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원로목사 "한국교회, 정말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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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설교 통해 '십자가 복음 신앙' 회복할 것을 촉구
김명혁 목사 ©기독일보DB

[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교회 원로 가운데 한 사람인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목사)가 최근 한 교회 설교를 통해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야할지에 대해 이야기 해 주목을 받았다.

김명혁 목사는 "한국교회가 정말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지적하고, "십자가 복음 신앙에 집중하기 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 물질화에 치우치는 불신앙에 빠지게 됐다"며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보다는, 분열과 분쟁에 치우치는 불신앙에 빠지게 됐다"고 이야기 했다.

이어 김 목사는 "가장 기본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 말하고, ▶회개와 참회의 복음 신앙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복음 신앙 ▶사랑과 섬김의 복음 신앙 ▶천국 사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면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해결의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도 했다.

이후 그는 이 5가지의 회복해야 할 '십자가 복음 신앙'에 대해 하나하나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 설명하고,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십자가 복음 신앙'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한다"며 설교를 마무리 했다. 다음은 그의 설교 전문이다.

제목: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 막1:15, 고전 2:1,2
장소: 그레이스 선교교회
일시: 2017.10.1.
설교: 강변교회 김명혁 원로목사

제가 2008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다음 지난 9년 9개월 동안 주일마다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주로 방문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는데 오늘 2017년 10월 1일 주일 그레이스 선교교회에 다시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예배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황은혜 목사님과 성도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2008년부터 2016년까지 8년 동안 그레이스 선교교회에 와서 22번 설교를 했는데 이렇게 많이 와서 설교한 교회는 그레이스 선교교회밖에 없습니다. 일년에 두 번 또는 세 번 와서 설교를 했습니다. 오늘 23번째로 와서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오늘 무슨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 좋겠냐고 물었더니 황은혜 목사님이 지금 우리가 너무 어려운 위기에 처해있는데 어떻게 하면 되겠냐는 내용의 설교를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런 심각한 문제에 대한 설교를 할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 앞에서 엎드려 회개하는 마음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 설교를 오랜 동안 정성을 다해서 준비했는데 너무 긴 설교가 되었습니다. 황은혜 목사님이 설교를 1 시간 동안 해도 된다고 해서 설교를 1 시간 동안 하려고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정말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복음 신앙”에 집중하기 보다는 세속화와 인간화와 물질화에 치우치는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고, 죄인 의식보다는 의인 의식에 치우치는 교만과 독선의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고,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보다는 분열과 분쟁에 치우치는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세속화와 인간화와 물질화와 의인 의식과 분열과 분쟁 등 각종 불신앙에 빠지게 되었는데, 한국교회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입니까? 저는 가장 기본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먼저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십자가 복음 신앙”을 지니게 된 것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1,2). 사도 바울은 “십자가 복음 신앙”을 몸과 마음과 입에 지니기 위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들을 다 내어버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즉 유창한 설교와 심오한 신학강의를 내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모두 해로운 것으로 배설물로 즉 똥으로 여긴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빌 3:7-9).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 즉 십자가의 흔적을 몸에 지닌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사도 바울이야말로 정말 예수님과 “십자가 복음 신앙”에 미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각한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가장 기본적으로 절대적으로 회복하여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이 몸에 지녔던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에 달려서 죽게 하신 성부 하나님만 믿는 “십자가 복음 신앙”과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늘 영광을 바리시고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성자 예수님만 믿는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의 비밀을 가르치시는 성령 하나님만 믿는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을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갱각나게 하시리라”(여 14:26). 예수님과 사도 요한은 하나님 “믿음”과 예수님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고 또 강조하면서 요한복음에 “믿음” 이란 말을 90번이나 사용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자기가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님 “믿음”에 있다고 요 20:31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을 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말세에 사람들이 “믿음”을 저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눅 18:8).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1-5). 지난 2천년 동안의 역사가운데 이와 같은 불신앙의 죄악에 빠진 때가 종종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정말 위태로운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때는 별로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빌리 그래함 박사와 그의 딸 안 그래한 롯츠 목사는 불신앙에 치우치고 있는 미국교회와 사회에 그리고 세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중이라는 경고의 말을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미국을 향한 심판을 준비하시며 의도적으로 숨어 계십니다.” “종말을 알리는 일부 신호들이 있습니다.” 안 그래함 롯츠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미국에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나라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가 내릴 것이며, 이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해결 방법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다시 돌아감으로 하나님이 다시 우리를 돌보시기를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안 그래함 롯츠 목사는 자기 생전에 주님의 재림을 맞을 수도 있을 지 모른다는 말까지 했습니다. 빌리 그래함 박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래함 목사는 지금 미국의 판사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탄식의 말들을 들으면서 저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 어떤 형편에 처해있는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 자신을 믿고 있는 부분이 너무 많은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목회의 일을 아주 잘했는데…… 내가 교수의 일도 아주 잘했는데…… 내가 구제와 봉사의 일도 아주 잘했는데…… 내가 지금도 전국의 작은 교회들을 아주 잘 섬기고 있는데…… 내가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인데…… ” 라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로 너무 부끄러운 위선과 독선의 존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안타까운 고민을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세속화와 인간화와 물질화와 의인 의식과 분열과 분쟁 등 각종 불신앙의 위기에 처하게 된 그리고 위선과 독선에 빠지게 된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입니까? 