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면서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신학자요 목회자요 선교사인 동시에 한국 평택대의 전신인 피어선 신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피어선은 탁월한 학자였다. 그는 청교도 배경의 가정에서 자라 일찌감치 헬라어와 라틴어 수사학적 교육을 받고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보수주의적 신학자였다. 그의 주요 서적은 칠십 여권에 이르고 수많은 논문과 팜플렛들이 남아있으며 13,000여 편에 이르는 설교와 강의를 하였다. 당시 세계 제일의 침례교회였던 런던 메트로폴리탄 테버너클교회의 대설교자 찰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목사의 후계자가 된 것은 유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동시에 당대 유명 복음주의자들인 D. L. 무디와 토리(R. Torrey), 딕슨(A. C. Dixon), 허드슨 테일러(H. Taylor), 고든(Gorden), 조지 윌리엄스(G. Williams), 조지 뮬러, 당시 기독 재벌 워너메이커가 모두 그와 밀접히 교제한 인물들이었다. 본 주제와는 조금 다른 문제이기는 하나 필자의 개인적 생각으로는 한국에 대한 피어선의 지극한 사랑으로 볼 때 한국 종로 YMCA 건물 설립 시 워너메이커가 기꺼이 건립비를 보내온 것도 친구인 피어선의 조언이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안명준 박사는 이런 피어선의 성경관을 종교개혁주의자들의 신학에 굳게 선 루터와 칼빈의 전통을 굳게 따르는 학자였다고 논증한다.
아더 피어선은 또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여 기독교를 변증하는 학문이다. 기독교 변증학은 기독교와 기독교 신학을 반기독교적 공격으로부터 수호하는 일이다. 성경적 변증학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에 순종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 우리가 비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를 믿도록 권유할 때 변증학에서 터득한 변증의 방법을 잘 활용하면 도움이 되기 때문에 변증학을 선교학의 한 형태로 이해할 수도 있다. ‘기독교 험증학’(Christian Evidence)은 기독교 변증학에서 이미 그 존재가 변증된 하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하시는 구속의 사역에 대해 그 진리성과 타당성을 변증하는 학문이다. 우리의 경험 속에서 확인되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구속적 사역의 증거들을 거론하는 일을 하는 학문이다. 변증학은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으로 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변증학의 범주 안에 험증학이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신론과 반성경적 파도가 거센 21세기 포스트모던과 과학기술의 시대에,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 일찌기 과학적 변증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뿐 아니라 과학 자체에도 깊은 혜안적 지식과 관심을 가졌으며 탁월한 저술가요 신학자요 열정적 선교사였던 아더 피어선 박사의 변증가로서의 궤적을 추적하므로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 좌표를 점검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2. 피어선의 생애
아더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1837년 3월 6일 뉴욕에서 10남매의 9번째 그리고 4형제 중 막내 아이로 태어났다. 그해는 무디와 존 워너 메이커 그리고 런던의 스펄젼이 태어난 해였다. 같은 해에 태어난 이 네 사람이 미국과 영국의 기독교 역사는 물론, 세계 선교사적 차원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피어선의 출생은 저명한 설교자요, 교사요, 개척자인 그의 조상 아브라함 피어선이 1639년 영국 국왕의 명령을 받아 미 매사추세츠에 도착하여 미국에 정착한지 약 200년이 지난 뒤였다.
