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주 설교]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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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 민수기 21장 4-9절, 에베소서 2장 1절-10절, 요한복음 3장 14-21절
前 NCCK 총무, 現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기독일보DB

저는 오늘 봉독한 성경을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째는 사순절의 한복판인 이 사순절 넷 째 주일에, 성서일과는 하필이면 왜 이 구절을 배치했을까하는 문제입니다.

공관복음에는 사순절 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배치하면서 사순절의 의미를 잘 정리하고 있지만, 요한복음만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태, 누가 복음은 처음에 예수의 족보를 설명하는 것부터 시작하지만, 요한복음은 이와는 달리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예수님이 계셨다는 말씀부터 시작합니다.(요 1:2-5)" 좀 더 설명하면 공관복음은 인간의 모습이신 예수께서 어떻게 하나님이 되었는가를 변증하고 있지만, 요한복음은 이런 변증적 설명 없이 예수님께서 직접 내가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어 요한복음 2장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여하신 뒤 십자가 사건의 직접적 계기가 되는 성전 정화를 행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이 없는 요한복음을 왜 사순절 한복판에 본문으로 배치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두 번째는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미투(# Me Too)운동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또 이 문제를 성경 말씀과는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얻은 결과는 이렇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던 한국사에서 암울했던 시절의 한 이야기,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인권을 무시했던 보안사에 끌려갔던 청년의 이야기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그 청년에게 회유와 협박을 합니다. "우리에게 협조를 하면 궁핍한 집안 살림도 도와주고, 유학도 보내 줄 테니 우리의 프락치가 되라. 그렇지 않다면 너 하나 없애서 처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잘 선택하라." 지금이야 어이없는 짓이지만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당시는 권력기관의 일은 불법도 정당화되던 시절입니다.

고민하던 이 청년은 NCCK를 찾아 양심선언을 결심합니다. 당시 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이었던 제 입장에서는 찾아온 청년의 말을 고스란히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혹시 보안사의 역공작일수도 있다는 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믿을 만한 사람들과 2-3일 함께 지내면서 진위여부를 파악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관찰결과 이 청년의 결심은 진정인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후일담이지만 이런 결심을 했던 청년은 죽을 용기를 내어 NCC를 찾아 갔는데, NCC가 자신의 진정성을 의심하더라고 말합니다. 저는 당시의 불법적인 정치권력에 대한 고발과정을 보면서 최근의 미투 운동과 견주어 봤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서 고발하고 있는 여성, 그 여성은 자신의 미래에 어떤 희망을 걸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참 답답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투에 참여하는 여성의 참담한 감정을 생각하면서도, '나는 농담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나 역시 다른 여성에게 피해를 준 일은 없었을까' 하는 자기검열도 일어납니다. 혹시 내가 여성들에게 성차별적인 폄하 발언은 하지 않았는지? 남자는 보따리도 들지 않아야 한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생각이 고스란히 남아서, 여성에게 말은 근사하게 하지만 은근히 남성 우월감을 드러내지는 않았을까?

미투 운동에 대한 논쟁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이 모두 진보적 인사들인 점에 비추어 기획설이 퍼지기도하고, 지목된 어떤 사람들은 억울해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Me too) 민중들이 촛불로 권력을 무너뜨렸듯이, 기존에 용인되어 온 불공평한 사회를 다시금 한 번 더 바꾸자는 촛불이다. 즉 얼들의 반란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면서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 스스로도 삼가 조심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성경으로 다시 돌아가면 이렇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백성의 출 애굽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들 출 애굽 초기에는 마른 빵도 먹고, 무교병도 먹고, 허리에 띠를 두르고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희망도 넘칩니다. 그러나 점차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됩니다. 애돔 왕이 막아서고, 가다 보니 먹을 것도 떨어지고, 춥고 뜨거운 광야생활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이 대목을 민수기는 우리 그 때는(애굽에서는) 먹을 것도 있었고 배는 굶지 않지 않았다. 여기 와보니 고통의 길인데, 이 길이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민 21:5) . 또 그 원망하던 사람들이 뱀에 물려 죽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청동뱀으로 구원해 주십니다(민 21:6-9).

그러나 이 말씀에 대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크다'고 합니다. 불평하다가 뱀에 물려 죽은 백성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 사랑이 크다고 표현합니다.(시 107:17-22)

서신서의 에베소 사람들은 또 이렇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이방인들과 이방인 아닌 사람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때문에 교회 내에서 종족 간에 갈등이 생긴 듯합니다. 종족의 차이, 신앙 때문에 교회가 나뉘자 바울선생은 하나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에베소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렇습니다.

난 이방인이었고 율법도 몰랐고 아무 것도 몰랐는데,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

그랬더니 이제는 날더러 유대 율법도 배우라고 한다. 예수를 믿기 위해서 유대율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말이냐는 것입니다.