저는 가장 기본적으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순수하고 절대적인 “십자가 복음 신앙” 다섯 가지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첫째로 무릎 꿇고 울면서 처절하게 회개하는 “회개와 참회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둘째로 시간과 물질과 몸과 눈물을 쏟아 드리는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셋째로 모두를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넷째로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랑과 섬김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다섯째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천국을 바라보는 “천국 사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예배와 교제와 섬김과 선교를 강조하는 그레이스 선교교회의 성도들이 아주 귀중하게 여기는 신앙의 덕목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여섯째로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해결의 방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와 우리들이 순수하고 절대적인 “십자가 복음 신앙” 다섯 가지를 회복하여야 하는 일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릎 꿇고 울면서 처절하게 회개하는 “회개와 참회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안 그래한 롯츠 목사도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첫째 방법이 “우리가 겸손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라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회개” 이외의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제일 처음에 전파하신 말씀이 바로 “회개하라” 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믿음” 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말씀도 “회개”의 메시지를 세상의 모든 족속에게 전파하라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부활 승천하신 다음에도 주님께서는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 중 다섯 교회들을 향해서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라고 다섯 번 반복하시면서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순절 날 제일 먼저 전파한 말씀도 “회개하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행2:38).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선교지에서 전파하고 증거한 것도 “회개”와 “믿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행20:18,21). “회개”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믿음” 이었습니다. 사실 “회개”가 먼저이지만 중간도 “회개”이고 나중도 “회개” 라고 생각합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의 삶에 있어서 “회개”는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 제일 먼저 토해낸 고백도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 라는 회개의 고백이었는데 길선주 목사님께서는 그 후 사경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평생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라는 회개의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고백을 하셨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래서 조선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고 조선 교회가 튼튼하게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회개”보다 더 귀중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회개”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입문이고 과정이고 출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회개”는 자기가 죄인임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것인데 “회개” 없이는 죄 사함도 구원도 의롭다 함도 영생도 천국도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회개”는 한 번 크게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데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계속해서 울면서 돌이키고 또 돌이키는 것을 “참회” 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회개”와 “참회”를 계속해서 가장 많이 가장 처절하게 한 사람이 다윗과 사도 바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밤 낮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1-3).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혜와 사랑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윗의 뒤를 이어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평생토록 계속해서 드렸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4).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특별한 종으로 사용하셨고 귀중한 순교의 제물로 받으셨습니다. 다윗과 사도 바울의 뒤를 이어서 성 어거스틴과 성 프랜시스와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과 주기철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과 김치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박윤선 목사님도 맨날 울면서 “회개”와 “참회”의 삶을 사셨습니다. 신앙의 선배님들의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고백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어거스틴). “나는 작은 벌레입니다”(프랜시스). “나는 버림받을 죄인입니다”(루터). “나는 망할 자이옵니다”(칼빈). “나는 눈멀고 병들고 연약한 죄인입니다”(웨슬레). “나는 아간과 같은 죄인입니다”(길선주 목사).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이기풍 목사). “이 놈이 주님이 차지하여야 할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습니다”(주기철 목사).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며 티끌 같은 미말의 존재입니다”(이성봉 목사). “나는 고멜과 같은 음녀입니다”(김치선 목사). “나는 어릴 때부터 범죄를 계속한 불의하고도 불충한 조인 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큰 죄인임을 깨닫고 두럽게 떨며 울었습니다”(손양원) “나는 신사 참배하는 죄인입니다”(한경직 목사).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박윤선 목사).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회개”하고 “참회”하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회개와 참회”가 없는 믿음은 형식적인 믿음이고 위선적인 믿음이고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제사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회개와 참회”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이리다”(시51:17,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34:18). 저는 부족하지만 중학생 때는 이성봉 목사님을 통해서 고등학생과 대학생 때는 김치선 목사님을 통해서 "회개"의 중요성을 배우고 또 배우면서 “회개”의 삶을 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지금 “회개와 참회”의 올바른 신앙을 점점 상실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저에게 하신 적이 있습니다. “김 목사, 나는 어제 아침 모임에서 어느 분이 회개 기도를 하면서 한국교회의 부끄러운 문제들을 조목, 조목 고발하는 설교 같은 기도를 하는데 그게 죄 고발이지 회개야. 나는 ‘아멘’ 이라고 할 수가 없었어. 김 목사 아멘 했어” 교만과 독선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영적인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첫째 방법은 무릎 꿇고 울면서 처절하게 “회개하고 참회”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창한 설교를 좀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오한 신학강의를 좀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멋진 프로그램을 좀 내려놓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장과 고집이 센 까다로운 사람들은 “회개와 참회”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근심 걱정 원망 불평이 많은 부정적인 사람들도 “회개와 참회”를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나 자신의 주장과 고집을 다 내려놓고 빈 마음과 몸을 지니고 항복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몽둥이로 두들겨 맞기 전에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상하고 통회하는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회개와 참회”의 제사를 드리는 그래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하는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시간과 물질과 몸과 눈물을 쏟아 드리는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창조와 구원의 목적은 “제사와 예배” 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출 3장부터 10장까지에서 10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 3:12).“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출4:22,23).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출5: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7:16).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8:20).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9:13).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출10:3).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출10:25,26). 