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성서일과는 구약에는 엘리 제사장과 어린 사무엘의 일화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에 들어옵니다. 인생의 황혼에 영혼마저 어두워져버린 엘리의 비극과 자라면서 영혼도 함께 자라는 사무엘의 변화가 교차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처음 만남이 그려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이 없는 나다나엘을 칭찬하시고, 서신서에서는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지체답게, 주와 합하여 살아갈 것과, 성령의 전(殿)으로서 살아갈 것'을 권고합니다.
삶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신앙인은 누구나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각자 독특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영혼을 자라게 함으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게 살아야 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은 매우 어둡습니다.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삼상3:1-4)
제사장이나 예언자의 기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과 이상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기능인데 이런 중재자가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도 없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리의 눈이 어두워가고 자기 자리에 누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이 거의 없는 어둠과 절망을 상징했다면, 대조적으로 사무엘도 하나님의 전에 누워있지만 아직 타는 등불이 묘사됨으로서 새로운 소망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등불이란 하나님의 현존을 말하고 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 시대의 대제사장으로 40년동안 사사로 일했던 엘리는 그의 자녀 교육에 실패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자식 농사가 쉽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홉니와 비느하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성경은 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2:12) 그들은 성전에 살면서 온갖 못된 짓을 골라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대하는 제사장의 규정을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삼상2:13),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려고 고기를 삶고 있으면 갈고리를 들고 다니면서 냄비든 솥이든 찔러서 창에 꽂혀 나오는 것을 자기들이 먹으며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능멸했고(삼상2:14), 심지어 회막 문에서 수종(隨從)드는 여인들과 동침하기까지 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그 사실을 알고 꾸짖기는 했지만 적극적으로 자식들을 말리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내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그의 집을 영원토록 심판하겠다고 그에게 말한 것은 그가 아는 죄악 때문이니 이는 그가 자기의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엘리의 집에 대하여 맹세하기를 엘리 집의 죄악은 제물로나 예물로나 영원히 속죄함을 받지 못하리라 하였노라 | 삼상3:13, 14
자식 하나 잘못 키웠다고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을까요? 문제는 이미 엘리는 늙고 마음이 어두워져서 이를 바로 잡을 의지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엘리의 이 게으름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두고 반복적으로 굳어진 습관이었을 것입니다.
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삼상3:10-12)
왜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에게 하실 말씀을 어린 사무엘을 불러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자기가 들어야 하고, 하나님께 꾸중을 들어도 자기가 들어야 하고, 심판의 메시지를 들어도 자기가 들어야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 무거운 일을 어린 사무엘에게 감당시키시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과 엘리 제사장 사이에 대화가 사라지고 하나님께선 이미 대화 상대를 옮기신 것을 말합니다.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다. 그는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엘리가 물었다. "주님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하였다. 엘리가 말하였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삼상3:16-18)
그가 자신과 자녀들의 죄악을 알았을 그 때, 돌이킬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어린 사무엘의 입을 빌어 듣는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은 노(老) 제사장의 마음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었을까요? 가슴 아프고 민망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무엘의 성장과 성숙을 보면서 점차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을 알았더라 | 삼상3:19, 20
어린 사무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부르셨던 경험은 그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었을까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던,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불러주신 기억은 사무엘의 성장을 매우 밝게 해주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부르실 때, 그 음성이 어찌나 사람과 똑같았던지 사무엘이 엘리의 음성인줄 알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영적 경험이 사무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매우 친숙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경험은 사무엘의 영혼을 자라게 해주었고, 하나님과 매우 친밀해지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자연스럽게 사무엘의 인격 속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이 자라도록 함께 해 주셨고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친숙했습니다. 그 결과,"사무엘이 자랄 때에,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사무엘이 한 말이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다 이루어지게 하셨다"(삼상3:19) 하나님께서 사무엘과 함께 하셔서 그가 하는 그 어떤 말도 하나도 헛된 말이 되지 않도록 이루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단에서 브엘세바까지 온 이스라엘은 사무엘이 주께서 세우신 선지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쪽에서 남쪽까지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을 보며 여호와의 선지자로 존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친숙하게 여겨지고, 하나님의 음성이 익숙하게 들려와서, 매일매일 우리의 마음이 다듬어지고 북돋아지고 시와 찬미의 꽃이 피어나기를 소망해봅니다.
