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력
교회력은 첫 교회, 곧 신약 교회의 설교(케리그마)의 내용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드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대림절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의 오심을 기리는 성탄절,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리는 현현절,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처형을 기억하는 사순절, 부활하심을 축하하는 부활절, 승천 이후의 성령강림절(28주)로 교회력의 한 해가 마무리됩니다. 그런데 성령강림절이 강림후1주부터 27주간 (성령강림절 포함하면 28주간) 계속되는 것이, 우선 너무 길어 다른 절기들과 균형이 깨어지고,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교회력이 성자와 성령이 중심이 되어 성부의 자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개신교 쪽에서 성령강림 28주를 반으로 나누어 성령강림을 "성령강림후 13주, 혹은 성령강림절 14주로 마감하고, 나머지 14주를 왕국절 혹은 신정절(Kingdomtide) 1-14주로/ 혹은 창조절(Creationtide) 1-13주로 개정하여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과 대속의 역사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교회에 따라 성령강림후 15주로 지키기도 하고, 혹은 왕국절/신정절 2주로, 혹은 창조절 1주로 지키기도 합니다.
오늘 성서일과의 통일된 주제
시편(시45:1-2, 6-9)은 정의로 다스려야 하는 통치자의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은 이제 막 등극한 왕에게 정의로 통치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임금님은 정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니, 그러므로 하나님, 곧 임금님의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주셨습니다. 임금님의 벗들을 제치시고 임금님께 기쁨의 기름을 부어 주셨습니다"(시 45:7). 임금이 정의로 통치해야 할 이유는 "주 하나님의 통치가 정의의 통치"이기 때문입니다(시 45:6).
신명기(신 4:1-2, 6-9)는 준법 의지를 강조하는 백성의 윤리입니다. 모세가 율법을 전달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법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 여러분, 지금 내가 당신들에게 가르쳐 주는 규례와 법도를 귀담아 듣고, 그대로 지키십시오. 그러면 당신들이 살아서 주 당신들 조상의 하나님이 당신들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 곳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2 내가 당신들에게 명령한 말에 한 마디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에게 알려 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의 명령(命令)을 지켜야 합니다"(신 4:1-2)
야고보서(약 1:17-27)는 성도들이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을 곧바로 행해야"[聽道而行道] 하는 성도의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말 삼가기와 분노 조절 등 구체적인 생활 윤리를 강조합니다. "19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 20 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1 그러므로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모두 버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여러분 속에 심어주신 말씀[道]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말씀[道]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능력이 있습니다"(약 1:19-21). 특히 율법에 대해서도 무조건 배격하지 않고, 율법의 의미를 다시 발견할 것을 촉구합니다. "완전한 율법 곧 자유를 주는 율법을 잘 살피고 끊임없이 그대로 사는 사람은, 율법을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가 행한 일에 복을 받을 것입니다"(약 1:25). 율법 이해에 대한 문자주의를 탈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경건"에 관해서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시기에 깨끗하고 흠이 없는 경건은, 고난을 겪고 있는 고아들과 과부들을 돌보아주며, 자기를 지켜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약 1:27)이라고 하여, 마치 이사야가 왕과 백성이 실천해야 할 정의를 말할 때 금식 이미지를 사용한 것을 연상시킵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부당한 결박을 풀어 주는 것, 멍에의 줄을 끌러 주는 것, 압제받는 사람을 놓아 주는 것, 모든 멍에를 꺾어 버리는 것,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니냐? 7 또한 굶주린 사람에게 너의 먹거리를 나누어 주는 것, 떠도는 불쌍한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는 것이 아니겠느냐? 헐벗은 사람을 보았을 때에 그에게 옷을 입혀 주는 것, 너의 골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 58:6-7).
마가복음서(막 7:1-8, 14-15, 21-23)는 살과 피를 사람더러 먹고 마시라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의 윤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선 예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과 모든 유대 사람이 장로들의 전통을 지켜, 규례대로 손을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 "또 시장에서 돌아오면, 몸을 정결하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는 것"(막 7:3-4)을 말씀하시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위의 신명기 1장에서 언급된, 모세가 말하는 율법, 규례와 법도)은 버렸으면서도 "사람의 전통"은 지키고 있다고 지적하십니다(막 7:8). 그러면서 "15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6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15-16)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위생을 고려한 음식 머기 전 손 씻기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을 강조하여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는 위생 못지않게 인간에게서 나오는 악덕을 견제하는 일에는 전혀 무감각한, 악을 견제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장치가 없는 인간의 위선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15 무엇이든지 사람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으로서 그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6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힌다"(막 7:15-16)는 점을 강조하신다. 배설물이 사람을 더럽히지는 않는다고 하십니다. 우리는 배설물 처리를 위해 하수도 시설을 발전시켰고, 변기나 비데 같은 주변기기 같은 화장실 시설을 또한 발전 시켰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배설물을 깨끗하게 처리하고 우리 몸의 배설기관을 깨끗하게 처리하는 일에만 몰두하고, 우리 마음에서 바깥으로 나오는 악덕 처리에 무관심한 것을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다음은 예수께서 열거하신,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생각의 종류들입니다. 음행,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악한 시선(질투), 모독, 교만, 어리석음(막 7:21-22) 등입니다. 이런 악한 것이 모두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고 하십니다.