아브라함 피어선의 후예들은 현 예일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설립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한 사람들이다. 피어선의 선교적 열정이나 복음적 설교의 능력이나 학문적 깊이가 한결같이 그의 조상들의 신앙적 유산 때문이었다고 후대 평가자들은 밝히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피어선이 태어나고 자란 당시 뉴욕은 밀어닥친 경제적 어려움이 많았던 시기였다. 그로 인해 피어선도 언제나 굶주림을 면치 못하는 가정에서 많은 형들과 누나들의 그늘 밑에서 자랐다. 그 같은 가정적 분위기에서 그는 어려서부터 철저한 신앙 훈련과 많은 형제들 가운데 공동체적 삶을 배우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의 철저한 신앙 훈련과 어떠한 환경 아래서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자세는 그의 삶 전체에 있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고 섭리되고 있다는 철저한 신앙의 자세를 갖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그는 13세 때 감리교회에서 열리는 특별 부흥회에 참석하면서 중생의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이 경험을 "어느 날 밤 나는 몹시도 구원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초청을 받았을 때 나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기도를 요청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나의 삶을 출발하기로 결심했습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뉴욕, 클링톤에 있는 기독교 대학인 해밀톤 대학에서 수학하게 되는데 콜럼비아 대학으로 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곳에서 선교사로서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피어선은 마을 선교회의 간사로 일하며 방학 중에는 문학, 전기, 역사 그리고 시를 체계적으로 하루 100페이지씩 읽었다. 그리고 표현을 자유롭게 하고 사상을 명료하게 하며, 용어를 아름답게 선택할 수 있도록 습작 연습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대학을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뉴욕의 유니온신학교에 들어갔다. 1836년에 세워진 유니온신학교는 지금은 많이 바뀌었으나 당시는 보수 신앙의 요람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신학적 특별 연구와 실제적 훈련을 3년간 받게 된다. 토마스 스키너 박사에게서 수사학과 목회 신학을, 헨리 보이톤 스미스에게서 조직 신학을 수학하였다. 스미스 교수는 피어선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위대한 학식과 명료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의 가르침은 하나님을 학생들에게 완벽하게 알려주는 가르침이었다. 히브리어를 가르친 엘리아스 리그스 박사로부터 피어선은 선교적 관심에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가 수학하던 때, 뉴욕에서는 여러 교회에서 영적 각성이 일어났고 그 영향으로 선교적 관심이 제고되던 때였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860년부터 1889년까지 여러 지방의 여러 교회에서 광범위한 목회 경험을 갖게 된다. 그의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교회의 정신과 목적을 (1) 복음적 신앙 : 성서의 가르침을 생활의 규칙으로 받아들이고 채택하는 것 (2) 복음 전파적 :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추구하는 것 (3) 교육적 : 가족을 유익하게 하고 국가와 민족, 그리고 세계에 유익을 줄 수 있도록 개인을 개조하고 가르치는 것 (4) 계급을 조장하는 정신을 배제하고 교회에 오는 모두에게 좌석을 무료로 함에 두었다. 특히 그에게 있어 이 기간은 기도의 비밀과 기도의 영역을 넓혀가는 시기였다. 그의 기도에는 인간들이 겪는 어려움, 필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제반 필요의 사항과 전 세계를 향한 내용들이 포함되었다. 그는 개인 기도 생활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승리, 인간에 대한 그의 영향력,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능력의 비전을 체험하였다.