출애굽의 궁극적인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독립하여 자유를 누리며 잘 사는데 있다기 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의 제사를 드리는데 있다고 거듭해서 말씀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안식일”을 예배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고 신약에서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거룩하게 지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범하는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라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출 31:14). “안식일에 어떤 사람이 나무하는 것을 발견한지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그 사람을 반드시 죽일찌니 온 회중이 진 밖에서 돌로 그를 칠찌니라”(민 15:32,35). 신약시대에 와서는 모든 예배가 안식 후 첫날인 “주일”에 드려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 이라고 말씀하셨고 지금이야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요 4:23). 부활의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날도 “주일” 이었습니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요 20:19,20). 사도 바울은 “주일 성수”를 철저하게 했는데 인식 후 첫날인 “주일”에 아침부터 밤까지 하루 종일 예배 드리면서 성찬을 거행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쌔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행 20:7).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목적은 우리 죄인들로 하여금 시간과 물질과 몸과 눈물을 쏟아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예배에 있고 특히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면서 정성껏 예배 드리는 “주일 성수와 예배”에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의 “안식일”과 신약의 “주일”은 앞으로 이루어질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예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1,10,11).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들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죄인들이 제일 먼저 우선적으로 하여야 할 일이 몸을 하나님께 제사로 드리는 “영적 예배” 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기독교는 “제사”와 “예배”의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 드리게 하셨고, 신약시대와 교회 시대에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게 하셨습니다. “주일을 성수”하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입니다. 청교도들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면서 강조한 것은 “주일 성수와 예배” 였습니다. 한국교회도 그 초기부터 “주일 성수와 예배”를 가장 귀중하게 여기면서 강조했습니다. “주일”에는 온종일 모든 세속적 업무를 중단하고 예배와 전도와 봉사에 전적으로 바쳐야 할 것을 엄격히 가르쳤습니다. 김익두 목사님께서는 “주일”은 하나님의 날이고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범하는 사람은 구약시대에는 때려 죽여야 할 사람인데 지금은 때려 죽이지는 않지만 죄는 죄라고 지적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들께서는 감옥에서 교회 신자들과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시면서 “새벽기도”와 “주일 성수”를 철저하게 하라고 당부하시곤 했습니다. 최복규 목사님께서는 “주일”을 범하는 사람은 지금도 때려 죽여야 할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주일 성수”가 해이해지는 것을 아쉬워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전에는 주일 아침 예배나 저녁 예배에 참석하는 신자들의 숫자가 거의 같았는데 언제부터인가 절반으로 줄어든 것은 문제야요. 그리고 주일 아침에 예배 보고 교인들이 헌금 낸 돈으로 점심 먹고 오후 예배 보고 집으로 가니 참 문제야요. 우리 영등포교회도 오후 예배로 바꾸자는 말이 나오는데 방 목사 죽은 다음에 바꾸자고 해요, 나 참!” 총신의 박용규 교수님은 한국교회가 주일저녁 예배의 아름다운 전통을 없앴기 때문에 교회마다 영적 침체를 겪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제 6부 예배모범은 “주일 성수”의 원리를 엄격히 규정했습니다. “이 날은 주일인 즉 종일토록 거룩히 지킬지니 공동 회집으로나 개체로 예배하는 일에 씀이 옳으며 모든 사무와 육신적 쾌락의 일을 폐할지니 세상 염려와 속된 말도 금함이 옳다. 먹을 것까지라도 미리 준비하고 이 날에는 가족이나 집안 사환으로 공동 예배하는 일과 주일을 거룩히 함에 구애가 되지 않도록 함이 옳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을 철저하게 몸에 지니고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의 제사를 바로 드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우리들이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정성을 다해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은 앞으로 하늘에서 이루어질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아 붓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는 점점 “주일 성수”의 영적인 유산을 저버리고 세속화와 인간화로 치닫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일 저녁 예배를 드리지 않는 교회가 너무 많은데 이것은 가장 큰 죄라고 생각합니다. 너무 불행한 일이고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하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주일 날 종일 교회에 가서 예배 드리는 것을 너무너무 귀중히 여기면서 좋아했습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부터 한 평생 주일에는 종일 집에 가지 않고 교회에서 예배 드리면서 살았습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주일을 종일 거룩하게” 지키며 교회에서 “예배” 드리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주일 성수의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을 하루 속히 회복할 수 있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셋째로,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를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십자가 복음 신앙”의 핵심의 하나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못박혀 죽으신 것은 죄인들 구원이 목적이었지만 동시에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시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2장에서 지적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3-18). 제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라는 제목의 글을 써서 지난 3월 15일 기독교보 신문에 실은 일이 있는데 그 글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십자가 복음에 전념하는 대신 “세속화”와 “인간화”와 “분열”과 “분쟁”으로 치닫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시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지금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죄인 의식” 대신 “의인 의식”을 지니고 자기의 입장과 다른 교파와 단체들을 적대시하며 정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좌우파 정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여 대중 집회에 참석하며 피차를 정죄하는 그래서 국론 분열과 혼란을 야기하는 부끄러운 모습까지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야곱이 에서의 목을 끌어안고 울었던 것처럼, 요셉이 형들을 끌어안고 울었던 것처럼, 적대시하고 정죄하던 자기와 신학적이고 교파적이고 단체적인 입장이 다른 상대방을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야로 갈라져서 싸우던 정치계도 적대시하고 정죄하던 상대방을 이해하고 끌어 안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룰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만 옳다는 독선이나 내가 승리했다는 의식을 버리고 상대방을 짓밟는 것이 아닌 끌어 안고 하나되는 길로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지니시고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시지만 궁극적으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가져다 주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하나님 이시라고 생각합니다. “화해와 평화와 통일”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비전입니다. 성경의 목표이며 역사의 완성 점입니다. 부수적인 것도 아니고 선택적인 것도 아닙니다. 본질적인 것이고 필수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연합하여 하나되는 아름다운 모습과 자연 만물이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시133:1). “해와 달아 찬양하며 광명한 별들아 찬양할 찌어다 산들과 모든 작은 산과 과목과 모든 백향목이며 짐승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과 나는 새며 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할 찌어다 (시148:3,9,10,13).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구원받은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계급과 종교와 이념과 신학과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풀고 모두와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면서 아름답게 살라고 분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이 하나님이 뜻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2,3).

