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새로운 인종의 탄생이라는 전대미문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고 빠르면 2-30년 안에 현실로 벌어질지 모릅니다, 인공지능(AI)의 발전으로 만들어 내는 로봇(Robot)과 같이 기계적인 대체인간 시대가 온다는 이야기들은 공상과학이 아닙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 Dan Brown의 최신작 'Origin' 등은 이런 시대적 현실을 앞둔 작품들입니다.
여기에 인간이 인간 자신에 대해서 심각하게 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나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현존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생명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인간의 가치는 어디에 있는가?
날로 발전하는 AI. 그리고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과 감정을 가진 Robot이 등장하는 날도 멀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렇게 다가오는 시대의 인간과 그 가치를 지금의 그것으로 감당할 수 없어서 Post-human과 post-humanism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 post-human이 인간인지, 기계인지 또는 초월적 인간인지, 반은 인간이고 반은 기계인지, 아니면 반신반인(半神伴人)의 인간인지 아니면 이런 것들을 모두 포함하는 새로운 인종의 그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post-human시대에 종교는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여전히 그때도 그런 새로운 종의 인간도 종교를 필요로 할는지 지금으로서는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오늘 이런 시대에도 인간은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어떻게 잴까? 하는 질문을 해 봅니다.
오늘 이 지구상에 있는 생명체들은 그 존재자체를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 풍조 안에서 인간의 가치를 묻는다는 것은 사치스럽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중 하나는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존재가치를 상실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인간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질문이 매우 공허하고 뜬금없이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러한 때이기에 더욱 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가치란 무엇인가?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재나? 하는 문제는 더욱 근본적이고 실존적으로 다가옵니다.
지금은 생명의 존재가치를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교회 안에서조차도 인간의 생명의 존재가치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죄스럽지만 교회 안에서 조차도 인간의 존재와 가치는 목회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조차도 인간 생명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면서 각각 다른 존재로 취급되는 신분제도가 제도적으로는 사라졌지만 현실적으로는 여전히 다른 형태로 신분제도 아닌 신분제도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인권은 만인에게 공평하다고 하지만 인간에 대한 차이는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흔히 법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고 합니다. 법원에 가면 눈을 감은 여신이 저울을 들고 있습니다. 그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습니다.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지금 어느 누가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믿고 있습니까?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이 그냥 생겨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현대는 돈이 모든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었습니다. 돈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은 이래서 나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본주의가 극도에 이른 지금은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가치조차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가진 자가 목소리도 크고 힘도 셉니다. '갑질'도 따지고 보면 돈의 '갑질'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극단적인 물신(物神)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차별을 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나의 가치와 다른 사람과 달라진 사회가 재는 나의 가치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의 가치는 다릅니다. 어떤 기준을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재느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집니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사라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도토리 키 재기 하듯이 인간의 가치, 서로의 가치를 나누고 재고, 판단하고 차별하는 일들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자신의 가치를 재는 기준은 다르지만 그 모두는 "비교"하면서 이루어집니다.
이런 시점에서 함께 물어 봅니다.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의 가치를 무엇으로 재는가?
우리가 오늘 함께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가진 것, 권력과 지위, 지식과 배경, 모습과 재능 등등...아니면 조금 고상하게 영혼, 마음, 심장, 내면적인 가치로 재나?
되풀이 되지만 현대는 모든 가치는 돈으로 환산됩니다. 돈이 되는 것은 가치가 있고, 돈이 안 되는 것은 가치가 없습니다.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 간의 결탁과 반목이 되풀이 되지만 현대는 경제 권력이 있어야 정치권력도 차지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사는 곳에 정치가 없을 수는 없지만 종교 권력조차도 경제 권력이 있어야 되는 슬프고 부끄러운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종교 안에서도 가장 신령하다고 자부하는 종교인들의 세계에서 조차 돈으로 모든 것의 가치가 결정되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때에 무엇으로 인간의 가치를 재나? 하는 질문은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또 묻습니다. 나는 무슨 잣대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재나?
무슨 기준, 무슨 저울, 무슨 척도를 가지고......나는 무엇을 가지고 인간을 재나?
세상에는 이런 저런 인간의 가치를 재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인간의 가치, 나의 참된 가치를 공평무사하게 재고 다는 저울은 무엇일까요?
세상에 그런 공평무사한 저울이 있을까요?
시인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ölderlin)은 이 땅위에서는 인간을 재는 척도, 인간의 가치를 재는 공평무사한 척도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시인(Hölderlin) 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
인간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을
신성(神性)에 의해 가늠한다. 신은 미지(未知)의 존재자인가?
신은 하늘처럼 드러나 있는가?
그렇다고 나는 차라리 믿는다. 인간의 척도란 그런 것.