그 무렵 그의 설교와 글 그리고 성서강해는 그의 이름을 미국에 널리 알려지도록 하였고 많은 대학 그리고 교회에서 강연과 설교의 초청을 받게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에 시카고의 노스필드의 무디에 의해 시작된 성경연구회와 연결된다. 그 결과 A.J.고든, 보스톤의 조셉 쿡, 마르크스 레인포드, F. B. 메이어, 켐벨 몰간, 그리고 영국의 맥그리거와 같은 거장들과 교분을 갖게 된다. 1885년, 무디가 주관하는 선교위원회가 조직되는데 그 위원들은 회장에 피어선, 임원으로 고든(보스톤), 쿤홀(인디아나폴리스), 펜테코스트(뉴욕), 애쉬모어(중국 선교사), 스푸트 (영국의 런던), 드라이어(시카고) 그리고 무디가 참여하였다. 이같은 선교적 노력은 1888년 런던에서의 선교 100주년 회의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되었다. 그 집회 후 4개월 동안 그는 125개의 모임에서 선교에 관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시 선교에 관하여 가장 권위있는 저널인 미셔너리 리뷰(Missionary Review)의 편집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 후 피어선은 30년 동안 미국 장로교에서 목회지를 떠나 영국 런던의 침례교의 스펄젼이 목회하던 교회에서 스펄젼을 대신하여 약 2년간 (1891년 10월 - 1893년 6월) 목회를 하게 된다. 이후 1910년 일본을 거쳐 그는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한국에 6주를 머물면서(1910년 12월 1911년 1월) 선교회에서 매주 강의하였고 주한 선교사들과 한국 기독교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한국 교회의 사도적 특성과 희생 정신 그리고 성서 연구에 대한 한국인들의 갈망을 보고 듣게 되었고 한국 땅에 성서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그 노력의 결실이 바로 1912년 서울 신문로에 세워진 피어선기념성서학원이다. 1887년 시작된 새문안 교회의 언더우드는 A.T. 피어선 박사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예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낼 정도로 깊은 관계가 있었다. 후에 언더우드는 이 피어선학원의 제 2대 교장을 지냈다. 지금은 평택대학교로 바뀐 이 학교에서 한국 학계와 교계의 무수히 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다. 초기 대부분의 감리교 인물들이 피어선학원 출신이었으며 그 이외 대표적 유명 인물들로는 송창근 박사, 박연서 목사, 박석현목사, 손재학(제헌 국회의원), 한상동 목사, 조기흥 박사, 지휘자 김생려(金生麗), 김삼환 목사, 이필재 목사, 조상열 박사 등이 있다. 1910년 약한 몸을 가지고 일본을 거쳐서 한국을 방문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병세가 악화된 피어선은 1911년 미국 뉴욕으로 돌아간 후 그해 6월 3일 74세를 일기로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는 장로교에서 신학적 훈련을 받았고, 회중 교회에서의 첫 목회 경험을 쌓았으며, 그 후 침례교에서 광범위한 활동을 하였고, 영국 브리스톨의 형제단에서 가장 심오한 영적 교훈을 받았다. 그는 생애 동안 많은 활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인간의 조직에도 직접적으로 소속되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우주적인 교회만을 추구하며 그의 일생을 마치게 된다. 그는 생을 마치기전 "오직 주님 이외에 아무에게도 속해 있지 않은, 장로교, 침례교, 조합 교회로 복합된 나를 영국 국교회가 환영한 것은 놀라운 일이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는 말 그대로 현대판 초교파적 인물의 원조였다.
3. 변증가로서의 학문적 배경
피어선의 조상 중 처음으로 미국에 도착한 사람은 뉴왁(New ark)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의 초대목사였던 아브라함 피어선이었다. 주민들이 그들의 마을을 뉴왁(New ark)이라고 고쳐 부른 것은 그의 영국 출생지 지명이 Newark-on-the-Trent였기 때문이었다.
코네티컷 주 브랜포드(Branford)에서 피어선 목사를 따라 이사 온 사람들은 엄격한 생활의 규범을 강조한 청교도들이었는데 이들은 신정주의 원칙에 입각한 첫 교회를 설립하였다. 즉 교인이 아닌 사람은 투표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브라함 피어선 목사의 아들 아브라함 피어선 2세 역시 목사였다. 그는 예일대 설립자 중의 한 명이며 초대총장을 역임한 사람이다. 그의 부친인 스티븐 피어선은 장로교의 장로로 열 명의 자녀들을 장로 교인으로 길렀는데 피어선은 주일이면 스프링가 장로교회의 교회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이런 신앙적 배경은 그가 탁월한 기독교인으로서 뿐 아니라 학자적 수양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스티븐 피어선과 그의 아내 셀리는 자녀들에게 철저한 복음주의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그들을 기독교 사립학교로 보냈다. 나이 11세 되던 1848년 워싱턴 스퀘어에 위치한 마운트 워싱턴 교구학교에 등록하여 그곳에서 희랍어와 라틴어를 배웠고 12세 때 희랍어신약성경을 읽었으며 뉴욕시 테리타운 언덕 허드슨에 위치한 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그의 뛰어난 학문의 능력과 시, 음악, 어학, 그리고 화술 등의 재능이 나타나 부모들로 하여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불구하고 대학과 학교에 다니도록 결정을 내렸다.