『지금 한국 교회와 사회와 정치 안에 시급하게 요청되는 것은 화려한 예배나 정통 진리의 선포나 대중적인 행사 이전에 서로 붙잡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과 스데반 집사와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시님 닮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먼저 낮은 자세와 온유 겸손한 자세를 지니고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삶을 살 때, 양극으로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와 정치도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고저 하는 자극과 감동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적대적으로 치닫고 있는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도 조만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동안 양 극단으로 갈라졌던 여야가 서로를 이해하고 포용하며 모두와 하나되는 길로 달려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가 놀라고 북한이 놀라고 하나님께서도 놀라시는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길로 달려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기적이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우리들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십자가의 정신을 몸에 지니고 사신 스데반 집사와 성 프랜시스와 손양원 목사님과 한경직 목사님과 장기려 박사님과 같은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 우리들도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흔적과 함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의 흔적을 몸과 마음과 영혼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지니고 나타내면서 살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지만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아무 자격이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주님과 누군가를 위해서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기를 소원합니다. 북한 동포들을 위해서 그리고 남북의 ‘화해와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혹시 제가 제물 되는 삶을 살다가 제물 되는 죽음을 죽을 수는 없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주여, 순교자들이 흘린 피 소리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화해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평화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주여, 우리들을 통일의 도구들로 써 주시옵소서!”』 이것이 제가 지난 3월 15일 기독교보 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넷째로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랑과 섬김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사랑과 섬김의 삶” 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하시고 또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 13:34,3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사실 예수님께서는 설교는 간단하게 하시고 죄인들과 병자들을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기시는데 모든 시간과 정력을 다 쏟아 부으셨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마 8: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가라사대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마 8:5-7).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 들더라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마 8:14-16).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 9:1,2).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0-22).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 쌔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그 눈들이 밝아진지라”(마 9:27-30).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마 9:35).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병자들을 찾아가서 사랑으로 섬기신 사건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다 인용할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는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면서도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로마 군인들과 평생 죄만 짖던 강도에게까지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사실 성부 하나님께서도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와 가난한 자와 병든 자들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것을 아주 귀중하게 보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금식과 기도와 제사로 간주하신다는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58:6,7).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지 않는 형식적인 화려한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사1:11,15-17).