많은 공적, 그러나 인간은 이 땅위에서
시적으로 거주한다...
(Voll Verdienst, dich terisch, wohnet
Dear Mensch auf dieser Erde.)
...대지위에 척도가 있는가? 아무런 척도도 없다.(하이데거, 신상희 역, 강연과 논문 p.253)
혹시 시인의 말이 틀렸을까요?
나 자신이 나의 가치를 재든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가치를 재는 공평무사한 척도, 비교하지 않고 재는 그런 척도는 이 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대신에 시인은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는 인간이 만들어 내는 그 무엇이나, 인간이 최고로 여기는 가치가 아니라 '신성(神性)'에 있다고 노래합니다.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는가, 어떤 권력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잴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이 가진 여러 가지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 자체는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시인이 노래하는 인간은 이 땅위에서 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시인이 무슨 위대한 힘이 있어서 큰 업적과 공적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시인은 시적으로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왜 휠덜린은 "이 땅위에서는 인간을 재는 척도는 없다."라고 한마디로 잘라서 말할까요?
이 시인이 성경을 잘 몰라서 그럴까요?
휠덜린은 Hegel과 Schiler와 더불어 튀빙엔 대학의 세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신학부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왜 시인은 이렇게 까지 단호할까요?
세상에는 인간의 가치를 가늠하는 척도들은 많이 있습니다. 만인 앞에 공평하다고 하는 수많은 법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 휠덜린은 '마우런 척도/저울'가 없다고 할까요?
또 다른 대답은 간단합니다. 인간이 인간의 가치나 유죄, 무죄를 가늠하는 척도는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시인은 알았습니다.
시인은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을 신성(神性)에 의해 가늠한다."
불행하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를 가늠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의 척도는 불공평하다는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세상과 인간이 아무리 변해도 그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의 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말 2:17)"하고 울부짖고 있습니다. 인간이 빚어내는 부정과 부패가 얼마나 심했으면 이렇게 울부짖었겠습니까?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법이라는 척도 앞에서 무참하게 스러져 갔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인간들이 만든 척도에 의해서 난도질을 당해 왔습니까?
그들의 인격뿐 아니라 그들의 몸 그리고 나아가 생명까지도 비참하게 쓰러지고 말지 않았습니까?
적자생존의 법칙이 스며들지 않은 구석이 어디에 남아 있던가요? 이렇게 인간이 인간을 가늠하는 척도는 불공평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아무런 척도도 없다'고 울부짖습니다.
'이 땅위, 인간이 사는 그 어느 곳에서도 그 어느 공평한 척도라는 것이라도 공평하지 않아서 불행하다고 선언합니다.
세상은 세상 나름대로 인간의 가치로 잽니다. 한 마디로 인간은 권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잽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무슨 권력을 가졌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런 것은 오늘 민주주의 시대에도 권력의 속성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에도 종류가 많습니다.
나는 아무 지위가 없으니 권력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남자가 되었다고 행세하는 권력문제로 온 나라, 각계각층이 부끄럽게 소용돌이 치고 있지 않습니까?
권력은 돈으로 환산됩니다. 그 소유가 인간의 가치를 잽니다.
종교권력으로 인간의 가치를 잽니다. 교회에서도 돈이 하나님 노릇을 한다고 우리는 한탄합니다. 종교권력이 이렇게 타락하면 구제할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갖가지 권력들이 인간의 가치를 잽니다.
외모를 가지고 인간의 가치를 잽니다, 성형수술이 가장 많이 유행하는 우리나라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인간의 가치를 재는 방법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시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험들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 저울, 자는 이 땅위에 없다고 합니다.
대신에 인간의 본질과 가치를 재는 궁극적인 척도는 하나님의 손길에 놓여 있다고 선언합니다. 시인은 불행 중 다행으로 인간은 신성에 따라서 가치를 잰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나름의 능력과 가치를 지니고 나름의 일을 하면서 남보다 나은 공적을 이루며 살고 있으며, 그것을 자랑스러워하며 오래 오래 기억되고 남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룬 공적이란 것은 혼자만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너무 작아서 공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들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자랑하는 것에는 아무리 그럴듯한 이유와 핑계를 대도 한 꺼풀 벗겨보면 거기엔 온갖 부정과 불의한 방법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떤 인간의 공적은 위대한 것으로 영웅시 됩니다.
어떤 인간은 세상의 가난과 질병을 건지는 둘도 없는 구세주 같은 인물로 평가받고 추앙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보이는 돈과 권력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구세주로, 어떤 인간은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어떤 인간은 지혜로운 인류의 스승으로, 어떤 인간은 거룩한 성자로 평가받고 추앙 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위대한 공적을 세운 위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이 세운 공적으로 재고 있지만, 그러나 시인은 모든 인간의 가치와 공적은 하나님의 신성에 따라 재어야 한다고 선언합니다.
