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8년, 그것도 벌써 2월 첫째 주일입니다.
다음다음 주일에는 해마다 맞이하는 사순절이지만 올해는 더욱 새삼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 이유를 말하자면 우리는 작년에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했습니다. 준비 하나 제대로 하지 않다가 부랴부랴 우리도 뒤질세라 한다고 했지만 행사에 그치고 한국교회가 개혁해야 할 일들은 크게 문제도 되지 못하고 지나갔습니다.
더구나 개혁을 말하자면 루터 당시의 성직자타락상 못지않은 오늘 한국교회의 소위 말하는 성직자들은 그냥 그대로 넘어갔습니다. 간혹 새 시대와 새 목회자상을 꿈꾸는 젊은 성직자들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성직자 다수, 그것도 기득권을 한껏 누리고 출세한 사람들에게는 씨알도 먹혀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사순절은 회개의 계절입니다.
한국교회는 회개는커녕 벌써 부활절설교자나 행사주관문제가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이는 한국교회가 얼마나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포기하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소리, 그것도 바로 내 옆에 있는 같은 동역자들, 힘없는 동역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예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 오늘 한국교회입니다.
한국교회는 자본주의 시대의 열매에 배부른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자기 이해관계에 불리하다면 복음의 진리는 무시되고 반대부터 해버립니다.
나라는 안팍으로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지만 나로부터 시작되는 작은 회개와 신앙회복의 기운도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래놓고는 나라와 민족, 지도자들을 위한 기도회와 집회는 선거철을 맞이하면서 봇물을 이룰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올해의 사순절이 더욱 무겁다는 느낌입니다.
2) 오늘은 그림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잘 아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세한도(歲寒圖)"입니다.
'세한도'는 여러분 모두가 잘 알듯이 우리나라 국보 180호입니다. 그만치 단순한 그림이 아니고 김정희의 철학적 사상과 예술적 독창성과 시대의 문화적 변화를 담고 있기에 국보로 선정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예술가도 아니고 화가나 문인도 아니기 때문에 '세한도' 그림자체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제 주제와 능력을 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한도라는 그림은 아주 간단합니다.
채색 없이 먹으로 거칠게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글씨가 중요한 몫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선 이 그림에는 제목이 쓰여 있는데 "세한도(歲寒圖)"라고 했습니다. 이 제목을 보면서 이 그림이 한겨울 추위를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이 그림자체나 글씨가 아니라 그림 옆에, 그림의 한 부분으로 쓰여진 글귀에 함께 눈을 맞추었으면 합니다.
처음에는 그림에 무슨 글씨를 덧붙여 놓았나 하고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그려진 동기와 과정, 그리고 이 그림을 선물로 준 사람을 알고 나면 이 "세한도"에서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글의 내용입니다.
추사 김정희가 "세한도"를 그린 곳은 서울이나 그의 고향인 예천이 아니라 제주도입니다. 조선왕조시대에 제주도는 중죄인들이 귀양을 가는 곳입니다.
김정희는 당대의 문인학자요 화가요 서예가요 정치권력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던 조선후기의 인물입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르러 권력을 내려놓고 서화에만 묻혀 살았지만 당쟁에 몰락하고 중죄인으로 몰려서 제주도로 귀양을 가서 8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제주도로 귀양을 간 김정희는 세상에서 잊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재기할 희망도 없었고 오래 세월 잘 나가던 시절에 그렇게 많이 알고 찾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외면했습니다. 희망이 있다면 그나마 귀양살이라도 짧게 하고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지만 그 날도 기약이 없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빠진 추사 김정희를 변함없이 가까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이상적입니다. 그는 통역관으로 일하면서 김정희 그림과 학문과 인품을 따랐습니다.
그 이상적은 모두가 외면해 버리는 김정희를 위해서 중국에서 어렵게 큰돈을 드려 책을 구입하여 제주도로 보내고 또 제주도로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이런 이상적의 의리와 도움과 방문에 감동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대신 그려준 그림과 글이 바로 '세한도'입니다.
3)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의 이 글에는 그간의 사정과 세상인심을 그리면서 중국의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글과 공자의 '논어(論語)'에 나오는 글을 같이 떠올리면서 이렇게 썼습니다. (긴 글에서 본문 그대로를 추려 보았습니다.)
"... 세상의 풍조는 오직 권세와 이권만을 좇는데, 그 책들을 구하기 위해 이렇게 심력을 쏟았으면서도 권세가 있거나 이권이 생기는 사람에게 보내지 않고 바다 밖의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 보내면서도 마치 다른 사람들이 권세나 이권을 좇는 것처럼 하였다.
태사공 [사마천]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리게 된 사람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그대 역시 세상의 이런 풍조 속의 한 사람인데 초연히 권세나 이권의 테두리를 벗어나 권세나 이권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단 말인가? 태사공 [사마천]의 말이 틀린 것인가?