신약시대에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가 힘쓴 것은 “주일 성수와 예배”와 함께 “구제와 섬김”의 손길을 펴는 것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행2:44,45).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행11:29,30). 히브리서는 선행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라는 말까지 했습니다.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히13:16). 예수님께서는 “구제와 섬김”의 귀중성을 강조하시면서 다음과 같은 엄청난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34-40). 세속화와 의인 의식과 분열과 분쟁의 위기에 처한 우리 한국교회와 사회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 끌어안고 울면서 회해하는 일과 함께 순수한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과 섬김”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스스로 “사랑과 섬김”을 실천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0,11).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 15:25,26).

저는 본래 이기적이고 보수적이고 비판적이고 배타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나와 다른 입장에 선 사람들을 좋아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고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지도 않던 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과 공산주의자들과 무슬렘 사람들을 멀리하면서 비판하던 반일 반북 반공 반 무슬렘 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조금씩, 조금씩 바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본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며 사랑하게 되었고,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동족으로 받아드리면서 “구제와 섬김”의 손길을 펴게 되었고, 어려움에 처한 무슬렘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와 방글라데시와 북한과 중국 연변과 아프가니스탄과 필리핀과 파키스탄 등을 찾아 다니면서 “사랑과 구제와 섬김”의 손길을 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내가 설교를 하지 않았는데도 전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사랑과 섬김”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고마움을 표시하면서 주님께로 예수님께로 한 걸음씩 다가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부족하지만 지난 18년 동안 중국 연변 지역의 불우한 조선족 어린이들 150여 명에게 “사랑과 구제와 섬김”의 손길을 펴면서 돌아보고 있는데 수 많은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너무너무 고마워하면서 지역의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알지도 믿지도 않던 지역회장들의 입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들이 흘러나오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섬김”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랑과 섬김”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초월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또한 “악의 축” 이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을 두 번 방문한 일이 있습니다. 결국 불쌍한 무슬렘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 하나는 지어주게 되었고 2005년 12월 16일 아침 10시 무랃취흐 학교 준공식에 참예하게 되었습니다. 400여명의 어린이들과 100여명의 무슬렘 지도자들이 학교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에 길게 서서 저와 우리 일행을 열렬하게 환호했습니다. 학교 준공식이 거행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무슬렘 지도자들이 대거 참석했습니다. 주지사와 교육감등의 환영사가 있었습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는 내용의 환영사였습니다. 아프간 어린이들이 나와서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발음이 정확한 한국말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400여명 학생들에게 Korean Church 라는 글이 인쇄된 가방과 티셔츠와 학용품 선물을 나눠주었을 때 저들은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가난의 빛이 진하게 드리워져 있었지만 귀엽고 예쁜 얼굴들에 행복한 웃음들이 꽃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사랑과 섬김” 앞에는 정치적인 이념도 종교적인 이념도 아무 힘을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불우한 이웃에게 “사랑과 섬김”의 손길을 펴는 일이 얼마나 귀중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온 몸으로 보고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모두를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를 이루는 일이고 그리고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랑과 섬김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살아가는 “천국 소망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8복을 말씀하시면서 첫째 복과 여덟 번 째 복은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라는 복이었고 팔 복의 결론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2). 예수님께서는 또한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요14:1,2).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요17:1). 사도 바울의 마음과 눈도 항상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 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5:1-3).