복음서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만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두고 말씀하셨다.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요1:47)
애초에 나다나엘은 빌립의 전도를 받고 나사렛의 예수에 대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1:46) 나사렛은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철저하게 소외되어 있는 지역입니다. 구약 어디에도 나사렛을 거론한 곳이 없으니 나다나엘의 그러한 반응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런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보아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서 무엇을 보신 것일까요? 요한복음 1장에는 이런 예지(豫知)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습니다. 요1:29에서 세례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걸어오시는 것을 보면서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라고 예수님을 소개했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보면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았다면, 예수님은 나다나엘을 보시면서 그의 내면을 통찰하셨습니다. "도대체 주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보셨기에 그토록 극찬을 하시는 것인지 나다나엘도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48절a) 그런데 주님의 대답이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48절b) 당시 무화과나무는 무성한 잎으로 뜨거운 낮에 그늘을 드리워주었기 때문에, 경건한 구도자들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조용히 묵상하는 것을 즐겨했다고 합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를 즐겨 찾는 구도자(求道者)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 요1:48 b
이 말씀은 단순히 겉모습을 보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의 내면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나다나엘이 말하였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 요1:49
겉모습으로만 자신을 평가하지 않고 영혼 깊숙한 갈증을 보아주신 분, 나다나엘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경계가 해제하고 맙니다. 오늘 주님과 나다나엘의 만남을 통해 보면, 만남의 궁극적인 목표는 상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영혼의 갈증을 읽어내고, 그 갈증에 다가서는 것에 참 만남의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은 감격해 하는 나다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너를 보았다고 해서 믿느냐?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요1:50-51)
보다 큰일을 보기 위해서는 큰 믿음이 필요하기 마련입니다. 유대인들과 제자등이 보는 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위에"계시는 우주론 안에서 보면 ,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아래"지상- 인간 남녀가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 사이의 상호소통을 약속 하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상호소통을 상징하는 중요한 동기입니다. 이 장면은 창세기의 야곱의 꿈에 나오는 "환상"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12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있고,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아 있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었다 16 야곱은 잠에서 깨어서, 혼자 생각하였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17 그는 두려워하면서 중얼거렸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창 12:12, 16-17)
예수의 말은 움직임이 일어나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즉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를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바로 그가 "이곳""하늘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아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나타날 것입니다.
소통이 되지 않고, 믿음으로 격려되지 않는 만남, 더 큰일을 볼 수 있는 미래가 준비되지 않은 만남, 진리에 가까이 더 다가서는 구도(求道)의 감격이 없는 만남은 시간이 가면 시들해지고 생명력이 떨어져 마침내 습관적이거나 지루해지곤 하지 않겠습니까?
서신서의 본문에서 바울을 말씀합니다.
"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 고전6:12
고린도교회 교인들과 바울이 이렇게 묻고 대답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 그러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또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에도 제재를 받지 않겠습니다."라고 외치면, 바울은 그러면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우리는 무엇에 매여 살아야 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아래와 같이 권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 고전6:15
주님과 합하는 사람은 그와 한 영이 됩니다 | 고전6:17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 고전6:19, 20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일에 사용되는 것은 결정적인 죄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지닌 자유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충성된 종으로 모든 것에 예속된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한 자는 이웃을 위하여 종의 자리에 들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이 예수님의 지체이고, 우리의 몸이 성령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가꾸고 다듬어서 예수님을 닮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매일을 성전에서 자고 일어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던 사무엘처럼, 무화과나무 아래를 찾아 내면의 영혼을 가꾸었던 나다나엘처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가하나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성령의 성전으로서 살았던 바울처럼, 우리도 우리의 마음을 아름답게 가꾸어서 날마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 설교는 지난 2018년 1월 14일 '함께 하는 예배' 공동체 주현절 두 번째 주일예배 설교문임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