성인[공자]께서는 '겨울이 되어서야(세한(歲寒))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시사철 시들지 않는다. 겨울이 되기 전에도 소나무와 잣나무이고, 겨울이 된 뒤에도 여전히 소나무와 잣나무인데, 성인[공자]께서는 특별히 겨울이 된 뒤의 상황을 들어 이야기한 것이다.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하는 것은 이전이라고 해서 더 잘하지도 않았고 이후라고 해서 더 못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공자]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성인[공자]이 특별히 칭찬한 것은 단지 시들지 않는 곧고 굳센 정절 때문만이 아니다. 겨울이 되자 마음속에 느낀 바가 있어서 그런 것이다.
(......... 중 략........)
사마천은 "사기"에서 중국의 길고 험했던 역사를 살피면서 세상 사람들의 풍조란 권력과 이권을 따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추운 한 겨울에 세상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늘 푸르다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들어온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권력과 이익을 쫓아 산다는 것이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을 가지고 자기의 본심과 모습을 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세상이 바뀌거나, 권력이나 이익이 더 많은 것이 있으면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이 세상풍조요 사람의 인심이란 것이 드러납니다.
세상의 권력이 변하고 또 내 처지가 잘 나가다가 달라지면 그때에야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본 모습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사시사철 푸르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봄철에 산에 울창한 나무들이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나면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름철에 모든 나무들이 울창해지면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파묻히고 맙니다.
가을을 맞이하면 나무들의 색깔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면 그 아름다움 때문에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은 성에 차지도 않고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추운 겨울이 오고 나뭇잎들이 하나 둘 떨어지고 사라지면 그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 색깔이 보입니다.
한 겨울에 모든 나무들은 뼈만 앙상하고 모든 푸른 잎들이 누렇게 변하고 그 위에 눈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어 버리면 그 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은 더욱 청정하고 그 기개가 굳고 그 뜻이 높다는 것이 마음에 감동을 줍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세상이 하얀 눈으로 바뀌니까 소나무와 잣나무의 깨끗한 청정함과 높은 기개가 더욱더 잘 드러납니다. 하얀 세상과 푸른 소나무 한 그루, 그것도 높은 산에 홀로 서 있다면 더욱 뭇 사람의 눈에 잘 들어올 것입니다.
이 짧은 설교시간에 이렇게 그림과 글에 대해서 길게 말씀 드리는 것은 오늘의 본문말씀을 더 깊이 듣기 위해서입니다.
4) 오늘 한국기독교는 한겨울을 만났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한겨울의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사회가 기독교를 대하는 태도가 싸늘합니다.
오늘 한국 사람들이 교회를 보는 눈이 차디찹니다.
오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무서우리 만치 차갑고 두렵습니다.
오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인들 보는 눈길이 서릿발 같이 차갑습니다.
오늘 한국 사회와 사람들은 교회와 교인들을 무시합니다.
차디찬 한겨울이 어찌 갑자기 찾아오겠습니까?
그동안 한국교회에는 봄철이 있었고 잎이 무성한 여름철이 있었고 풍성한 열매를 맺고 거두는 가을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달이 차면 기운다는 자연의 이치를 잊어버렸습니다.
아예 찬 겨울이라 오리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나 봄날이고, 언제나 여름날이고, 언제나 가을날이 있을 줄만 알았습니다. 완전한 착각이었습니다. 처세에 능한 사람들도 이런 착각에 빠집니다.
이런 형편에 맞는 성경의 경고도 외면하거나 무시해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라는 이름으로 외면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전도자와 바울사도를 통해서 경고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다...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전 3:1-11).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라."(고전 10:12)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이런 경고의 말씀을 외면해 버렸습니다. 삼척동자라도 아는 자연의 이치를 무시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교인들이 듣기 좋아하는 축복의 말씀만을 골라서 설교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교인들이 성에 차지 않으면 무조건 순종만을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먼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을 따라 우리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무언가 달라도 다르게 변할 것을 기대하고 기다렸던 세상이 우리를 외면해 버리고 먼저 변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지금 차디찬 한 겨울을 맞았습니다..
5)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더러 먼저 변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분별은커녕 세상의 풍조에 따라 권력과 이익을 쫓아서 바쁘게 살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문화에 완전히 물들고 말았습니다. 권력과 이권에 따라서 신앙의 절개를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해 왔습니다. 교회와 신앙인은 이러 세상의 풍조와는 다르게 살아야 하는데 때로는 그 반대였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변해야 할 교회의 목사들과 교인들이 변하지 않으니까 지금처럼 세상이 우리에 대하여 마음이 먼저 변해 버렸습니다. 우리에게서 마음이 돌아섰습니다. 얼굴을 돌려버렸습니다. 우리보다 세상이 먼저 변해버렸습니다.
한국사회는 사실 오랫동안 우리가 변하기를 오래 기다려 주었습니다.