사도 요한이야말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면서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계4:1).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손에 책이 있으니”(계5:1). “내가 또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 오는데”(계10:1).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계12:1). “내가 또 보니 어린양이 시온 산에 섰고”(계14:1). “이 일 후에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니”(계18:1). “이 일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19:1).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서 내려와서”(계20: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계21:1).

기독교 신앙의 중심과 목표는 새 하늘과 천국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모두 이 세상의 본향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사모했다고 기록했습니다(히11:16). 올바른 “신앙생활” 이란 하늘을 바라보며 “천국 소망”을 지니고 가볍고 기쁘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밤의 한 경점”(시90:4) 같고 “아침에 돋는 풀”(사90:5) 같고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게”(약4:14) 같다고 성경 말씀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늘 집을 바라보고 준비하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마라나타” 라는 인사를 주고 받았는데 “마라나타” 라는 말의 뜻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였습니다. 한국교회의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며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한 평생을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무디 라고 불리던 이성봉 목사님은 밤에 자다가 옆집 방앗간에서 방아 찢는 소리만 들려도 주님이 오시지 않나 하고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쳐다보곤 하셨다는 간증을 저는 중학생 때 열 번이나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면서 손수 지은 “주님 고대가”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고적하고 쓸쓸한 빈 들판에서, 희미한 등불만 밝히어 놓고 오실 줄만 고대하고 기다리오니,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주님 계신 그 곳에 가고 싶어요.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천 년을 하루같이 기다린 주님, 내 영혼 당하는 것 볼 수 없어서 이 시간도 기다리고 계신 내 주님, 오 주여 이 시간에 오시 옵소서.”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 신자들은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지녔던 “천국 사모의 복음 신앙”을 다 내어 버리고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성공과 장수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불신앙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유익한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오히려 가난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을 귀중하게 여기는 “십자가 복음 신앙”을 회복하게 되기를 바라고 소원합니다.

지금까지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다섯 가지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신앙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첫째로 무릎 꿇고 울면서 처절하게 회개하는 “회개와 참회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둘째로 시간과 물질과 몸과 눈물을 쏟아 드리는 “주일 성수와 예배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셋째로 모두를 끌어안고 울면서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넷째로 모두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사랑과 섬김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고, 다섯째로 세상의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천국을 바라보는 “천국 사모의 복음 신앙”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만약 한국교회가 불신앙의 위기를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세속화의 불신앙에 빠져있고, 교만과 독선의 불신앙에 빠져있고, 분열과 분쟁의 불신앙에 빠져있고, 무정함과 무관심과 멸시의 불신앙에 빠져있고, 세상 사랑의 불신앙에 빠져있게 된다면, 여섯째로 불가피하지만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는 일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한 달 전인 지난 9월 6일 아침 신앙의 동료 몇 분들과 함께 모여 조찬을 하면서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나도 모르게 갑자기 나의 한 평생을 돌아보면서 부족한 나에게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쏟아 부어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이 계셨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내 말을 듣고 있던 최일식 목사님이 내가 11살 때부터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부모와 고향을 떠나 한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외롭게 살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특별한 사랑과 은혜를 받게 하셨다는 설명을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그렇다고 동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대화 끝에 나는 지금 한국교회가 올바른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회복하시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시다가 마지막에 사용하신 방법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70년 동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몽둥이로 두들겨 맞게 하신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이스라앨 백성들이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시 137:1)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처절한 “회개와 참회의 신앙”과, “주일 성수와 예배의 신앙”과, “화해와 평화와 하나됨의 신앙”과. “사랑과 섬김의 신앙”과, “천국 사모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 오백 여명이 70년은 너무 길고 7년도 너무 길로 일곱 달만이라도 탈레반에게 잡혀가서 매일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일이 필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선 내가 잡혀가서 매일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일이 필요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최일식 목사님과 여러분들이 너무너무 고맙다는 말들을 하고 또 했습니다. 사실 사사 시대를 돌아보면 일곱 번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일이 있었고, 초대교회 300년 동안의 역사를 돌아보면 열 번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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