이런 갈등 속에 바울은, "너희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율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크신 사랑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마련해 주신대로 선한 생활을 하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하신 작품이 바로 여러분들입니다.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입니다." 이렇게 멋지게 표현합니다.

(너희들이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니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다).

또 요3:16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렇게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또 올바른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의 발걸음이 때로 주춤거리고 힘들 때에도, 이것은 너희들이 하는 일이고 너희들의 의지로 이뤄진 것 아니라 하늘의 뜻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광화문에서 큰 시위가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2주년을 기념(?)하면서, 이른바 태극기 부대들이 "(그 동안)달라진게 뭐냐. 여전히 똑같지 않냐? 너희들이 대통령도 탄핵하고 난리 피웠는데 뭐가 달라졌는가?" 라고 하는 주장을 폅니다.

이처럼 과거를 회상하며, 그 과거를 아름답게 꾸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 생활의 고달픔 때문에 미래로 가는 길을 머뭇거리면서, "아! 애굽에 사는 동안 비록 자유는 없었지만, 그래도 기름진 고기도 있었고, 포도주도 있었다. 그때 우리는 적어도 마른 빵은 먹지 않지 않았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성경 중에 니고데모라는 인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니고데모는 이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일단은 굉장히 상식적이고 능력있는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유명한 선생'이라 표현한 것 보면 바리새파이고, 학식이 높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 당신이 하나님 보내신 사람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네가 거듭나야, 즉 다시 태어나야 날 볼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이다." 공관복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부르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예수님은 의외의 당부를 하십니다. 이처럼 메시아에게는 비밀이 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내가 하나님이다. 왜 나를 보고도 못 믿느냐." 이렇게 직접 말하고 계신 예수님을 향해 니고데모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혹시 "이것 봐라!"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살아있는 사람은 하나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도 못하는 것이 거룩한 전통이라 생각했던 당시입니다. 이 시절에 예수를 보니, 참 멋진 사람 같고,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 보내신 사람인 것 같다고 인정을 했지만, "내가 하나님인데" 너 똑바로 보아라"하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니고데모 입장에서는 그대로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오래 계속됐고, 그 오랫동안 군사독재가 이뤄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입고, 권력을 유지하고, 그 가운데 공부도 많이 하고 학문적으로 잘 정리해 둔 사람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문민세대는 혼란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새로운 세대를 보는 그들의 눈은 어떨까요? 웃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착해 보이기는 한데, 과연 국가 운영을 잘 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의 눈으로 봅니다. 그러나 큰 잘못은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제법하네' 까진 인정할 수 있지만 세상을 확 바꾸는 것은 너무하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특히 '기득권의 입장에서 을들의 작은 반란까지는 조금 양보하겠지만, 그 동안 각인시켜온 기존 질서에 여자들마저 나서서 이렇게 반항을 한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저는 여기까지가 니고데모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여러분도 혹 니고데모의 마음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민수기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해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그러느냐"고 수줍게 묻지 않습니다. 직설적으로 "내가 하나님인데, 내가 왔는데 날 몰라보느냐?" 하고 질책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여인을 향해서 물을 달라고 하는 내가 누군지를 알았으면 벌써 줬을 것이다. 내가 바로 하나님이다. 이처럼 내가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어두움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빛의 세상으로 살라는 교훈을 듣고 있습니다.

이제는 밝은 세상이 올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밝은 세상이 오는데 거역하는 사람들 되지 마시고, 뱀에 물려 나중에 하나님 잘못 했다고 빌지 맙시다. 우리가 낮아질 대로 낮아지고, 여성들의 저런 고통을 진심으로 우리의 아픔으로 여기고, 우리도 그 낮은 자리에 서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세상 구원이 올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잠시나마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던 미투 운동으로 유명 정치인들도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다. 민중들이 촛불을 들었던 것은 정치인들이 잘나서 들어 준 것이 아니다. 소위 진보적 정치인들, 당신네가 잘나서 민중들이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촛불을 들었기에 너희가 그 덕을 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너희가 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진보적 정치인들은 민초들이 촛불을 든 것이 하늘의 거룩한 뜻이었으며, 그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자기 고백을 먼저 해야 한다. 아울러 민중들의 촛불을 자신에게, 정당에 유리하도록 활용하면서 지도자 행세를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도 해석해 봅니다.

어쨌든 촛불 들고 진보적인 사람들이 덕을 많이 봤잖아요? 지도자 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 덕을 봤는데 이 덕을 너희들이 잘해서 그걸 한 것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요3:16 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라 믿으며,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노력하는 신앙인의 자세로 부활의 주님을 맞이하기를 기도합니다.

[기도]

겸손하게 하소서 하나님의 현존 앞에 늘 무릎 꿇게 하시고, 하나님의 뜻, 그 선하신 뜻이 어디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잘 판단하는 빛의 사람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귀한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설교는 지난 2018년 3월 11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사순절 네 번째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

#김영주목사 #미투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