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예레미야 애가 5:20~22 “어찌하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전혀 생각하지 않으시며,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오래 버려두십니까? 주님, 우리를 주님께로 돌이켜 주십시오. 우리가 주님께로 돌아가겠습니다. 우리의 날을 다시 새롭게 하셔서, 옛날과 같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풀지 않으시렵니까?”
1. 들어가는 이야기
성령강림절후 둘째 주이면서 감리교회에서는 평신도주일로 지키는 날이다. 오늘의 성서일과 중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떠올라,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
혼자 중얼거리는 말도 말이지만 기본적으로 말은 나와 남을 연결시키는 수단이다. 아내와 남편이, 부모와 자식이, 학생과 선생이, 서로의 생각과 느낌 등을 나누는 삶의 필수적인 수단이다. 그런데 어느 한쪽 상대방이 입 다물고 있으면, 아니 상대의 말을 들으려하지 않으면 그 관계는 정상적이지 않다. 물론 언어로 된 말이 아니라도 표정과 자세, 주변의 상황이 소통을 이어주기도 한다. ‘눈빛으로 말한다.’, ‘가슴으로 말한다.’는 말처럼 언어의 수단을 빌리지 않아도 때로는 소통이 가능한 경험을 하고 산다. 젊은 연인들이나 갓 결혼한 아내가 남편에게 ‘자기 나 사랑해’라고 물으면, ‘그럼 사랑하지’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만, 수십 년을 살아온 부부는 대부분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언어로 표현되는 말이 부부간 소통의 전부가 아니라는 축적된 삶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지만 언어가 공연히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왠지 남세스럽기도 한 것 같다. 80이 다 되어가는 저희도 이런 씨름을 여전히 하는 것을 보면, 남녀 간이나 지역 간의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일상의 삶속에서 언어로, 말로 표현되는 오묘한 말의 효용성을 새삼 부정할 길은 없다.
더군다나 요 며칠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남북관계, 특히 북미관계에서 당사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엉뚱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말의 위대함과 함께 말의 위험성과 모호성이 가져오는 엄청난 결과들을 생각하면 두렵기조차 하다.
2. ‘말씀’, 또는 ‘말하다’는 성서의 의미
히브리어의 말씀, 말하다는 뜻을 가진 단어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아마르’(אמר)는 일반적인 언어행위를 가리킨다. 이의 명사형 ‘이므라’ 역시 ‘말, 말씀’ 등의 뜻을 갖는다. 둘째 ‘다바르’(דבר)도 말을 하는 행위를 가리킴에 있어서 ‘아마르’와 거의 동의어로 쓰인다. 일반적으로 구약성서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다바르’이지만, 오늘의 성서 중 사무엘상 3장에서 하나님이 사무엘을 불러 말씀하시는 내용과,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들에서는 ‘아마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르’는 말하는 것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단어이지만, ‘다바르’는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말의 내용을 성취하는 행위와 열매까지를 포함하는 점이 다소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한마디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정리할 수도 있다.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고, 말씀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실 뿐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것이 곧 일하는 것이다. 한번 말씀하시면 반드시 그 내용대로 성취되기 때문이다.
이사야 55:10~11,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 땅을 적셔서 싹이 돋아 열매를 맺게 하고,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사람에게 먹거리를 주고 나서야,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나의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고 나서야, 내가 하려고 보낸 일을 성취하고 나서야,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그 뜻을 이루는 능력이 있다.
○ 말씀을 멈추신 하나님?
전쟁이 한창이던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집 근처 교회에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유독 나를 괴롭혀온 것은 “왜 내게는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지 아니하시는가? 왜 주님이 말씀하는 소리를 나는 직접 들을 수 없는가?”라는 다소 생뚱맞은 질문이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예언서에는 마치 일상처럼 수시로 말씀하시고 답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데, 왜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뵐 수 없는가? 절박하게 찾고 부르짖어도 묵묵히 입 다물고 계신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골방 기도실에서 오랜 시간 씨름하며 기도해보고, 전쟁 직후 유독 흔하게 열렸던 부흥집회를 찾아다니며 ‘방언과 입신’의 현장을 자주 목도했지만, 여전히 내게는 입 다무신 하나님, 응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기억뿐이다.