성경의 악덕목록
예수께서 나열하신 것 말고도 이런 유의 악덕 목록이 몇 곳에서 더 나옵니다. "불의, 악행, 탐욕, 악의, 시기, 살의, 분쟁, 사기, 적의, 수군거림(가십), 중상, 하나님 경멸, 불손, 오만, 자랑, 모략, 부모거역, 우매, 신의 없음, 무정, 무자비". 이것은 로마서 1장 29-31절에 열거된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갈 5:19-21; 딤전 1:9-10; 벧전 4:3; 지혜 14:25-26 등에서도 우사한 것들이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 인간에게 이런 악한 성품이 생긴 것은 자유를 방종으로 오용한 인간의 반역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피조물인 동시에 죄인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동양에서도 기원전 403세기 이래 성선설과 성악설이 학설로 논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성선설(性善說)은 공자(孔子)와 더불어 유가(儒家)의 대표적 사상가인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가 주장한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本性)은 선(善)하다"는 학설이다.[1] 맹자의 성선설의 주된 내용은 사람의 본성(本性)은 본래 선하고, 누구나 측은(惻隱) · 수오(羞惡) · 사양(辭讓) · 시비(是非)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 이 능력들은 수양(修養)을 통해 각각 인(仁) · 의(義) · 예(禮) · 지(智)의 덕(德)으로 발전하게 된다는 것이다."(위키백과)
"성악설(性惡說)은 공자(孔子) · 맹자(孟子)와 더불어 유가(儒家)의 대표적 사상가 중 한 명인 순자(荀子: 기원전 298?~238?)가 주장한 인간의 심성(心性)에 대한 학설로, "인간의 본성(本性)은 악(惡)하다"는 학설이다.[1] 순자의 성악설은 ... 사람의 본성은 악하여, 날 때부터 이익을 구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의를 배우고 정신을 수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위키백과)
"인간은 본래 악하다"라는 주장과 "인간은 본래 선하다"라고 상반된 주장이 있었고 두 주장이 다 인간 발전을 위한 장치로사 수양과 수련을 포함한 예의교육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악덕 목록을 다 합치면 대략 30여 가지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음행 곧 부도덕한 일을 범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을 할 수 있습니다. 살인을 범할 수 있습니다. 간음을 범할 수 있고, 탐욕을 부릴 수 있습니다. 온갖 악한 음모와 악의를 품을 수가 있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기를 칠 수도 있습니다. 방탕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악한 시선, 곧 질투의 감정을 품을 수도 있고, 명예훼손이나 모독이 포함된 중상모략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교만할 수도 있고, 어리석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온갖 종류의 불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누군가를 샘을 내서 미워하는 시기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거짓으로 꾸며서 남을 헐뜯어 없는 죄를 있는 것처럼 꾸며서 고해바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혹은 하나님에게 미움을 받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모를 학대하거나 부모의 뜻을 거역하는 자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약속을 어기는 배약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무정한 사람, 무자비한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자가 될 수도 있고, 마법사가 될 수도 있고, 원수 맺는 삶을 살 수도 있고, 분을 내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분열하고, 분파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술취할 수도 있고, 호모섹스를 할 수도 있습니다. 유괴범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 악덕의 예를 들면서 모든 경우에 가정법을 써서 "-할 수도 있다"는 표현을 썼습니다만, 어떤 것은 우리는 이미 "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할 것입니다.
