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최근 제68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한 가운데, 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가 "다아트"(말2:7)란 제목으로 경건회 설교를 전했다.
제사장의 입술에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지식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아트’이다. 여주봉 목사는 "다아트는 단순히 성경적인 지식이 아니며, 주님 알기를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 전했다. 다음은 여주봉 목사의 설교 전문이다.
제목: 다아트
본문: 말 2:7
설교: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말2:7)
구약 시대에 율법을 연구해서 율법에서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그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것은 제사장들의 몫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오늘날 설교자들과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약시대는 모든 성도가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이 구절은 모든 성도들에게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제사장의 입술에는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 지식이라는 단어가 히브리어로 ‘다아트’입니다.
1. 다아트는 단순히 성경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우선 ‘다아트’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지식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래서 말라기 2:7도 ‘다아트’를 율법과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아트’는 단순히 성경적인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일한 단어가 호세아 4:1과 4:6에 나오는데, 그 구절에 대한 페트라 주석이 그 의미를 매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호세아 4:1, 6은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 즉 ‘다아트’가 없어 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호 4:1).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 4:6).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다아트’를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성경적인 지식으로 잘못 이해했기 때문에, 자기들은 호세아 시대의 그들 조상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성경적인 지식은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까지 그들이 하는 말은 반드시 다 지키고 행하라고 명령하실 만큼 정통적이었습니다(마 23:2-3).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다아트’는 단순히 하나님에 관한 성경적인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다아트’가 없어 멸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반복적으로 그들이 이사야 시대와 같다고 말씀하셨고(마 13:13-14, 15:7-9), 호세아 시대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9:13, 12:7).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심판을 말씀하셨고, 그들의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서 나라가 망했습니다.
‘다아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토대하되, 하나님과 친밀하게 동행하는 삶을 통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합니다. 페트라 주석은 호세아 4:1, 6에 대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다아트'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에서 얻게 되는 체험적 지식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이루어진다.”(1절에 대한 주석)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당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다아트’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1절)이 없어서였다. 이 지식은 제사장들에 의해서 율법을 통하여 백성들에게 전해지는 것이었다(신 31:9-13; 33:10; 말 2:7). 하나님의 계획과 경륜이 바로 율법에 기록되었기 때문에(신 30:15,16) 이스라엘 백성이 지식이 없는 것은 율법을 마땅히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의 책임이었다.”(6절에 대한 주석)
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는 갈라디아서 2:20을 잘 압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이 구절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교회사에 나오는 수많은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도 잘 압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말은 로마서 6장이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과 연합되는 것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실 때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가 영적으로 새로운 피조물로서 예수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는 에베소서 2장에서도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잘 압니다. 또한 우리는 이 삶이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도 잘 압니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를 위한 바울의 기도에서도 그 사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엡 3:16-17).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성경적인 지식 혹은 교리적인 지식입니다. 그것들이 ‘다아트’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삶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그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한 핵심입니다. 당연히 그 삶을 살려면 방금 살펴본 성경적인 지식들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다아트’는 성경에 기초한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 삶을 살려고 하면 방금 살펴본 그 성경적인 지식만 가지고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기서 말하는 믿음은 무엇인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 승리의 실제를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지 등 그 삶을 살기 위해 기도하고, 성경을 다시 연구하고, 앞서 간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배우면서 주님을 간절히 찾고 주님의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그 삶을 살 수 있는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실제로 그 삶을 사는 것에서 하나하나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그 삶을 위한 실제적인 지식이 성경이 말하는 지식 곧 ‘다아트’입니다.
‘다아트’는 단순한 교리적인 지식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나온 실제적이고 체험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반드시 삶이 동반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그 ‘다아트’가 없으면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잘 볼 수 있는 것처럼 성경적인 지식은 뛰어나고, 교리적인 면에 있어서는 정통일지 몰라도, 그 삶은 혹은 그 행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더 매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다아트’를 가진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그 삶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2:20의 삶을 실제로 사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제로 그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교리적인 지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삶을 살도록 인도할 수는 없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는 자기가 가보지 않은 곳으로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단순한 신학적인 지식은 그 삶을 살려고 힘쓰는 사람들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더들에게는 ‘다아트’는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2장에서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사자이기 때문에 그들의 입술에는 지식, 즉 ‘다아트’가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 입으로부터 율법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은 오늘날에도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리더들의 입술에는 ‘다아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입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하나님의 길을 배워 그 길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주님을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아트’를 위해서는 하나님(예수님)을 알기를 추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 그래서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을 알기를 추구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이고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목표와 목적이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입니다. 모세, 다윗, 바울 등 성경에 나오는 귀한 사람들은 다 그랬습니다.
한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그의 평생 동안 유일한 소망과 목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여기서 “너희 중에서”라는 말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었을 때를 말합니다. 그는 2차 전도여행에 고린도에 18개월 가량 머물렀습니다. 그 당시 바울 앞에는 전 세계가 열려져 가고 있습니다. 그 상황에서도 사도 바울의 유일한 목표는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그의 사역의 후기에 쓰여진 옥중서신입니다. 그것을 보면 그의 평생 동안 단 하나의 유일한 열망이 주님을 아는 것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되, 그렇게 주님을 알기 원하는 것 중 하나는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승리와 능력을 삶에서 실제적으로 알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0-12). 당연히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단순히 교리적으로 더 알기 원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그 승리와 능력의 실제를 삶에서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알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의 한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다시 고린도전서 2:2으로 돌아옵니다. 사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에서부터 예수님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전 1:17).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2:2에서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전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 했어야 앞뒤가 맞습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잘 연결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갑자기 말을 바꿉니다. 그런데 그것이 핵심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인격체이신 예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에 관한 몇 가지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을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아는 만큼 그분을 전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아트’가 있는 사람이라야 다른 사람을 그리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다아트’,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 편으로 성경적인 지식이 어느 때보다 범람합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그 지식은 정통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 편으로 우리는 참으로 “지식”, 즉 ‘다아트’가 없어 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하고 있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말씀, 말씀‘만 외쳐댑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음으로 설교를 마칩니다.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말 2:7).
/글=기독교학술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