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기고] 이제 필자는 과정 우주론적 범재론으로서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종결에 이르고자 한다. 과정 우주론적 범재신론이 설명하는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의 과정 속에 내재하고 그 과정을 이끄는 자로서 기능할 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성향은 인격적 활동이라기 보다는 만물의 되어감의 내면적 추동력이지 돌봄, 공감, 고통을 함께 하시는 성경이 증언하는 사랑의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인격적 존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인격성의 부재와 함께 과정 우주론에서의 하나님의 존재는 만물의 되어감 속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과정 속에서 항상 새로운 시작의 추동력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래서 만물의 과정을 인격적으로 초월하여 주권적으로 인도하시고 목적과 끝을 정하시는 인격적인 섭리의 하나님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러한 트랜스페미니즘의 하나님은 과정적 만물으로서의 신이지 성경이 증언하는 창조하시고 시작과 끝을 그의 주권적인 의지 가운데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며 창조의 과정을 그의 경륜 속에서 이끌고 가시는 초월적 하나님은 아니시라는 것이다. 여태까지의 비판적 성찰을 다음 같이 요약 정리하고자 한다.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은 과정 우주론적 범재신론으로서 다음 문제를 야기시킨다.
I. 과정 우주론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만물의 상호 얽힘 속에서 갇혀 버림.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에서 우리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생물학적 구성요소, 생태적 환경적 요소, 사회학적 구성요소 등 우주의 모든 것들에 함께 얽혀서 계속적으로 상호작용을 하면서 변화하는 흐름 또는 과정 속에 있다. 그러므로 트랜스페미니즘은 과정 우주론(process cosmology)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process)이야말로 지속적이고 무한하다. 이 끝없는 흐름의 과정은 특정 시공 속에서 상대적인 작용과 반작용의 맥박들 또는 파동들에 협력적으로 상호작용하고 그 얻어지는 결과들은 다시금 이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계속 전진한다.
끊임없는 변화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만물의 계속 전진을 강조하는 켈러의 과정 우주론에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만물의 상호 얽힘 속에 갇혀 버린다. 트랜스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고립된 개별적 실체는 부인되고 모든 것은 상호 관계성 가운데 되어지는 과정 속에서만 존재한다. 켈러에 의하면 만물은 상호교차성의 얽힘 속에 있으며. 그리고 그 얽힘의 구조는 우리가 내부적으로 알 수 없는 생태의 신비를 드러낸다. 여기서 창조주와 자연만물과의 차이는 상호 얽힘 속에서 창조주의 초월성은 만물과 융합되어 버린다. 그리하여 켈러의 과정 우주론은 그것이 설명하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계시를 거부한다. 켈러가 수용하는 신유물론은 부정신학적 신비주의와 신비로운 물질화만을 강조하며, 그것의 필연적 결과로서 하나님의 초월성은 상실된다. 하나님도 만물의 과정 속에서만 존재하므로 초월성을 상실한다.
그러나 정통개혁신학에 의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만물에 초월해 계시면서도 불가지적 존재가 아니라 그 분의 뜻을 만물과 역사 속에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에덴에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각종 실과는 임의로 먹을 수 있으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고 명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창 3:2b-3). 그리고 하나님은 뱀(사탄)의 유혹에 꾀여 범죄한 인간이 벌거 벗음의 수치를 발견하고 수풀 속에 숨자 갈등 속의 인간을 찾아오셔서 상담하시는 분이시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창 3:9). 하나님은 돌봄과 사랑 안에서 인간을 책망하시며 벌을 내리신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7절).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18절),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7-19).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
그리고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을 에덴 동산에서 내 보내시고 인간이 초지(草地)를 갈아 땀을 흘려 수고로 살게 하신다. 그리고 인간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 먹고 영생할까 우려하셔서 그룹과 불칼을 명하여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어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22절),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23절),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 22-24). 창세기는 인간의 근원적 역사와 본성과 숙명에 관하여 계시적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은 인간을 그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창조하시고 그의 선하신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시고 이를 위반하여 수치와 갈등 속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주시는 초월적인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다.
II. 과정 우주론에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상실: 생성하는 과정 속에 있는 신 존재
켈러의 과정 우주론에서 하나님은 인격성을 상실하고 생성하는 과정 속에 있다. 켈러는 우주를 과정으로 봄으로써 우주와 역사는 목적을 상실하는 끊임없는 생성 가운데 있다. 신은 과정 속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에 과정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범재신론이다. 여기서는 만물을 섭리하는 인격적인 하나님은 없고 개개인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고 모든 것이 상호관계성 안에서 존재의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다. 모든 것은 목적성이나 지향점도 없고 불확실성 가운데 있을 뿐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고립된 개별적 실체는 없으며 모든 것은 상호 관계성 가운데 되어감(becoming)의 과정(process) 속에서만 존재한다. 여기서 신 존재는 생성으로 환원되고 있다. 켈러는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 이하 입자들의 이러한 상호 얽힘이란 “과정신학의 관계적 우주론(relational cosmology of process theology)” 또는 과정 우주론(process cosmology)의 특성이라고 주장한다.