거기에는 예외는 없습니다. 임금과 같은 인간이라도 말입니다. 비록 현실에서는 아무도 그 가치와 공적을 잴 수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가치와 공적을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잽니다. 그것도 공평무사하게 말입니다. 지금은 이것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또 성직자라는 사람들 속에도 있습니다.
오늘 다니엘서에 나오는 환상은 인간의 가치는 무엇으로 재나? 하는 질문에 대한 가장 적절한 해답입니다.
이 땅위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재는 공평무사한 저울, 잣대, 기준, 척도는 없습니다. 있어도 다른 인간의 가치와 공적을 제멋대로 올리고 내리는 절대 권력을 가진 임금을 거기에 올려서 그 가치를 잴 수 있습니까? 군왕무치(君王無恥)란 말은 이런 형편에 알맞은 표현입니다.
세상의 저울, 인간의 저울로는 임금의 가치를 잴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저울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다니엘은 비록 포로의 신세가 되었지만 인간의 가치를 재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비록 절대 군주라도 하나님이 그 가치와 공적을 재신다고 믿었습니다.
현실은 이것이 아닙니다. 전쟁에 져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이 승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은 할 수 있어도 승자인 절대 권력자 앞에서 말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좋은 말을 하고 책임을 묻지 않는다고 해도 종족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관습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종교도 다르고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그래도 어느 누구하나 변호해 줄 수 없는 외국 땅에서 승자인 당신도 하나님의 저울대에 달아서 그 가치와 공적이 모자란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복자의 권력은 피정복자들에게는 언제나 하나같이 잔인하고 무법이고 절대적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이나 동양의 제국이나 현재의 제국이나 그 속성은 같습니다.
누가 있어 이들의 부당함과 싸우겠습니까? 누가 있어 이들의 부정함을 고발하겠습니까?
누가 있어 이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없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패배자에게는 그런 것들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저울만이 만인에게 공평무사합니다.
정복자는 피정복자를 동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조롱합니다.
정복자는 땅만 정복하지 않고 사람을 정복합니다. 그 마음, 그 정신, 그 문화, 그 신앙도 정복합니다.
정복자는 인간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인간의 가치를 그 인간의 고유 가치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소유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존엄과 가치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오직 정복자 자신뿐입니다.
그러니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이것은 절대 권력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정복자의 위대한 공적입니다. 온 세상의 칭송을 받습니다. 기념비를 세우고 동상을 세우고 기록하고 기려서 영원히 기억되고 추앙받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정복자의 공적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진동시킵니다. 이런 정복자의 눈에는 뵈는 게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정복자의 공적과 가치를 하나님의 저울대에 올려서 잽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십니다. 인간의 생명의 가치, 그 존재의 가치는 하나님의 저울대에서 결정됩니다.
시인은 인간의 가치와 공적은 시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모두가 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은 하늘 아래서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우며 사는 것입니다. 그 하늘 아래에는 모든 것이 들어갑니다.
그래서 모든 생명은 서로에게 겸손하며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며 삽니다. 땅 위에 산다는 것은 인간이 제아무리 오래 살고 모든 것을 가졌고 위대한 공적을 가졌어도, 시간과 더불어 사라져 간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땅 위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땅 위에서 가치 있는 것은 영원히 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진 것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가치 있는 것이 다음에는 무가치하고 지금 생명 있는 것은 다음에 죽고 없어집니다.
'시적으로 산다'는 것은 가치 있는 삶입니다. 우리의 이웃들을 이렇게 살도록 부르며 사는 사람이 진정한 시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들이 인류의 표상으로 부러워하고, 또 나도 그런 인물이 되기를 바라고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낙오자로 전락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것도 남길만한 것이 없는 문자 그대로 무영의 민초들이요 위대한 사람들에 비해서 인간 실패자, 낙오자, 청소의 대상으로 취급할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위대한 공적을 세우고 위대한 이름을 남기고 위대한 인물로 이 땅에서 오래도록 기억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참다운 가치는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가치는 하나님의 저울대에 달아서 모자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와 공적도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저울, 하나님의 손길에 달린 것입니다.
존재감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간의 참된 가치를 재는 일은 사람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더욱 힘써 전파할 때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생명과 존재에 대한 경외와 그가 무엇을 가졌느냐,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남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시적으로 사는 것'에 있음을 전파할 때입니다.
우리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와 공적은 하나님께서 재신 다는 것을 힘써 전파할 때입니다.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하게 하늘 아래에서, 그리고 땅 위에서 살고, 우리의 궁극적인 가치는 하나님의 저울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믿고 겸손하게 살기를 기도합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5월 6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