앞서도 언급했듯 13세에 감리교회 특별 부흥회에서 중생을 경험한 그는 1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다. 1852년 5월 28일 머서가(街)에 있는 장로교회 강의실에서 복음주의 청년들과 회합을 가졌는데 백인 계 무역업에 종사하는 청년들의 정신적 도덕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해 고안한 당시 영국인 조직인 YMCA에 관한 강의를 듣고 뉴욕 청년대표들을 포함한 백 명의 창립회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1853년 뉴욕 주 클린턴에 있는 해밀턴대학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시학, 수사학, 그리고 어학에 몰두하였고 동료 젊은 토머스 베일리 알드리히는 피어선의 시를 높이 평가해 줌으로 피어선의 문학적 포부를 더욱 북돋아 주었다. 피어선의 고전적 시 형태는 그의 종교교육을 반영하는 것으로서 도덕적 경건으로 넘쳤다. 이런 시적 감각은 그의 저작들에 반영 되었을 뿐 아니라 변증가로서의 삶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1857년 피어선은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 입학하여 문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시(詩) 기고란 외에도 헨리 비쳐(Henry Ward Beecher)가 창간한 「표준과 독립」(The Standard and the Independent)신문에 여러 편의 시와 평론을 기고하였다.
피어선은 1860년 뉴욕 유니온신학교를 졸업하였는데 1859년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된 후에 성경이 역사와 과학 등에 대해 잘못된 진술을 포함한다는 고등비평이 힘을 얻었고 유니온신학교의 찰스 브릭스 교수는 1880년 이후 이 새로운 신학사조를 장로교에 들여왔다. 1892년과 1893년 장로교총회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을 선언하고 브릭스 교수를 장로교에서 정직 시켰다.
이 후 유니온신학교는 성경원전의 “무오성”에 도전하는 대표적인 진보주의 신학교로 바뀌었다. 현재는 자유주의 신학의 총본산이며 종교다원주의와 범신론에 입각한 신학교로 완전 변질 되었다. 이런 모습들을 경험하면서, 거듭난 신앙인이요 선교의 열정에 불타던 피어선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변호하는 일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1860년대 초반 피어선은 기독교에 대한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기독교에 대한 증거를 공부하기 시작한다. 돌을 수집하고 놀던 어린 시절부터 자연 과학에 흥미가 많던 피어선은 과학과 신앙 사이에는 아무 런 모순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독일의 자연학자이자 탐험가인 훔볼트(B. Von Humboldt)와 프랑스의 파스칼(B. Pascal)에 대한 대중적인 글쓰기를 좋아하였다.
이후 그는 디트로이트 YMCA에 적극 참여하면서 YMCA가 초교파적인 병기로서 청년들을 양성하는데 공헌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피어선은 디트로이트 기독청년 연합회를 위한 건물과 체육관 구입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한동안 임시건물에서 성경연구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피어선은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한 외에 장로교단 일에도 적극 참여한다. 1872년에는 장로교 디트로이트 연맹을 조직하는 일에 앞장을 섰으며 1875년 피어선의 나이 서른여덟 되던 해에 미시건 대회의 회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선교운동에 있어 가능한 한 중립적 위치에 서려고 애썼다. 하지만 1890년 이후 신학적 다양성에 대한 자신의 온건하면서도 중립적인 태도를 서서히 바꾸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1893년 세계박람회에서 노출된 신학적 다원주의가 피어선을 놀라게 하였으며 복음주의적 신학과 에큐메니칼적 관용 간에 균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생애 마지막 15년간, 그는 평신도 성경연구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고등비평이 주장하는 지성주의와 불경건을 거부하고 나섰다. 그리고 전(前)천년주의 성경강해자의 주역이 되어 영국과 미국에서 성경에 굶주린 수많은 학생들을 양육하였다. 그는 진실한 근본주의자였으나 훗날 근본주의 운동을 특정 짓게 된 분파주의와 편협은 몹시 싫어하였다. 그는 성경강해에 관한 저술 및 「스코필드 관주성경」(Scofield Reference Bible)을 편집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자신의 영적 생활을 강화하고 국제적 성경강해자로서의 새로운 경력을 확고히 하였다. 그의 초기 저술들은 대개가 선교에 관한 것들인데 반해, 1895년 이후 저술의 대다수는「세계선교 논평」을 제외하고는 영적생활과 성경연구에 관한 것들이었다. 초점이 선교에서 케스윅 영성운동 및 성경강해로 옮겨간 것은 선교단체들 간의 신학적 논쟁을 피하려는 방법 뿐 아니라 성경적 근본주의로의 전환이기도 하였다. 이런 그를 훗날 많은 학자들이 진정한 근본주의자라 평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피어선이 조지 뮬러(George Müller of Bristol)를 따라 후(後) 천년주의자에서 전(前) 천년주의자로 전환한 것은 주림의 재림을 대망하면서 그의 근본주의적 관심을 심화시켰을 것이라 본다.