이 질문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갖는 공통된 경험일 것이다. 특히 절망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그 지점에 이르면 자연스레 던져지는 울부짖음이다. 하나님의 도움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할 때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영국의 작가이면서 목사인 피트 그리그(P. Grieg)는 이 문제를 다룬 책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2007년에 출판했다. 이 책은 이 땅에서의 예수의 마지막 나흘 동안을 예로 들면서, 당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맞을 때까지 응답하지 않던 하나님이 부활의 아침이 되어서야 드디어 침묵을 깨신다고 말한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자 했다는데, 구입할 수 없어 아직 읽지는 못했다.
오랜 동안 많은 사람들이 고민해온 이 엄청난 신학의 문제를 오늘의 성서일과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직면하게 된다. 하나님의 법궤 옆에서 잠자던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나이든 제사장 엘리에게는 입 다물고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왜 하나님은 어린 사무엘에게는 나타나 말씀하시고, ‘주의 종’ 제사장 엘리에게는 나타나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물론 그 이유는 삼상 2:27절 이하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님보다 자식들을 더 소중이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모습을 책망하는 주의 사자(하나님의 사람)의 저주를 이미 듣고 알게 된다. 불행하게도 삼상 8장 이하에서 우리는 사무엘이 늙어서 자기의 아들들을 사사로 세웠지만 그들 역시 “아버지의 길을 따라 살지 않고, 돈벌이에만 정신이 팔려 뇌물을 받고서 치우치게 재판을 하였다.”고 불평하는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엘리나 사무엘의 경우를 통해 자식을 바르게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가를 생각나게 하는 부분이다.
아무튼 우리는 아브라함이나, 모세, 그리고 사무엘처럼 이름을 부르시면서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때로는 입 다물고, 침묵하시는 경우를 더 많이 만나게 된다.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과 시험이 닥쳐오는 현장에서 절규하는 소리를 들으려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침묵은 오랜 세월 수없이 제기된 질문이다. 하나님은 왜 입 다물고 계시는가? 왜 침묵하시는가? 왜 말씀을 멈추신 것인가?
젊은 시절 많은 사람들이 읽은 경험이 있는 일본작가 엔도슈샤꾸(遠藤周作)의 대표작 『침묵』의 스토리를 떠올려 본다. 우리들의 감당키 어려운 삶의 순간순간에, 특히 버텨내기 어려운 고통과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있을 때, 왜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하시는가? 오랜 신학의 문제를 작가의 필법으로 그려낸 이 책을 처음 읽었던 50년 전, 엄혹한 시절과 베트남 전쟁의 불가사의한 상황이 겹쳐서 더 오래도록 내 기억창고에 남아있는 이야기들이다. 전지전능한 ‘아버지 하나님’ 모습이 아니라, 생명까지 내어주며 인내하는 ‘어머니 하나님’을 드러내고, 불러내고 싶었던 작가의 의도에 상당부분 동의했던 기억이다. 침묵하는 하나님에 대한 질문은 나로 하여금 J. Moltmann의 신학적 질문으로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
부활신앙을 근거로 한 ‘희망의 신학’을 논해온 몰트만이 왜 ‘십자가의 신학’을 논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Der gekreuzigte Gott)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잠시 드려다 보고 싶다. 본인 스스로가 가시철조망 속에 사로잡힌 전쟁포로의 한 사람으로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신학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었던 질문의 답이기도 하다.
그는 묻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계신 하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 십자가의 신학을 전개시켜 나가면서 나는 개인의 구원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이것을 넘어서 인간의 해방에 관하여 질문하며, 이 사회의 악순환적 현실에 대한 관계에 대하여 질문하고자 한다. 추방을 당하고 하나님의 자유로 부활하신 사람의 아들의 면전에서 누가 과연 참된 인간인가?” 『희망의 신학』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부활’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면,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는 부활하신 그분의 ‘십자가’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 관점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미래가 이 세계의 수난의 역사로 ‘구체화’(Inkarnation)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1970년대 하나님의 죽음의 신학과 그에 대한 많은 논쟁에서 우리가 붙잡고 따라가게 하는 신학적 관심은 여전히 루터가 사용하였던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과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우리의 일상의 삶속에서 어떻게 고백하느냐의 문제로 연결되어 온다는 생각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일상으로 겪는 수난과 고통, 절망은 희망의 미래를 위한 담보라고 이해해도 될 것인가? 빌립보서 2장과 관련한 몰트만의 표현대로라면,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인간의 제한되고 유한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신다. 그는 이 속으로 들어가실 뿐만 아니라 이 상황과 관계하며, 또한 이것을 수납하고 모든 인간적 현존재를 자기의 존재로써 포용하신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살아남은 E. Wiesel의 자전적 소설 『밤』(Night)’이 다시 떠오른다. 『밤』은 『새벽』과 『낮』 의 이름으로 발표한 연작 중의 하나이다. 나무위에 매달려 처형당하는 젊은이와 함께 목매에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침묵하는 하나님을 불러낸 그의 책 말미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이 더 처절하게 읽혀진다.
