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천재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친한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유명한 아인슈타인 자신의 마음에는 항상 외로움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만 하는 구원 받아야 할 존재들 입니다. 내가 구원받지 못했으면 외로운 것은 당연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면 자기가 외로운 지경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삽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없고 복음을 모른다고 한다면 이토록 외로운 것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 인류는 모두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에 빠져 있는 사람은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만 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분 내에 빠져 죽으면서 ‘내가 지금 빠져 죽는구나? 아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순간이 2-3년이 될 수도 있고 또는 4-50년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언젠가는 모든 사람은 그 죽음의 늪 속에서 헤어 나오지 않으면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느끼는 사람은 외로움을 느끼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는 누군가가 건져 주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온 인류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에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사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있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구원의 능력입니다.
구원이란 사회적인 의미의 구원도 있을 수 있고 도덕적인 면에서의 구원이나 사상적인 면의 구원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구원은 죄와 사망의 지배에서의 구원받는 것을 말합니다.
역사 이래 모든 인류들은 진정한 구원을 요구 했습니다. 사도바울 당시 철학과 종교와 정치 문화에 대하여 실망하고 회의를 가졌습니다. 복음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셨습니다.
복음의 능력은 다른 것은 몰라도 예수 믿고 영생을 소유 했다는 이것 하나만 가지고도 감사 하면서 기쁘게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한분만으로 만족 합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은 사변철학 혹은 자연 철학 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 자연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시대에 헬라 철학이나 로마의 철학은 인간을 구원 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철학의 고장 헬라도 침략주의 국가로서 정복자가 되었고 로마의 철학도 로마의 정복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진정한 구원을 소원 했습니다.
에피테투스는 자기의 강의실을 병든 영혼의 병원 이라고 했고 자기 교훈을 구원의 악이라고 했습니다. 아무것도 인간을 구원 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에 기독교의 복음은 인류를 구원 할 능력이 된다고 바울은 전파한 것입니다.
로마제국은 삽시간에 기독교의 복음화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구원이란 육신의 질병으로 부터의 구원도 있으며 (마9:21) 불안으로 부터의 구원도 구원 입니다. (마8:25)에 보면 제자들이 풍랑 이는 바다에서 무서워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면서 구원 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라고 외칩니다.
그때 주님이 바다를 잔잔하게 하시고 제자들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위험을 당하고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이때에 하나님께 간구 하세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죄악의 유혹에서 사단의 권세에서 예수를 믿음으로 이긴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보다 더 크고 중요한 구원이 있습니다. 죄로 부터의 구원 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 부터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2, 믿음입니다.
(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믿음이라 할 때 여러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1) 충성과 성실입니다. (살후 1:4)우리가 예수를 믿늠 다는 것은 그에게 충성하며 성실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2) 확신 입니다 (고전 15:17) 기독교의 메시지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그 사실을 그대로 긍정하는 것입니다.
3) 전적인 수락과 신뢰입니다. 믿음을 말 할 때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믿음은 창세기 15:6절의 믿음 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락하고 신뢰 했습니다.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은 바로 이것 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모든 일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곤란하지 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대로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인데 성경을 믿어 버리는 것입니다. 성경을 믿지 않고서는 기독교를 또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곧 의지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을 의지 하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살길을 열어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의지의 대상이십니다.
3. 의롭다 인정받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롬 1:17)기독교를 의인의 종교라고 하며 모든 그리스도인 들을 의인 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헬라어의 의인의 의미는 자기 자신이 의인으로 증명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옳다고 인정해 주고 생각해 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죄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저 의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말하는 의인은 법정 적 선언입니다.
우리는 근본 적으로 죄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으로 의인으로 인정 되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요 믿음의 종교요 의인의 종교 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자기 수 양의 종교도 아니요 철저하게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혜의 종교요
구원의 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후서 5:17절에서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 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새로운 삶을 사는 우리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새롭게 새로운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된 우리는 옛 생명의 죄악 된 삶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만합니다. 생명은 새로운 것인데 아직도 옛 생명의 모습대로 산다면 참된 그리스도인 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실 된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로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시 아버지가 내가 네 시아버지다. 하면 며느리는 “예 아버님” 하고 부르고. 일생을 며느리로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인정하고 모시고 사라가면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삶입니다. 이 세상을 돌이켜 볼 때 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너는 행악자의 득의함을 인하여 분을 품지 말며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대저 흉악 자는 장래가 없겠고 악인의 형통은 꺼지리라 (잠 29:19) 행악 자가 지금은 등불의 불처럼 밝히고 있는 것 같지만 종래에는 악인의 불은 꺼지리라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하는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라. 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갈 때 나는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내가 정오의 빛같이 빛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