성령강림후 여러 주간을 보내면서 [2018년 5월 20일 성령강림절 이후 성령강림후 1주부터 11월 25일까지 27주간을 보내는 중입니다.] 8월 한 달 동안 인간의 악행과 그것을 억제할 성령의 능력과, 인간을 치유하고 지키는 말씀의 신비에 대해서 성서일과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금년 8월 네 번의 주일 예배에서 두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깨우친 바가 있었기에 그러한 개인적 체험을 고백하는 것과 그 설교자들의 실명을 언급하고 싶은 저의 뜻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인문학이 말하는 악덕의 극복
하나는, 설교를 맡았던 이상환(李相煥) 권사의 "의견"입니다. 인간의 죄 곧 악덕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신학적 노력을 관찰한 설교자는 신학이 말하는 그러한 유사한 주제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과 생명과학에서도 벌써부터 논의되고 있었음을 소개하였습니다. 저는 우리의 문제에 대한 신학과 과학, 신학과 사회학 사이의 학제간(interdisciplinary) 대화가 늘 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성도들에게도 이미 상투어가 된 교회의 언어, 신학적 용어, 성경본문 인용보다 우리 문제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이 소통을 더 잘 하게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말씀의 신비, 선한 힘"이라는 그의 설교 제목이 인간의 악덕을 통제하는 능력으로서의 "말씀"을 전제하고 있고, 본회퍼의 '옥중서신' 마지막에 나오는 시 "선한 능력에 감싸여"에 나오는, 사람을 선도하는 선한 능력을 본회퍼와 함께 긍정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악을 이기는 선의 능력을 우리에게 설득시키려고 일반 지성세계의 의견들을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토마스 할리크,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 자캐오에게 말을 건네다'(분도출판사, 2018)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신비'이며, 신비에 대한 인내와 개방적인 자세, 사랑으로 신비의 단편을 알 수 있다는 대목을 인용하여 소개했습니다. 스티븐 핑커,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 인간은 폭력성과 어떻게 싸워 왔는가'(사이언스 북스, 2017). 책 부제 그대로 인간의 폭력성과 싸워온 승리의 역사를 고찰합니다. 여기 폭력성은 인간의 악덕의 다른 말일 수 있습니다. 마이클 셔머, '도덕의 궤적'(The Moral Arc) - 과학과 이성은 어떻게 인류를 진리, 정의, 자유로 이끌었는가
'(바다출판사, 2018). 여기 "도덕"은 "윤리"와 일맥상통합니다. 설교자는 신비의 긍정적 측면에 관해서도 여러 의견을 인용하였습니다. 특히 홍일립(홍석기), '인간 본성의 역사 - 오로지 인간만이 스스로의 본성에 의문을 갖는다' (에피파니, 2017)에서는 결론 부분이 "인간 본성의 정체-성질", "인간 본성의 유무" 등에 대하여 "모른다", "신비"다 라고 주장한 것을 소개하면서 일반 인문학에서도 신비가 긍정적으로 논의되고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강봉균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의 대담 중에서 "기억을 관장하는 뇌 속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서로 만나는 조합은 100조~1000조 개가 될 만큼 무궁무진하다. 과학적 바탕이 없을 때 종교적,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고 나름대로 답을 구했다고 본다. 이제 과학으로 근원적인 문제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과학과 성서의 대화를 추천하고 있습니다. 아인슈타인 아인슈타인도 "신비"를 인류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말한다고,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라고. 이 신비는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라고, 신비라는 감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 더 이상 놀라움과 경외에 놀라 멈춰 설 수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라고, 그런 사람의 눈은 닫혀있는 것이라고, 우리가 현재 알 수 없는 것들이 실제로는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존재한다고 한 아인슈타인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이상은 설교자가 소개한 내용들입니다만, 여기에 제가 만난 저서 하나를 더 보탭니다. 2018년 8월 24일자 <한겨레> 별도섹션 <책과 생각>(1면)은 마이클 토마셀로 지음/ 유강은 옮김, <도덕의 기원>(이데아, 2018) - 영장류 학자가 밝히는 도덕의 탄생과 진화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도덕성은 감탄해야 할 진화의 기적"이라는 평을 합니다. 이상과 같은 연구들은 피조물인 인간이 죄인이 되면서 가지게 된 악덕을 말씀과 율법과 지혜와 복음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새로운 언약 관계, 새로운 계약 관계를 맺는 것으로, 새 피조물이 되면서 극복이 된다는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인간성 회복을 위해 신이 제물이 되어 인간에게 바쳐지는 종교
또 다른 하나는, 역사적 폭염이 계속되던 2018년 8월 19일 주일, 서진한(徐震漢) 목사의 설교 "존재와 당위 사이에서"를 들으면서, 신이 인간에게 자신을 제물로 내놓는 종교는 기독교뿐이 아닌가 하는 설교자의 시각도 놀라웠지만, 그것을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성만찬의 의미를 밝히는 것은 신학적으로도 고도의 관찰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된 신의 살과 피가 그것을 수납하는 피조물에게 악덕목록에 실린 30여 가지 인간의 악한 성품을 억제할 수 있게 하는 선한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성찬의 능력을 감지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에게는 비록 뒤늦기는 했지만 하나의 신학적 도약이었을 뿐만 아니라, 새 언약 시대의 비전이 어떻게 가능한 현실이 될 것인지를 바라볼 수 있는 미래로 열린 창문 같기도 했습니다. 그 감동을 졸시 한 편에 담아 봅니다.
성찬 - 민영진
처음에는
당신이 차리신 식탁에
내가 초대받은 것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당신의 손님이 되어
더욱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과 더불어 신찬(神饌)을 나누니
잔이 넘쳤습니다
어느 날
이 빵을 먹고
이 포도주를 마실 때마다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씀이
들려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성찬(聖餐)이 당신의 추모(追慕)를 겸하는 거라고
기껏 뜻 하나 더 보태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뒤늦게
이것은 내 살이다,
이것은 내 피다 하시며
이 빵을 먹으라고,
이 잔을 비우라고 하실 때
당신이 인간에게 바쳐진 제물(祭物)이란 걸
당신이 인간에게 바쳐진 젯술[祭酒]이란 걸
기독교는
신이 인간에게 제물을 바치는 종교라는 걸
황송하게도 너무나도 늦게 알았습니다
서로 살과 피 내어주며
사랑 베풀어
인간 되어 살자고
영생 누리며 살자고
희생제물 되시면서 까지
인간을 불러 새 언약 맺으시는
고되신 신이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