“자유인이 되어 우리가 맨 먼저 한 짓거리는 식량에 덤벼드는 일이었다. 이 짓 말고는 생각할 것이 없었다. 복수에 대해서도 양친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빵에 대해서만, 배를 채우고 나서도 복수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는 없었다. ···생사를 헤매던 끝에 간신히 일어난 나는 벽에 걸려있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게토이후 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울 밑바닥으로부터 시체하나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내 눈 속 그 시체의 눈동자는 그날 이후 한 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고통과 절망의 현장과 그 것을 벗어난 일상에서의 사람들의 태연함과 무상함이 더 깊은 충격을 주었던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과 함께 2014년 4월 16일 세월 호와 함께 희생된 304명의 고귀한 생명들, 그 처절한 현장에 함께 죽어간 하나님을 다시 드러내, 말하고 싶고 논하고 싶다.
3. 두 가지 문제를 더 들여다보고 싶다.
○ 하나의 관심은 왜 하나님은 나에게, 우리에게는 말씀하지 않으시는가?, 입 다문 하나님, 침묵하는 하나님 – 특히 사람들의 고귀한 생명이 무참히 살육되거나 죽어간 그 현장에 침묵하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 절망을 토로하고 싶다. 얼마 전 5.18을 보내고, 그리고 얼마 후 맞게 될 6.25를 앞두고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사라져간 그 수많은 넋의 값어치는 누가, 어떻게 메길 수 있는가?
○ 또 하나의 관심과 제기된 문제는 말씀을 들으려는 나, 침묵하고 계신 하나님의 상대인 나는, 우리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아니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을 입 다무시게 한 나는 과연 누구며, 어떤 사람인가?
삼상 3:21 “주님께서는 실로에서 계속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 거기에서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사무엘과 엘리의 사례에서 직면하는 질문, 하나님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어린 사무엘과, 이미 뒷방 존재가 되어 하나님과는 너무도 먼 거리에 떨어져있는 엘리는 어떤 존재이며, 또 누구인가? 우리는 어린 사무엘 같은 존재인가, 아니면 엘리와 같은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을 침묵케 한 나는, 우리는 누구인가?
- 강 아무개, 김 아무개, 그런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과연 난가? 누구의 아들 딸, 누구의 아버지 어머니, 내 옆집 사람, 내 직장 동료, 마음씨 좋은 아저씨, 아주머니, 구두쇠, 짠돌이, 놀기 좋아하고 먹기 좋아하는 사람 등
- 교수, 목사, 박사, 장사꾼, 농부처럼 직업으로 불리는 나는 과연 내가 맞는가?
F. Kluckhohn은 사람의 집단과 거기에 따른 문화유형을 5가지로 구분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 자신의 모습과 투영해보면 과연 내가누구인지를 다소라도 이해하게 될 것 같다.
첫째,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어떤 것인가? 본래 선한가? 아니면 악한가? 그렇지 않으면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한 것인가?
둘째, 인간과 자연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자연에 예속되어 사는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가? 자연을 다스리며 사는가?
셋째, 인간의 시간적 관점은 어떠한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시간 중에서 어떤 것에 중점을 두고 살아가는가?
넷째, 인간의 활동 및 행동 양식은 어떠한가? 주어진 존재에 머물러 사는가? 주어진 존재를 수용하면서도 다소의 변화를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기존의 형편에 머물지 않고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가?
다섯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사는가? 수직적인 직계를 중시하는가? 수평적인 방계를 중시하는가? 아니면 개인주의적으로 살아가는가?
말씀을 들으며 살아가는 존재로서 과연 나는 어떤 인간인가를 질문하는 시간을 지속적으로 가질 필요를 제기해 본다.
○ 침묵하는 하나님과 전쟁의 기억들
- 현충일을 앞둔 국립묘지 참배 – 5명의 동기생 묘소, 수십 명의 옛 전우와 부하들, 5,000여명의 전사자들. 현재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는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산화한 무명용사 11만 명, 유명용사 5만 명의 위폐가 모셔져 있다.