변증가로서의 아더 피어선의 학문적 배경은 이와 같은 그의 삶의 궤적과 선교사로서의 사역이 결합하여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4. 피어선과 변증
피어선은 정통 조직신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글에서는 탁월한 변증가로서의 모습이 보인다. 그의 변증가로서의 모습은 주로 「오류없는 증거들」(Many Infallible Proofs: Chapters on the Evidences of Christianity, 1886)에 나타난다. 주로 위대한 불가지론자라 불렸던 잉거솔(Robert Ingersoll)에 대한 논박으로 시작된 이 책에서 그는 증거의 중요성과 필요성 그리고 지식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하고 있다. 여기서는 피어선의 이런 변증가로서의 모습을 몇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언(prophecy)
피어선은 기독교의 증거가 외적 증거와 내적 증거로부터 온다고 말한다. 내적 증거는 그리스도 자신의 성품과 가르치는 교리와 도덕성을 내포한다.
외적증거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예언과 기적이다. 예언은 말로 표현되는 기적을 말한다. 예언과 섭리는 쌍둥이 자매이다. 피어선은 이신론자(理神論者)들이 기적을 반대하는 것에 맞선다. 기적의 반대는 곧 예언의 반대가 된다. 성경의 기적의 책이 아닌가. 기적이 부정되면 예언이 부정되는 것이요 기독교가 부정된다. 이것이 그가 이신론자들의 주장에 동조하지 못한 이유이다.
그는 진정한 예언의 기준으로 첫째 인간적 예견이나 지혜나 총명으로 추측할 수 없는 미래의 드러냄, 둘째 예언이 만일이라는 것을 제거해야 함, 셋째 예언의 시간적 종합적 증거가 일치해야 한다. 이것은 마치 증거의 시냇물이 강과 합쳐지고 거대한 홍수를 이루듯 거대한 성취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예루살렘 멸망과 유대인의 흩어짐을 예수님 당시 누가 과연 담대히 명료하게 예언할 수 있었겠는가. 이 하나만 보더라도 성경은 범상한 책이 아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권위는 하나의 예언이 모든 예언을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관점은 반 틸(C. Van Til)의 ‘전제에 의한 이론’(the reasoning by presupposition)과도 유사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신지식이 있음을 웅변적으로 알려준다. 우리가 비기독교 철학의 소유자인 현대 인간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과학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 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신지식에 호소해야 한다. 성경 예언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겨우 이신론자에 머물게 된다. 성경은 우리가 기독교를 변증할 때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이 다같이 인정하는 어떤 ‘사실’이나 ‘법칙’에 호소하지 않고 어떤 ‘사실’이나 ‘법칙’을 진정으로 ‘사실’과 ‘법칙’이 되게 하는 궁극적 표준이 무엇인가를 따져 변론하게 하는 표준이 된다.
