들의 12지파 중의 유다지파를 지칭하는 말인데 오늘에 와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면 본문에서 바울이 유대인을 책망한 이유가 무엇일까?
1. 저들은 할레를 받았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 이었다.
그러나 (17-20절)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첫째는 “율법을 의지하며 (17) 이 말은 .율법위에 맘 놓고 푹 쉰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자랑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17).자기에게 율법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든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바울은 율법이 있고 범죄 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을 것 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그 율법이 오히려 자기들을 정죄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들은 율법을 부여받은 백성의 자부심은 있었지만 율법을 지키지는 못했으며 구원의 보증을 받은 것처럼 안심하고 푹 쉬고 있었다는 것이다. (21-24)
가끔 새 신자에게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를 물어 보면 아무개 보고 교회 나오기로 했다는 말을 듣게 된다.
듣기에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모습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본다는 것이다. 인도의 간디가 만일 참 그리스도인을 보았더라면 인도의 선교의 역사는 다르게 쓰여 졌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하였다. 나에게서 그리스도가 비쳐져야 참 그리스도 이라는 말이다. 교인이라고 진정한 교인이라거나 세례를 받았고 직분을 받았다고 교회 공식 예배에 참여하여 교인의 의무를 감당 했고 해도 그에게 그리스도인 다 운 삶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 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십자가로 구속함을 받고 참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2. 책망 받은 이유는 형식주의 교인이기 때문이다(25-29).
유대인 전승에 따르면 할례 받은 사람은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도록 아브라함이 책임을 져준다는 말이 있다.
할례 자체가 ‘의‘(義)의 조건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인 줄로 알았다는 말이다.
즉 할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할례는 형식은 것 모습이고 율법은 내용임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이 없는 형식은 아무것도 아니요 껍데기에 불과 할 뿐이라는 것이다. 바울에 의하면 이에 대해 죄를 범하면서 할례만 주장 한다면 그것은 잘못 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것은 바로 형식에 불과해 유대인이 주장하는 할례는 무 할례와 같다는 것이다.
즉 내용이 없으면 형식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명절에 정부에서 과대 포장을 단속 한다고 한다.
어느 때 보면 포장을 번질 한데 겉을 풀어보면 실망이 되는 경우를 경험한다. 얼마나 실망스런 모습인가?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무릇 표면적 유대 인이 유대인이 아니라고 강변 한다.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표면적 유대인 이라고 했다.
"표면적인 그리스도 인" 이것은 오늘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며 병폐가 아닐 수 없다.
겉은 훌륭한데 내용은 실망스런 신앙은 죽은 물고기와 같다.
살아 있는 물고기는 거센 물살을 헤치고 거슬러 올라가는 가지만 죽은 고 기는 아무리 커도 물에 떠내려간다. 살아 있는 신자는 피나는 노력과 자기 절제와 자아가 깨지는 아픔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은 침노하는 가자 빼앗을 것 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바울은 할례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3.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이면적 유대인이 되려면 마음에 할레를 받아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할례는 칼을 가지고 성기의 끝을 잘라내는 것이기에 고통이 따른다. 그래도 할례를 행해야 참 유대 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우리 몸에 잘못 된 세균이 도사리고 있으면 아프더라도 도려내야 모든 기능이 건강해 질 수 있다.
아프다고 잘라 그냥 두고 있으면 그 부위가 점점 굳어지게 되고 종래에는 죽음을 맞게 된다.
어린이는 유연해서 넘어져도 잘 안 다치는데 어른이 되면 굳어져서 넘어지면 부러지기 쉽다.
결국 그 굳은 마음이 바로 암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 암이 몸 전체를 죽게 만든다.
그래서 주님은 그런 것들이 나타나면 굳은 마음을 제거하라고 하신다.
굳은 마음만 재해 버리면 우리 교회처럼 좋은 교회가 없고 내 남편, 내 아내, 내 부모, 내 자식처럼 좋은 사람이 없다.
참 할례는 무엇일까.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29)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4:54-7)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하나님은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이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내 육은 그대로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율법은 거듭난 성도로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내 삶을 인도해 주는 지도와 같다.
기계를 사면 거기에 메뉴 얼이 있다.
메뉴 얼을 읽고 기계를 사용하면 그 용도를 잘 활용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거듭나서 율법을 보면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아니 뭐 이렇게 하라는 게 많나? 아 무슨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많은가? 불평하던 삶이 성령으로 거듭나면 삶이 즐거워진다.
태산을 넘어 험 곡에 가도 주님과 함께 걸어가면 한 걸음 한 걸음이 즐겁게 걸어가게 된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도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기뻐한다.
'이면적 유대인이란'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져 있는 삶을 말한 말한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기쁘게 하려 함이요 우리 미음을 감찰하시는 이를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살전 2::4) 하였다
누가 사람을 기쁘시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엡 5:6-7)
할례의 근본목적은 육체를 깨끗하게 하는 것만 아니다.
할례는 있어서는 아니 될 혹을 잘라 내는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곧 육적 할례이고 신약의 세례의 의미이다.
교단마다 침례 교인은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장로교에서는 세례를 강조한다.
침례이든, 세례이든 표면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참 이면적 유대인이 되라고 바울은 강조한다.
지식만 가졌다고, 전통만 주장하고 외식을 자랑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것, 이것이 바로 의문에 속한 것이다.
참 할례 받은 사람은 아브라함처럼 사는 것이 참 예수를 믿는 사람이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이참 할례 자이다.
하나님 앞에 나아 올 때 자기 의를 내 세울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내 의를 내려놓고 주님의 의를 힘입을 때 참 할례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요. 이런 자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중심이다.
찬송을 부를 때도 중심으로 기도를 해도, 설교 말씀을 들을 때도, 주의 일을 할 때도 중심으로 할 때 우리는 참 할례 받은 그리스도인이며, 이것이 현대의 할례의 의미가 있음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