켈러의 과정 우주론에는 모든 것을 존재(Being)로 보는 것이 아니라 되어감(becoming) 즉 과정(process)으로 이해하는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유기체 철학 사상이 지배한다. 화이트헤드는 스스로의 사상을 '유기체의 철학'이라 명명하고 전통적인 실체(substance)의 철학을 극복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실체에 대응하는 것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현실적 존재'나 '현실적 기회'를 말하는데, 이는 상호간 유기적으로 작용을 주고 받는 현실의 다이내믹한(동적) 과정을 뜻한다. 이 과정이라는 개념은 화이트헤드 사상의 기초이며, 시간·공간에 전개되어 있는 사건을 말한다. 자연의 세계가 이와 같은 사건이라고 하는 유기적이며 창조적인 관계로부터 성립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 직접적인 경험이 입증한다. 이와 같은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켈러에 의하면, 이 우주는 “무한한 미완성의 상호활동성(interactivity) 가운데 우리 자신의 구성적 관계성(constituent relationality) 속에서 펼쳐진다.” 여기서 하나님의 존재는 생성하는 과정 속에 있으며 이 무한한 미완성의 상호활동성 과정과 동일시되며 인격성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개혁신학에 의하면 만물은 과정 속에 있으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 만물의 과정과 동일시 되지 않으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이 과정에 계시고 이 과정에 개입하시지만 초월해 계셔서 이 과정에 의하여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아니하신다. 그분은 내재적 초월자로서 만물 하나 하나를 그분의 섭리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산상 설교에서 만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증언하신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마 6:26a). 하나님은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 하나까지 섬세하게 돌보신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마 6:30a). 공중의 새를 기르시고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은 만물과 동일시되지 않으시고 만물 가운데 계시면서 만물을 초월해 계시면서 만물을 돌보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더욱이 우리 인간 하나 하나를 돌보아주시는데 이를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신앙을 안타까워 하신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 6:26b).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30b). 하나님은 믿는 신자 하나 하나를 돌보시고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친히 아시고 공급해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절).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 6:30-32). 그렇게 믿는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는 성경의 하나님은 섭리의 하나님으로서 우주와 역사 가운데 계시며 초월적으로 그것의 과정에 개입하셔서 그분의 섭리를 행사하시는 분이시다.
III. 과정 우주론에서 하나님은 초월적 은총 상실: 구원은 자연의 상호 얽힘의 내재적 복원력에서 나옴.
켈러의 과정 우주론에 의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초월적 은총에서 오기보다는 자연의 상호 얽힘의 내재적 자기 복원력에서 나온다. 여기서는 오늘날 생태의 위기 속에 있는 자연의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도 상호교차적이고 얽힘 속에서 자연의 스스로의 자기 복원력에 의존하게 된다. 그리하여 초월적인 창조주로부터 오는 대속의 은총은 거대한 자연의 생태학적 교차성과 상호 얽힘의 내재적 자기 복원력으로 환원되어 버린다.
켈러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뿐 아니라 케런 바라드(Karan Barad)의 신유물론(New Materialism)의 신학적 적용 가능성을 다룬다. 신유물론의 시각에 의하면 우리는 단순히 물질과 얽혀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물질화(materialization)는 다른 물질화와 얽혀 있다. 켈러가 수용하는 바라드의 진입 행위(intra-action) 개념은 기존 사물들의 상호작용(interaction) 개념을 대체한다. 그는 물질화 과정 속에 필연적인 진입행위를 강조한다. 이 진입 행위는 대행자를 인간이나 개인으로 이해하지 아니하고 모든 물질들이 상호간의 교환하고 분산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힘들의 역동성이다. 그리하여 물질화 과정에 수행되는 이러한 진입 행위에서는 사물 간의 절대적 분리나 전통적으로 이해된 객체 개념이 불가능해진다. 사물은 항상 다겹적으로, 집합적으로, 혼합적으로 그야말로 진입행위들과 복합성들로 존재한다.
신유물론에서는 물질 밖에서 초월적으로 간섭하는 하나님의 행위는 존재하지 않고 상호간의 교환하고 분산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힘들의 역동성만이 존재한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은총신학은 트랜스페미니즘 안에서는 다겹적 물질의 공생적 존재론으로 변모한다. 신유물론적 사고에 의하면 해방이란 이 무한경쟁의 구조 속에서 패자(敗者)로 규정되거나 낙인찍힌 소수자들의 연대를 통해 이루어진다. 해방은 바로 독자적 예외적 존재가 되기 위한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의 구조를 무너뜨리고 극복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초월적 은총 개념은 상호교환적 다겹적 공생적 존재의 ‘얽힘’(entanglement)에서 유기체적으로 수행되는 복원력 안에서 사라진다.