2) 기적
기적(奇蹟)은 불가사의한 일을 뜻하는 라틴어 '미라쿨룸'(miraculum)에서 왔다. 신약에 나오는 ‘이적’과 ‘기사’와 ‘표적’ 세 용어는 경우에 따라서 함께 쓰일 때도 있는 데(행 2:22; 살후 2:9; 히 2:4) 이 용어들은 구원의 역사와 관련된다. 즉 구원적 신론에서 이적은 필연적 귀결이다. 창조, 섭리, 죄, 구원의 원리를 인정할 때 구원은 진실한 필요물, 즉 은총으로서의 이적이 된다. 자연이나 사건의 흐름에 대해 초자연적 간섭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기적은 과학의 영역을 벗어나면 다양하다. 오늘날까지 성결파 및 오순절 복음주의자들은 신유와 방언의 기적이 유효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은 기적은 자연법의 위배로 보았다. 흄은 종교에 관한 자신의 두 저서 ⌜종교의 자연사⌟와 ⌜자연 종교에 관한 대화⌟에서 우주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신은 우주 질서의 원인으로서 가정된 이신론적 존재(a deitistic being)이며 따라서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는 자연 법칙을 위반하는 기적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므로 흄에게 있어 기적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흄이 볼 때에 혹 신의 특별한 의지에 의해 일반 법칙이 깨어지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인간이 전혀 알아챌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기적은 분명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20세기 초 과학자들 뿐 아니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기적을 거부한 사례가 늘어나자 복음주의 신학자 워필드는 우리 마음에 품은 세계관이 아니라 우주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실들에 대한 정당한 고찰에 의해 결정되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기적을 이해하였다. 그러면서 워필드는 기적은 사도들이 교회의 토대를 놓음과 함께 그쳤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피어선은 기적을 자연법의 위배로 본 흄(D. Hume)이나 스트라우스(Strauss)와 의견을 달리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을 나타내는 표적으로서 기적을 사용한다. 하나님은 기적을 낭비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관심을 끌지 않는 것은 기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태양이나 무지개를 기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힘 모두를 초월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기적이라 인정한다. 정해진 자연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는 작용을 경이롭다고 하나 기적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 문제는 성경을 과학의 틀 속으로 가져갈 때 문제가 발생한다. 즉 피조세계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인정하지 않는 인과율(因果律)에 사로잡힌 희랍인들의 구조 안에서 기적은 존재할 수 없다. 기적이 그들의 틀 속에 잡힐 수 없는 것이다. 히브리인들에 있어 관심은 하나님의 일이었다. 하나님이 단지 무엇을 하시며 그 일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가 그들의 의문의 영역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과학적 검증은 희랍인의 몫이지 결코 유대인들의 몫은 아닌 것이다.
성경은 과학 책이 아니다. 과학의 언어로 쓰여 지지 않은 책이다. 자연과학적 영역과는 관심 분야가 다른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 대해 우리가 갖는 신앙적 믿음으로 인해 비록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기는 하나 성경의 말씀대로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이 곧 성경의 하나님이시라면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이다. 하나님이 주신 이 두 권의 책(말씀의 책 성경과 하나님의 활동의 책 자연은 때로는 근접하기도 하고 어떤 시기는 우호적이었으며 어떤 때는 서로 간에 무관심한 영역으로 치부하여왔으며 어떤 때는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여왔다. 그것은 간혹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불필요한 긴장이기도 하였다.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자연과학의 질서를 만드시고 그 사실을 성경을 통해 계시하시고자 하였다. 헨리 모리스는 엔트로피(entropy)의 법칙이 성경 창조의 기적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흔적일 수 있다고 본다. 그럴 경우 참된 기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현재 우주의 근본적인 법칙과 과정들의 관계에 비추어 정의 될 수 있다.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당연히 성경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확고한 창조 신앙의 피어선이 살아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기적을 믿는 것은 당연하였다. 피어선은 변증에 있어 과학과 기적 둘 다 당연히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3) 성경 자증의 원리(Scriptura sui ipsius interpres) 사용
피어선에게 있어 성경은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피어선이 볼 때 교리나 실천 상의 오류는 성경 전체를 가지고 시험해보면 반드시 밝혀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의 변증의 핵심 도구는 언제나 성경이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성경으로 비교해 보아서 한 본문이 다른 본문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게 하던가, 다른 본문의 올바른 느낌을 확증해 주든가, 새로운 각도에서 그 의미를 조명해 주고 그 깊이를 열어 주게 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다. 성경 자증의 원리를 받아들인 이 같은 피어선의 입장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의 모토로 시작된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굳건히 뿌리 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변증학도 당연히 신학에서 사용했던 것과 같은 원리, 즉 성경 자증의 원리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유추적 체계의 원리를 사용해야 한다. 성경적 변증은 불신자와 신자 사이의 단순한 '공통적 관념'(롬 1:20)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으로서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데서 말미암는 차원의 '공통적 관념'(요 1:1-12)에 호소해야만 한다.
