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에 대한 본문들 가운데 성경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사야 11장 6-9절일 테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 내용이 강렬한 까닭이 있다. 극명한 대조다. 이리와 어린 양, 표범과 어린 염소, 암소와 곰, 독사의 구멍과 거기에서 장난하는 젖 먹는 아이, 독사의 굴에 손을 넣는 젖 뗀 아이. 현실적으로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재앙이 즉시 떠오른다. 비극과 참극이 발생할 상황인데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를 받는 것과 상하는 일이 더 이상 없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의 갈등과 분쟁과 비극을 멎게 한다. 대립을 포용으로 바꾼다.
이 내용은 평화의 본질을 분명하게 지적한다. 평화는 독한 갈등과 싸움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남에 대한 미움과 피를 부르는 참극이 평화를 갈망하게 한다. 사람 사는 현실에서 평화는 평화가 없는 세상의 고통을 전제하고 있다. 위에 인용한 이사야서 본문의 배경이 예루살렘의 파멸을 목전에 둔 상황이다. 전무후무한 비극이 닥칠 것이다. 피가 강처럼 흐를 것이다. 사실상 모든 것이 끝장날 상황에서 선지자는 평화의 환상을 선포하고 있다.
평창올림픽이 곧 시작된다. 평창올림픽을 선용하여 한반도 평화의 모멘텀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열망이 크다. 이 평화의 열망은 아주 위험한 갈등 상황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군비 확산과 핵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이 한반도 중심한 동아시아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과 그 패권을 나누어 가지려는 중국의 힘겨루기가 이 위험 상황의 뿌리다. 강대국 일본과 러시아가 거기에 연결되어 대륙과 해양 세력의 갈등이 첨예하다. 지각 변동에서 발생하는 지진처럼 언제 돌발 상황이 터질지 모르는 형국이다.
기독교 신앙의 시각으로 보면 평화에 대한 갈망은 성서의 근본적인 메시지다. 그 어떤 갈등이나 대립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평화다. 참혹하고 비인간적으로 인륜이 짓밟히는 야만의 상황에서도 결코 단념하지 않는 평화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평화는 지극히 비참한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도달하려는 종점은 그 어떤 대립도 없는 절대 평화다.
평화는 이 둘 사이에 존재한다. 절대 평화라는 목적지와 수없는 변수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불안한 평화의 여정 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평화는 물과 같다. 끊임없이 흐르고 변동이 불가피하다. 저절로 오는 평화는 없다. 수학의 공식이나 기술적인 구조에 따라 그 작동이 보장되는 평화는 없다. 끊임없는 변동을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추구해야 가능한 것이 평화다. 사람 사는 현실에서 평화는 변수로만 존재한다. 오늘날 한반도의 평화가 그런 시험대다. 변수로 존재하는 평화의 여정에서 어쩌면 보장 없는 절대 평화를 향해 걷는 용기를 가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길을 걷지 못한다면 누가 걷겠는가.
/글·사진=평화통일연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