- 휴전(1953년 7월 27일) 65년을 맞아 한반도를 둘러싸고 며칠 사이에 벌어지는 일련의 세계사적 변화의 조짐이 여러 생각을 이어가게 한다. 사실 휴전은 ‘군사행동의 일시적 중지’를 의미하는 군사적 조치로 영어의 armistice는 일단 정전(cease-fire) 조치를 한 것뿐인데, 마치 전쟁이 끝난 상황으로 오해하면서 살아왔던 것이 놀랍다. 70년이 지나서야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을 이야기하는 현실, 무감각하게 살아온 날들이 더 무겁게 다가오는 것을 새삼 경험한다.
○ 6.25 전쟁과 베트남전의 희생자
* 남한 민간인의 인명피해 : 사망 373,599, 부상 229,625, 납치 84,532, 피난민 240만, 전쟁미망인: 20만, 전쟁고아 10만
* 한국군과 UN군 피해 : 한국군 사망자 58,809, 부상자 178,632, 실종(포로) 82,318, UN군 사망자 36,991, 부상자 115,648, 실종(포로) 6,994
* 북한 피해 : 민간인 사상자 2백만, 북한군 및 중공군 전사자 52만, 북한군 및 중공군 부상자 40만 6천, 기타 90만
● 국가기록원 자료 : 한국군(경찰포함) 63만, 유엔군 15만, 합 78만 명의 전상자
● 북한군 80만, 중공군 123만, 합 203만 명의 전상자
* 베트남 전 피해현황
한국군 전사자 5,099, 부상자 11,232, 미군 전사자 6만 여, 남베트남군 22만 4천여 북베트남(베트콩 등) 측(추정) 110만
이처럼 엄청난 희생과 죽음을 딛고 서있는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왜 우리는 하나님에게 따지지 못하는가? 대답이 없으시면 물어보고 또 물어보아야 하겠다. 예레미야 12장 1절처럼, “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 이 땅이 언제까지 슬퍼하며, 들녘의 모든 풀이 말라 죽어야 합니까?”
환난과 처절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시편의 절규들 중 102편을 읽어본다.
“주님,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 부르짖음이 주님께 이르게 해주십시오. 내가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의 얼굴을 숨기지 마십시오. 내게 주님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내가 부르짖을 때에, 속히 응답하여 주십시오. 아, 내 날은 연기처럼 사라지고, 내 뼈는 화로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내 마음은 풀처럼 시들어서, 말라 버렸습니다. 신음하다 지쳐서, 나는 뼈와 살이 달라붙었습니다. ··· 내가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습니다. 나는 재를 밥처럼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습니다. 주님께서 저주와 진노로 나를 들어서 던지시니, 내 사는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으며, 말라가는 풀과 같습니다.”
D. Bonhoeffer의 “종교적 행위가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삶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고통에 참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을 만든다.”는 말을 묵상케 한다.
4. 나오는 말
칼 바르트의 윤리신학을 정리한 M. Leyden의 2016년 발간한 책 제목은 『칼 바르트 : 말씀하시는 하나님, 응답하는 인간』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 오늘의 성서일과와 예레미야 애가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직면하는 삶의 현장에서 직접 말씀하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여전히 입 다물고 계시다면, 더 처절하게 떼쓰고, 절규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우리가 오늘도 서 있다.
예레미야 31: 15~17 “나 주가 말한다. 라마에서 슬픈 소리가 들린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둘린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울고 있다. 자식들이 없어졌으니, 위로를 받기조차 거절하는구나. 나 주가 말한다. 이제는 울음소리도 그치고, 네 눈에서 눈물도 거두어라. 네가 수고한 보람이 있어서, 네 아들딸들이 적국에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너의 앞날에는 희망이 있다. 네 아들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나 주의 말이다.”
성령강림절 새로운 소통의 언어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
창세기 11:7이하 “그들이 거기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 주님께서 거기에서 온 세상 사람들의 말을 뒤섞으셨다고 하여, 사람들이 그 곳의 이름을 바벨이라고 한다.” 말을 섞어서 불통케 하신 하나님이, 오순절 사건을 통해 방언의 소통이라는 ‘새로운 말’로 다가오는 주님을 맞고 싶다. 소통의 수단인 말을 불통의 수단으로 바꾸신 바벨의 하나님이, 이제 다시 불통을 소통으로 바꾸신 오순절의 하나님으로 돌아오시는 경험 – 성령강림 절기를 보내는 우리의 과제이다.
■ 강대인 교수는 미디어시민 모임 이사장(현)으로 방송위원장, 한국방송학회장을 역임했으며 건국대 언론정보대학원장, 계명대 사회과학대 학장 등을 지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6월 3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