4) 성경과 과학
라틴어 「Scientia」는 사람의 지식을 말한다. 이 라틴어에서 영어의 「Science」가 유래하였다. 이 말을 지금부터 110여년 전 일본 사람들이 ‘과학’(科學)이라고 번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과학도 인간이 가진 하나의 지식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즉 과학은 자연 세계에 대한 지적이며 실제적이고 체계적인 연구와 활동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 지식 체계가 어떤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과 종교의 지식체계와 어떤 관계를 지니고 있는가를 해석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또한 오늘날 과학은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떠나 높이 평가되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과학과 과학적 방법에는 어떤 특별한 것이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경이든 과학적인 데이터든 모두 해석을 통해서 산 의미를 갖는다는 면에서 오늘의 컨텍스트 아래에서 이 둘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 지를 다루는 것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종교와 과학은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담을 쌓아온 면이 없지 않다.
성경은 창조의 사실을 선포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더욱이 성경은 우주가 시작될 때 시간(태초:bereshith)이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과학이 아무리 성경과 다른 언어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다른 책인 자연에 대한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을 피어선은 잘 알았다. 것이다. 또한 피어선은 성경이 과학책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다. 과학의 언어로 성경을 탐색하는 자들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자들이다.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피어선은 과학에도 대단히 해박한 학자였다. 피어선이 활동하던 시기는 진화론과 자연 과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폭발적으로 분출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과학에 대한 관심은 당대 탁월한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근본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이었던 피어선의 관심 영역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피어선이 과학적 변증서를 남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피어선은 자신의 책에서 자연과 성경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다는 주장 뿐 아니라 오늘날 설계론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주장을 편다. 피어선은 또한 창세기의 날(yom)이 문자적 하루가 아니었다고 논증한다. 피어선이 볼 때에 창세기 2:4절에서 이 말은 창조의 전 시기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시 95: 8절에 보면 “시험하는 때에” 란 말씀에서 그 날(‘욤’)은 40년을 의미한다. 오리겐과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피어선은 이 “날”은 하나의 시기를 의미했을 것이며 히브리어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의미 한다고 하였다.
피어선이 볼 때에 성서의 목적은 과학을 가르치려는 게 아니다. 도덕적이며 영적 진리를 가르치려는 것이다. 만일 성경의 언어가 과학적이었다면 그 언어는 관심을 끌었을지 모르나 오히려 약점과 방해를 받았을 것이라고 피어선은 역설한다.
이와 같은 시각에서 피어선은 과학의 영역을 엄격하게 제한한다. 그리고 자연의 영역 안에서 진화가 물리적 세계 속에 작용하는 하나님의 방법 가운데 하나 일 수 있다는 추측을 허용하고 있다.
5) 도덕적 권위
세상 철학에 있어 인간의 최고선은 자아 실현이다. 인간은 합리적 존재로서 우주의 법칙에 순응해서 그의 내적 가능성을 계발한다. 기독교 철학에서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개인과 세상 안에 모든 죄악을 완전히 소멸해야 하며 악한 자의 사역이 계속하는 한 절대적 최고선은 이 세상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이 도적적 양심은 가지고 있으나 인간의 최고선은 하나님과 세상 앞에 늘 무능할 뿐이다. 피어선이 볼 때 성경적 최고선은 개개인의 악과 내재적 악을 소멸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의 윤리는 소망의 윤리요 회복의 윤리이다.
성경은 단순한 종교 책이 아니다. 성서의 통일성, 명확성 가운데 내재하는 도덕적 숭고함의 극치(sublimity)는 다른 종교와 차원 자체가 다르다. 피어선은 성서를 대적하는 것이 곧 도덕적 타락이라고 말한다. 피어선은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공격하게 내버려두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능하나 선하시며 모든 것을 알지만 자비로운 분이다. 세상 헬라의 처럼 신경질적이고 자기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자기 아이를 잡아먹는 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 아이를 삶아 먹는다. 이게 인간의 본 본 모습이. 인간을 닮은 신이 아닌 신을 닮은 인간이 타락한 것이다. 성서만이 인간의 존엄과 위엄에 대해 분명한 설명을 한다. 동물과 사람의 위치는 분명 다르다. 송아지를 숭배하고 악어를 숭배하는 것은 추락한 인간의 상징일 뿐이다.
