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아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도 믿음의 족장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이었지만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은총을 맛본 것이지 온실의 화초처럼 안락한 삶속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모세의 안락한 삶은 나이 사 십 세가 되었을 때 애굽 사람을 죽인 것이 탄로 나는 순간 끝이 났습니다. 그는 모래 바람이 사정없이 몰아치는 미디안 광야에서 고달프기 그지없는 곳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갈 곳도 없고 반겨 줄 사람도 없는 곳 하루 종일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방황해야 하는 곳 그곳이 바로 미디 안 광야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아무런 희망도 기댈 것도 없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미디안 광야는 약속된 유배지가 아니었습니다. 또 기한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10년을 기다려도 20년을 기다려도 상황은 달라 질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가슴을 부풀게 하는 언질을 주기는커녕 바로 왕은 모세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는 이미 애굽 왕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피가 흐르는 히브리인임을 만 천하에 드러났습니다.
언제 미디안의 고통이 끝날 것인가? 그의 가슴의 막막함은 마치 광야의 막막함과 같았습니다. 이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위해 오아시스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오아시스는 가정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광야의 오아시스를 만나 시원한 물 한 모금으로 모처럼 만난 나무 그늘에서 지친 몸을 쉬고 있을 때 그는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십보라’ 그녀는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그의 인생의 오아시스 이였습니다.
모세는 십보라를 따라 이드로의 집에 이르게 되었고 이드로는 그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모세는 두 아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담은 신앙 고백적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큰 아들은 ‘게르솜’ 이었고 둘째 아들은 ‘엘리에셀’ 이었습니다. 게르솜 이란 내가 이방에서 객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세는 객이었고 나그네였습니다. 그가 비록 애굽 궁궐에 있기는 했지만 거기는 그가 있을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 이었으므로 그는 처음부터 애굽 궁궐의 나그네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던 때부터 사실은 나그네 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네 인생 자체가 객이 아니겠습니까?
‘엘리에셀’ 이름은 ‘참으로 아름답다’라는 의미입니다. 첫 아들의 이름을 게르솜이라 지은 모세가 둘째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붙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그네 인생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나그네에게 진정 도움을 주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뿐 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존재가 객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함을 잊지 맙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한 모세는 자기를 구원 하신 하나님을 이웃에게 증거 합니다. 인생 항로를 나그네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경험한 인생은 마땅히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하고 승리케 하는 길로 나아가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진을 친 이후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가 전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고 그의 처자와 함께 미디안에서 애굽으로 가든 도중 돌려보냈던 모세의 아내 십보라 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세를 찾아 왔습니다. 당시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게 되자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야만 했던 자신의 비참한 모습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운데서도 자신을 끝까지 돌봐주신 하나님께의 크신 은혜를 기억 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가족들을 장막 안으로 데리고 가 하나님께서 출애굽을 주도하신 가운데 보여주신 위대한 모든 행적들을 밝히고 그동안 자신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수많은 고난과 여호와께서 그를 구원하신 일들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에 감동한 이드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찬양하며 하나님 보다 더 큰 이가 없음을 고백 했습니다. (9-12)
모세와 이드로의 만남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만남이 어떠해야 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드로 앞에서 결코 세속적 가치 기준인 명예와 자신의 출세에 대해 자랑하지 않았다는 점 주목 해야 합니다. 그는 오직 일상생활 속에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간증함으로써 이드로와 함께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교제를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드로의 신앙 고백
1. 기뻐하였습니다. (18) 이드로는 모세의 말을 다 들은 후 주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인들의 손에 서 구해내신 모든 선한 일을 기뻐하였다 (9) 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은혜 받은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행11:22) 그러나 악한 사람은 그것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불평을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2.,주님을 송축 하였습니다. (10) 모세의 간증을 다 듣고 난 다음 이드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 베푸심과 그 백성을 구원하여 주신 일을 은혜를 기뻐함과 동시에 주님을 다음과 같이 송축 하였습니다. 그 분이 너희를 애굽인의 손에 아래서 이 백성을 구원해 내셨도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바로와 애굽 사람들 에게 행하신 것은 이미 이드로도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모세를 통하여 더욱 확고하게 알고 그는 감격 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들으려고 하는 자에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의미를 더 분명히 알고 하나님께 대하여 더 알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알려 주십니다. 하나님 말씀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롭습니다. 말씀을 묵상 하면 할 수 록 그 속에서 엄청난 진리가 발견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아무리 갈급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많이 들었다고 해서 체하거나 부작용이 생기는 일은 없습니다. (9-11)
이드로가 하 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는 엄청난 확신 가운데 서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은 단순히 소문의 차원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의미 하게 드리던 형식적 제사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누가 무어라고 해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바로 그 분이 이스라엘을 구원 하셨다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11) “이제 내가 알았도다‘ 그는 이제 알았도다. 고 말합니다. 그는 여호와가 모든 어떤 신보다 크시다는 것을 선포 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 내신 분은 여호와라는 사실을 확신 합니다.
3. 만남의 축복.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고백이 있고 이를 들은 무리들의 기쁨과 하나님 찬양이 있은 후에 이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큰 기쁨과 감격이 그들 안에 넘쳐났습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에는 아직 제사 제도가 확립 되지 않았고 제사장도 없었습니다. 이제 드리는 제사는 그 의미가 분명히 달랐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가득 하였고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가 충만한 예배였을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감사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롭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성품과 구원에 대하여 발견 하는 일 보다도 기쁜 일은 없습니다,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이드로가 드린 예배가 바로 이런 예배였습니다 그의 직업이 바로 제사장 아닙니까?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바로 알고 제사 드렸을 때 그 제사는 그가 처음으로 드린 바른 제사 이었고 살아있는 제사였으며 하나님께 받으신 제사 이였습니다.
하나님을 발견 할 때 비로소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새로 발견하고 드리는 뜨거운 예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일치하는 예배 하나님께 드릴 방법이 없어서 오직 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드로는 예배를 드린 후 번제물과 희생을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과 함께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말하는 하나님 앞이 어디입니까? 저는 구름 기둥이라고 생각 합니다. 구름 기둥 기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법궤가 만들어 지기 전에 이방인 이드로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절제된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서로가 아무리 좋아도 절제 되지 않은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습니다. 큰 싸움이 있은 후에 지쳐있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이드로를 만나게 하시고 그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런 만남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처음 만났을 그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얼마나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있으며 또 얼마나 세속에 물들여져 있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더 많은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히 더 알게 될 것이고 놀라운 확신 가운데 서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가 새로워지고 우리 교제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거룩하고 영혼을 살리는 교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드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깨달은 후에 자신의 신앙을 바꾼 것입니다 또한 아론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떡을 먹고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에게 기쁨이 넘쳤습니다. 왜 기쁨이 넘쳤을까요? 9절을 보면 왜 그들이 기뻐 했는지 분명한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은혜” 라는 말로 번역이 되었지만 히브리말 “하토 바”는 선한일 좋은 일로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좋은 일 하셨기 때문에 그것을 인하여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살아있음을 구원 사건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따라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사실에서 출발 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일은 이스라엘에게는 애굽의 바로의 손에서 구원하신 사실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일로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건강을 주셔서 입니까? 경제적으로 성공한 입니까? 인간관계로 고통 받던 사람에게는 화해와 회복이 좋은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가장 좋은 일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서로 신뢰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려운 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구원 하셔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실 자격자이심을 그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사이에 있었던 신뢰 형성이 바로 최대의 좋은 일이었습니다. 오늘 여분들 가운데도 이러한 가장 좋은 일이 회복되어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