참고 기다려 주었습니다. 우리가 변하지 않아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참아주었습니다. 그렇게 기다려주어도 교회의 목사들과 교인들이 세상과 다르게 변하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그것보다 더 못하도록 타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변해야 할 교회가 변하지 않으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쳐버린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변해버렸습니다. 그 결과, 오늘의 한국교회에 희망을 걸고 찾아오는 불신자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진리를 찾아 나오는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무겁고 힘든 세상을 사는 사람들이 영혼의 쉼터로 믿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에 믿음의 섬김과 희생을 기꺼이 받드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에 하나님의 희망과 사랑을 찾아 나오는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떨고 있습니다.
6) 이렇게 교회가 한겨울일 때에 믿음의 생명이 빛나는 소나무와 잣나무 같은 목사와 교인들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그동안 세상의 풍조에 묻혀서 불신자들보다 못하게 살았던 한국교회의 목사와 교인들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오히려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인지? 보여줄 기회가 왔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목사와 교인들의 모습인지? 보여줄 기회입니다.
무엇이 절개 있고 의리 있는 신앙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선 내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고 그 빛이 빛나는 진짜 모습이 드러나야 합니다.
세상이 한겨울의 추위에 떨고 있을 때에 푸르름이 더욱 드러나는 소나무 잣나무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그 진짜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만약 세상은 추워지고 교회에는 찬바람이 몰아치는데 소나무 잣나무 같은 교인들이 없다면 어떻게 할까요?
만약 사람들은 온통 권력과 이익을 따라 이리 몰리고 저리 달려가는데 소나무 잣나무 같은 목회자들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스스로에게 얼마나 변했는지 물어야 합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도 그 본성은 잘 변하지 않습니다. 좋을 때는 한없이 좋아 보이는 사람도 이권과 권력에 따라 조금만 손해가 되면 금방 본성이 드러납니다.
내가 얼마나 변했는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십시다.
나를 오랫동안 잘 아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다.
예수 믿는 나는 예수 믿지 않는 다른 사람과 얼마나 다른가? 다르게 사는가?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나와 세상의 가치와 삶의 목표는 과연 무엇이 다른가?
나를 속이고, 다른 사람을 속이고, 세상을 속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속일 수 없습니다.
오늘 찬 겨울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우리 교회, 나만이라도 변화해서 세상의 풍조와 문화를 따르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 사는 변화를 기도하십시다.
그런 내가 있어 우리 교회가 조금이라도 더 신앙의 빛을 내고, 그런 우리 교회가 있어 한국 교회가 진리로 사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한국교회의 추운겨울철에도 다가오는 따뜻한 봄철을 기대 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인 내가 예수님처럼은 못 살아도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답게 작은 일에 내 이익과 권력을 양보하며 사는 사람이 있을 때에 다가오는 봄날에 다시 피어날 한국교회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메시지번역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문화에 너무 잘 순응하여 아무 생각 없이 동화되어 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우리는 세상문화에 동화되어버리고 거기 순종하면서 편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우리를 외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7) 이렇게 한겨울을 만나서 떨고 있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지금 애 타게 부르고 계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 6:8)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는 한국사회와 교회를 위해서 누가 소나무 잣나무 같이 푸르른 생명의 빛을 드러내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인가? 하고 찾고 계십니다.
흔히들 '인동초(忍冬草)' 이야기를 합니다. 추운 겨울을 넘기면 따뜻한 봄날이 온다는 이야기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그 봄에 새로 돋아나는 것이 꼭 같다면 무엇에 쓰겠습니까? 다가오는 봄에는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다른 씨앗이 있어야 다른 열매를 기대할 수 있고 무언가 '그루터기'가 있어야 새 나무가 자랄 것입니다. 지금과 같을 것이라면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적어도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라도 보내주십시오.' (사 6:8)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이 추운 겨울을 넘기고 찾아오는 봄철에 무언가 교회다운 교회, 목사다운 목사, 교인다운 교인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있어야 변해버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한 겨울에도 믿음의 지조와 절개를 지켜서 그 생명의 빛이 푸르디푸른 믿음의 사람이 참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나에게 무엇인가 더 큰 이익과 권력이 생긴다면 신앙의 절개는 팽개치고 이리 모이고 저리 쫓아가는 사람들로서는 한국교회와 사회의 희망이 없습니다.
내가 조금만 덜 이익이 되고 작은 양보를 먼저 하는 변화된 믿음의 사람이 내일의 새 생명의 씨앗이 되고 그루터기가 될 것입니다.
큰 손해, 큰 양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작은 것만 이렇게 해도 감동을 받습니다.
먼저 변해버린 세상의 인심과 풍조와 문화를 되돌리는 것은 이렇게 한 겨울을 맞고 있을 때에 더욱 필요합니다.
한국교회가 떨고 있는 이 겨울을 이기고 그 믿음의 생명이 푸르게 빛나는 사람이 하나님을 감동시킵니다.
■ 김고광 목사는 수표교교회 원로목사로, 기독교사상사 편집위원(현)으로 한국교회를 섬기고 있다. 학교법인 이화학원 이사장, 사회복지법인 성육원 이사장, 수표교교회 담임, 산타클라라 한인 연합교회 담임목사 등을 역임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2월 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현절 다섯째 주일예배 설교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