현대 과학은 동물의 창조를 고귀하게 여기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모든 피조물의 왕관이 주어졌다, 자연철학, 천문학, 지질학, 소설, 역사, 법과 의학은 지식은 주나 육욕을 억제하고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며 고상한 목적을 고취하고 죄의 기질을 드러내며 더 진실한 아들이 되게 만들고 더 훌륭한 남편과 아버지가 되게 만들지는 못한다. 성경의 도덕적 권위는 성경이 다른 종교 문헌과는 차원이 다른 책임을 증거한다. 피어선은 이점을 강조한다, ‘사람은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의를 위하여 역사하는 소망이 생기기 시작하며 악은 억제 되며 선(善)을 자극’한다.
6)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
피어선은 다른 무엇보다 그리스도에 대한 변증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피어선은 총 6장에 걸쳐 예수 그리스도의 주(Lord) 되심을 변증한다. 그 주요 내용은 첫째 구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요, 둘째 그리스도의 인격에 나타난 독특하고 신비로운 측면을 다루고 셋째 신이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역사적 실재로 나타날 수 있었는가를 다루면서 이 당혹스러운 주제에 대해 변증을 시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머지 2장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교사로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능력과 독창성에 대해 증거하고 있다.
오늘날 구속사적 설교에서 잘 나타나는 오실 메시야에 대해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direct prophecy)이 소위 ‘원복음’이라고 알려진 창세기 3장 15절로부터 시작하여 다윗과 예언자의 시대 가운데 이사야 선지자에게서 절정을 이루며 말라기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논증한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수성과 역량이 풍부했던 피어선은 직접적 예언보다 오히려 간접적 예언(indirect prophecy)들이 보다 더 놀라운 증거들이라고 본다. 예언적 시(詩)들과 모형론적 레위기의 의식과 규정들 그리고 역사책들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형을 추적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성경의 파라독스에서도 그리스도의 모형을 발견하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성경의 많은 역설 가운데 바로 십자가에서 그 적나라한 절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완전한 인간과 완전한 하나님이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니케아공의회 이후에 지속되고 있는 신학의 관심 영역이다. 제한된 우리 인간이 어찌 전지전능하신 참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신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일이 가능하겠는가. 피어선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긍정하는 피어선은 이 문제를 정밀하게 접근하고 있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은 선생(랍비)으로 묘사한다. 우리 인간은 믿음 뿐 아니라 배워야 한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이라고 불렀다. 피어선은 워드워즈의 말을 인용하여 “언어는 사유의 화신(Language is the Incarnation of thought)"이라고 하였다.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권위와 거룩함과 고상함과 생명력과 독창성과 희생의 사랑은 세상 철학과 다른 참 진리요 참 철학이다. 과연 이 세상 누가 이분과 견줄 수 있겠는가. 예수의 가르침은 아래로부터 온 것이 아닌 위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5. 나가면서
지금까지 피어선의 생애와 그의 학문적 여정과 증거들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피어선 변증의 특징을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그는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였음이 그의 변증에서 증거 된다. 그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에 더하여 신학, 문학, 예술, 철학, 자연과학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총동원하여 기독교와 성경과 그리스도를 증거한 탁월한 변증가였다. 피어선이 살던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은 성경과 기독교가 세상의 세속적 자연주의와 우연주의로부터 세찬 도전을 받던 시기이다. 그는 기독교 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정통 조직신학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방면의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놀라운 설득력의 깊이와 넓이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 피어선의 증거들은 성경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서 나오는 변증이었다. 기독 학자로서 피어선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하여 성경과 기독교를 변증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 순수하고도 고결한 영혼에서 나오는 확신에 찬 열정의 변호였다. 이것은 성경을 신뢰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믿음’ 그것이 바로 그의 설득의 힘이었다.
셋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충성이다. 피어선의 변증은 단순히 성경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향하지 않는 변증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 믿음에 대해 피어선기념연구원 원장을 지낸 평택대 유윤종 박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확신은 산을 들어 바다로 옮길만한 믿음이었다’고 칭송하고 있다. 피어선은 열정의 선교사답게 오늘날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려는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를 소개할 것인지 그 길을 변증의 방법으로도 비춰준 신앙의 등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