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인터넷과 미디어 기술의 발달로 설교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말씀이 교인의 삶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찾아 읽는 모습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 되었습니다. 내 성경을 내 손으로 펴서 읽으며 주의 음성을 듣고자 했던 모습들은 사라지고, 단지 들려오는 것에 귀만 열어 놓는 편리성의 추구로 퇴화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말씀의 실종은 강단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최근의 설교 비평가들이 지적하는 설교자들의 오류는, 놀랍게도 성경 텍스트를 쉽게 간과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성경 본문을 해석되지 않은 채로 남겨두거나, 자의적 해석에 만족하는 현상에 대해 정용섭 목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하나는 설교자들이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성서 텍스트가 해석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서 텍스트는 실종된 채 설교자의 주관적인 신앙체험이 과잉 생산되며, 성서 텍스트가 다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단지 규범으로만 취급된다.”(정용섭, 2007:5).
지경을 넘고 세대를 넘어 복음전파의 사명을 이루기 위해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크게 말씀 전하기와 듣기, 두 가지 영역에서의 변화가 요청됩니다.
1. 말씀을 어떻게 전하는가?
강단의 증언은 본문의 맥락에 관한 충분한 숙고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진지한 설교자는, 본문이 전하는 본래의 메시지를 이해하기 위한 엄격한 본문 연구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때로 당시의 사회적,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고, 문화적 배경을 참작하기도 합니다.
이 단계의 작업이 간과되거나 소홀히 될 때 말씀의 진의가 쉽게 왜곡될 수 있습니다. 텍스트 중심성은, 특정한 관점과 전제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의미의 왜곡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도록 돕습니다. 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이념의 과잉 시대에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도록 균형을 세워 줍니다.
그런데 강단의 증언이 ‘성경적’이어야 함은 말씀의 증언이 단순히 본문의 일차적 의미에 집중되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말씀의 증언 속에서 그리고 말씀의 증언을 통해, 성경의 세계는 오늘의 세계를 드러내고 오늘의 세계는 성경의 세계를 추체험합니다. 성경의 이야기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서도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과 세상은 서로에게 언제나 낯설기만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세상은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전장(戰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말씀은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바른 말씀을 전하는 이들은 환영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재난 앞에서 경고의 나팔을 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이것이 말씀을 전하는 자의 운명입니다. 말씀의 전달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잘못을 꾸짖고 닥쳐올 파멸을 예고해야 합니다. 미워서가 아닙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눈 속에 갇혀 얼어 죽어가는 사람은 포근한 꿈을 꾼다고 합니다. 포근한 잠에 빠진 그를 깨우면 그는 고통스런 현실과 대면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살 수 있습니다.
한편 말씀의 회복을 위해서는 말씀 전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것에서도 변화가 요구됩니다.
2. 말씀을 어떻게 청종하는가?
말씀을 듣는 것은 곧 하늘에 우리 삶을 비추어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하여 말씀을 받는 사람은 항상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의 뜻을 영접하려는 이들에게 말씀은 강렬한 힘으로 다가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오직 말씀을 청종하는 자가 말씀의 능력을 경험합니다. 말씀의 역사는 수없이 많고 다양합니다. 다음의 상징은 단지 몇 가지 사례들에 불과합니다.
“내 발의 등이요”(A Lamp to My Feet) ? 하나님은 말씀은 성도의 삶에 나침반의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길을 잃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등이요 어둔 길을 비추어 주는 빛입니다.
“캐논”(Canon) ? 말씀은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기준과 척도입니다. 우리는 자주 마음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립니다. 그때마다 성도는 다른 무엇이 아닌 성경에 자신을 비추어 봅니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누구여야 하는지’를 다시 발견합니다.
“기쁜 소식”(Good News) ? 성경의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위로와 격려, 긍휼을 담고 있습니다. 성도는 말씀 속에서 소망을 얻습니다.
“교정렌즈”(Corrective Lens) ? 하나님 말씀은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믿음의 시각을 갖게 합니다. 믿음의 안목으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도록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다른 10명의 정탐꾼과 달리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 땅의 거민들을 자신들의 ‘먹이’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밖에도 다양한 상징들이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 모두가 말씀을 청종할 때 일어나는 말씀의 역사들입니다.
말씀에는 맛이 있습니다. 말씀은 입에는 달지만 배에서는 씁니다(계 10:10,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쉽게 맞장구를 칩니다. 옳습니다! 지당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소화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삶으로 구현하기 위해 우리는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에 대한 경외는 우리로 그것을 피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게 하며, 외면하게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청종하게 합니다(시 119:161, “고관들이 거짓으로 나를 핍박하오나 나의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 요즘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무기력하게 된 것은 말씀에 대한 경외심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경외심이 없으니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니 말씀이 삶으로 열매를 맺는 일도 없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환상을 보았습니다(겔 47). 그것은 하나님의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는데, 그 물이 불어나서 큰물을 이루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물이 닿는 곳마다, 모든 죽은 것이 살아났습니다. 죽은 물고기가 살아나고, 죽은 나무도 살아나고 꽃을 피우고 다시 열매를 맺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닿는 곳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가정마다, 인생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직 말씀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영롱하게 빛납니다. 오늘의 현실에 낙심하지 말고 빛 되신 말씀으로 인도받는 한국교회와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와 성도가 힘써 말씀을 전하고 청종하기를 바랍니다. 말씀의 회복을 위해 함께 간절히 기도하길 원합니다. 오직 주의 말씀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글=한국복음주의협의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