이에 반하여 정통개혁신학에 의하면 성경의 하나님은 과정 속에서 상호교환적으로 다겹적으로 있는 공생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러한 만물의 공생적 존재를 허락하시는 초월적 존재이시다.
성경의 하나님은 역사나 우주와는 질적으로 다른 초월적 존재이시며 끊임없이 역사와 우주의 생성과정에 간섭하시고 그의 주권적 목적을 형하여 이끌고 가시는 살아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성읍 예루살렘의 구속을 위하여 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다: “나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사 62:1). 동시에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하나님이 그의 구원의 향사를 멈추지 아니하시도록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6절),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 62:6-7).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지금도 쉬지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일하시는 하나님, 인간과 우주의 구속을 위하여 일하시는 대속적 사랑의 인격적 존재이시다. 하나님은 시위대 뜰에서 갇혀 있는 예언자 예레미아를 향하여 말씀하신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그러므로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 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데 대하여 유대인들이 예수가 안식일 계명을 범했다고 비난하자 예수는 하나님은 종교적 계명을 넘어서 인자와 사랑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라고 가르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요 5:17). 성경의 하나님은 과정 가운데 과정 너머서 과정을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IV. 과정 우주론에서 말씀의 성육신은 과정 우주론적 범재신론적 육화로 변형
겔러의 이러한 트랜스페미니즘에서는 성경이 증언하는 말씀의 성육신은 과정 우주론적 범재신론적 육화(肉化)로 변형되어 버린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전통적 신학이 해석하듯이 로고스가 인간이 되어 특정 육체성(나사렛 예수)을 구현했다는 말이 아니라, 물질화 과정의 진입행위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물질이란 상호간의 교환하고 분산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힘들의 역동성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물질의 역동적 상호 교환 과정에서 말씀의 성육신이란 있을 수 없다. 말씀의 성육신은 영원하신 로고스가 인간의 신체 속에 인격적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는 만물의 과정 법칙을 깨뜨리는 기적의 사건이다.
신유물론의 특성은 다겹적 존재와 만물의 복합성으로 드러난다. 모든 존재는 다겹들으로 되어 있어 공생적이다. 존재의 되어감은 동물들과, 식물들, 마이크로유기체들, 광기의 입자들 그리고 은하계 전체를 연결시켜준다: “인간 유전체(genome)는 소위 나의 몸의 불리는 평범한 공간 가운데 있는 모든 세포들 중 오직 10%밖에 되지 않는다. 세포들의 다른 90%는 박테리아, 균, 원생생물(protists)...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러한 수많은 작은 짝(mates)들과 어울어져 한 사람의 성인이 되어 진다.” 또한 “하나이기 위해서는 항상 다른 많은 것들과 되어감이다.” 여기서 인간 존재는 다른 존재 중의 하나로 평준화 되고 자연의 한 유전체(genome)로 간주되어 버린다. 켈러는 이것을 평면적 존재론이 아니라 접힘의 존재론 또는 프랙탈 존재론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간 이해는 범자연생태론적 인간 이해로서 자연의 한 유전체로서 거대한 우주적 과정 속에서 하나님 형상을 지닌 인간의 유일한 존재가 상실되어 버린다.
정통개혁신학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는 자연이나 우주의 한 작은 존재로 간주될 수 없는 인간의 존엄성을 다음같이 피력하셨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마 12:12). 이러한 예수님의 인간 이해는 창세기 만물과 다른 인간의 하나님 형상성 사상을 반영하고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3)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26절),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
시편 8편은 구약의 인간주의 헌장이라고 불리우리 만큼 인간의 존엄성을 말해주고 있다. 시편 기자도 인간이 만물보다 귀하게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노래하고 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시 8:4-6). 인간 존재는 신유물론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 유전체를 이루는 세포가 10%이며 나머지 90%는 박테리아, 균, 원생생물(protists)...등으로 이루어진 자연 중의 하나의 존재로 환원되는 존재가 아니라 천하와 바꿀 수 없는 유일한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V. 과정 우주론은 남성과 여성의 성(性)을 과정적 특성(남성이 여성으로, 여성이 남성으로 되어감)으로 봄으로써 성(性)의 생물학적 정체성 부정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에 의하면 과정적 존재로서의 인간에게 성(性) 정체성이란 고정(固定)되어 있지 않으므로 동성애는 허용된다. 과정과 생성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는 성에 있어서도 생물학적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사회적 젠더(gender)로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이동이 가능하다고 본다. 과정신학은 생성철학을 기본으로 하면서 모든 존재를 선험적 본질을 지닌 고정적 존재로 보지 않고 무한한 과정에서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생성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 영혼의 문제는 무시되고 몸의 상호연결성만을 강조함으로써 성적 문란을 조장할 윤리적 다원성이 허용된다. 그러므로 켈러의 프랜스페미니즘에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나 남성이나 여성으로서의 성 정체성이란 이러한 우주적 과정 속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가 금기(禁忌)되거나 혐오(嫌惡)될 이유가 없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해방신학의 동기를 지닌 트랜스페미니즘은 동성애자들이 사회적 성 소수자로서의 사회적으로 억압을 받는다는 측면에서 이들에 대한 사회적 정치적 연대를 공고히 한다.
이러한 트랜스페미니즘의 남성과 여성의 성 정체성 이해는 성경의 성 이해에 배치된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우주적 생성 과정 속에서 상호교차적인 관계 속에서 우연히 형성된 자연적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신앙적 존재다. 인간의 고귀한 본성이란 그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성이다. 이 하나님의 형상성은 인간의 영혼만이 아니라 그에게 주어진 남성과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남성 내지 여성으로 존재하고 사회적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생물학적 성이란 내가 규정하기 이전에 이미 태어 나면서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하나님은 인간에게 남자와 여자가 한 몸으로 결합된 가정을 이루도록 섭리하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인간의 본성과 운명이란 이러한 피조물적 제한성과 성적 한계성을 받아들일 때 인간의 존엄성은 지켜진다는 것이다.
VI. 과정 우주론에서 만물의 상호교차성은 진리의 유일성 상실, 진리와 윤리 다원주의 허용
켈러의 트랜스페미니즘에서는 진리의 유일성 대신에 다원주의가 허용된다. 트랜스페미니즘에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연결되고 진리는 너무 다층적(manifold)이고 다원적이다. 그리하여 진리의 유일성 개념이 사라져 버린다. 켈러가 제시하는 신유물론은 현재 문화이론, 여성 신학, 정치 신학, 그리고 퀴어이론을 통하여 물질 그 자체의 대행(agency of material itself)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인간의 특권을 대체하고자 한다. 켈러가 주장하는 신유물론에 의하면 우주라는 장(field) 안에서 상호교차성은 서로가 십자로처럼 교차되는 것일 뿐 아니라 서로의 자아 구성 요소 안에 참여함으로써 하나의 동시적 상호 관계성의 밀도(density)로서 꽃 피어난다. 만물의 상호교차성에서는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진리의 기준 자체는 거부된다. 그리하여 선과 악의 윤리적 규준이 상대화되고 다원화 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어 버리는 신유물론적 천명에 대하여 나사렛 예수는 자신이 유일한 진리임을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예수는 여러 길. 진리나 생명 가운데 하나의 길이나 진리나 생명이 아니라 유일한 길, 유일한 진리, 유일한 생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사도 요한은 은혜와 진리는 우주라는 장(場)의 상호교차성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로고스로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언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17).
맺음말
현대적 상식과 교양을 가진 민주시민들은 조용히 살아가는 동성애자들의 처지를 따뜻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동성애자들과 평화롭게 살아갈 태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이들의 상태가 정상적이 아니라 이성애의 이탈이요, 변태라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하고 이들이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 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퀴어신학은 성경적 죄 개념에서 벗어나 사회학적 죄 개념에 사로 잡혀 있으며, 동성애에 대한 대한 올바른 성경해석을 왜곡하고 있다. 퀴어신학은 젠더주의에 영합하고 이러한 인본주의적 흐름과 타협하고 있다. 퀴어신학과 정통개혁신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성경관에 있다. 퀴어신학은 성경을 지나간 시대의 문화적 사회적 편견을 가진 역사적 문서라고 보나, 정통개혁신학은 성경을 시대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와 처소에 타당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간 행위와 윤리의 절대적 기준과 지침으로 본다.
오늘날 기독교는 새로운 위기와 도전에 직면해 있다. 기독교가 이 시대의 동성애 운동을 유발한 젠더 이데올로기의 성주류화운동(양성 철폐 성평등, 동성애・동성혼 합법화)에 굴종하느냐 아니면 이를 돌파하여 나가는가 하는 기로에 서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말씀에 굳게 서야 한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성소수자가 아니라고 교만하거나 동성애자들을 멸시하거나 정죄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단지 동성애 자체는 성경이 금하는 것이라는 사실과 ”가증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리고 저들을 동성애라는 불에서 끌어 내어 구원해야 한다. 사도 유다는 우리가 긍휼과 사랑을 가져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유 23). 동성애에 대하여 의심하는 자들에 대하여도 인내를 가지고 이들에게 설득해야 할 것이다. 저들에 대하여 탈동성애 운동을 하면서 성 다수자인 우리가 가져야할 태도는 겸손이요, 공감이며 인내요 사랑에 근거한 우정어린 설득과 권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