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언론 보도로 인해 “창조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해 대중들의 관심이 갑자기 증폭되었습니다. 그런데 언론은 커녕 그리스도인들조차 그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제게도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은 무엇이 다르냐고 질문하는 분들이 갑자기 많아졌습니다. 한때 창조과학의 중심에 있던 신학자로서 이 문제에 대해 바른 이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절실히 느껴 여기 소개드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신학의 중요성에 대해서 관심만이라도 가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두 단어는 다른 개념입니다.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은 다음과 같이 이름은 유사하나 다릅니다! 그 다름을 여기 소개합니다.
1.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의 도구
탁월한 조직신학자였던 고(故) 스탠리 그랜츠는 모든 사람은 신학도(자)라고 말합니다. 다만 신학이라고 다 같은 신학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바른교회와 사이비이단교회가 전혀 다른 것처럼 좋은 신학과 나쁜신학, 바른 신학과 그릇된 신학 등이 있는 거겠지요. 따라서 그 신학의 도구와 출발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창조과학은 초월을 내재의 도구(피조세상의 도구, causa instrumentales)를 가지고 다루려는 신앙 학문입니다. 반면 창조신학은 초월 계시로서의 창조주 하나님(causa prima)과 그 피조세계에 대해 계시를 기반으로 하는 신앙 학문입니다. 따라서 창조신학은 초월을 내재의 도구를 가지고 함부로 다루려고 하지 않습니다(finitum est non capax infiniti).
2.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의 기본 입장
‘창조과학’(CreationScience)은 정규 과학계에서 여전히 논란 가운데 있는 안식교를 거쳐 1960년대 미남침례교도였던 헨리 모리스(H. M. Morris)를 중심으로 시작된 연륜이 겨우 50여 년 된 (신진) 학문으로 주로 ICR(Institute for Creation Research)의 설립을 주도한 헨리 모리스와 듀안 기쉬(D. Gish)로부터 이론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미 대법원이 참고했던 ‘맥리안 대 아칸소 교육위원회 소송사건’(Mclean v. arkansas Board of Education)의 지방법원에서 창조론 측의 공식 입장으로 정리하였는데 그 내용은 “①세계는 무로부터 창조되었으며 ②돌연변이와 자연선택설을 진화의 매커니즘으로 설명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며 ③현존하는 종들은 고정되어 있고 한 종이 다른 종으로 진화하는 것(대진화, Macroevolution)은 불가능하다. ④원숭이와 인간의 조상이 다르다. ⑤지질학적 형성은 대격변(catastrophy, 즉 Genesis Flood)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산에서 바다 생물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은 대홍수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⑥마지막으로 지구의 창조는 젊다. 즉 6000년 내지 1만 년 전에 생성되었다”는 6 가지 주요 주장을 기반으로 합니다.
반면에 창조신학은 이 같은 과학적 교리 표명이 아닌 구속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전반적 창조 섭리를 다룹니다. 즉 구속의 주께서 세상의 모든 환경, 생태, 문화, 예술, 정치, 사회, 경제, 과학, 학문, 역사 속에서 어떻게 창조와 구속의 주로서 섭리하시는 지를 통합적이고 신학적으로 연구합니다.
3. 창조과학과 창조신학의 성경 해석
창조과학이 성경을 과학(적)교과서로 여기는 반면 창조신학은 성경이 바르게 해석되어야 하는 책으로 보고, 역사 속에서 신앙의 선배들(어거스틴,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이 다져온 성경해석학에 기반을 둔 성령의 학문입니다.
창조과학이 성경을 문자적-과학적 해석 가능한 책으로 보는 과학에 기반을 둔 내재적 자연과학에 기반을 둔 학문인 반면, 창조신학은 과학을 포함하여 성경이 해석되어야 되는 초월적 계시라는 관점에서 <신학에 대한 무지와 무시>로 인해 일어나는 미숙한 성경 해석을 경계하면서, 역사 속 해석과 성경 해석학에 기반 한 바른 성경 해석과 창조 세상에 대한 바른 해석을 추구합니다. 즉 창조신학은 무엇이 바른 해석인지를 늘 추구합니다.
결국 창조과학은 (옳든 그르든) 성경의 문자적 “과학” 해석을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20세기 중반 나타난 새로운 신앙운동이고, 창조신학은 기독교 역사에 기반 한 “신학”의 한 부분입니다. 물론 이렇게 서로 다르다는 것이 어떤 특정한 것이 틀리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세요.
4. 변증의 측면에서 본 창조과학과 창조신학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 辨證學)은 비기독교철학에 대응하는 기독교 철학의 증명을 말합니다. 즉 변증학의 목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함으로써 기독교 유신론(theism)을 증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변증학의 영역은 어떤 한 부분(예를 들면 과학적 변증)만이 아니라 기독교 전체라고 보면 됩니다. 기독교 유신론의 본질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으로 이어지는 전우주적인 면을 다루며 통일체적이므로 변증학은 매우 포괄적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변증학은 모든 신앙과 신학의 공동 관심사가 되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변증과 교리(敎理)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가진 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증학과 신학은 서로 상호의존적인 것이지요.
반면에 기독교 험증학(Christian Evidences, 驗證學)은 기독교의 사실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문을 말합니다. 좁게 말하면 기독교 변증학에서 그 존재를 증명한 하나님이 인류에게 베푸시는 기독교의 ‘구원 교리’의 타당성과 참됨을 변증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버나드 램(Bernard Ramm)은 “험증학이 철학적이거나 이론적이라기보다는, 과학적이며 역사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의 사실성의 증명에 관심을 가지는 학문”이라 했습니다. 기독교의 전제론적(presuppositional) 변증학자인 코넬리우스 반 틸(Conelius Van Til)도 험증학을 과학(여기서 과학은 자연과학만이 아닌 광범위한 의미의 과학을 말함, 즉 학문에 가까운 말)의 공격으로부터 기독교 유신론을 변호하는 학문이라 정의 했습니다. 박형룡 박사는 “변증학은 특히 기독교 신론의 지위를 확보하기를 목적하고 험증학은 주로 기독교의 경험 사실에 관한 정해(正解)를 유지하기에 노력한다. 따라서 전자는 사실보다 철학에 관심을 갖고, 후자는 철학보다 사실을 더 많이 취급하게 된다.”(<험증학>, 박형룡 저작 선집 Ⅻ,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8, 23)고 말합니다. 이것은 반 틸(Conelius Van Til)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조과학은 “험증적”이며 창조신학은 창조 신앙과 관련하여 변증과 험증을 포함하는 보다 더 포괄적이고 종합적이라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 두 용어는 구분 없이 동일하게 쓰여 지기도 합니다. 그만큼 두 단어의 의미가 긴밀하고 가깝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용어가 다른 만큼 엄밀히 말하면 위에 설명한 것처럼 구분이 가능하겠지요.
5. 마지막으로 과학의 반증 가능성(反證可能性, Falsifiability)과 관련하여
반증 가능성이란 과학과 과학이 아닌 것을 구별하는 기준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즉 어느 가설이 반증 가능성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가설이 어떠한 실험이나 관측에 의해서 반증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학적 진술의 자격이 있으려면 반드시 반증될 여지를 구획의 기준으로 가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을 시험 가능성 또는 반박 가능성이라고도 합니다.
종전에는 과학적 진술이란 단지 경험에 의해 그 진정성을 알 수 있다고 보았는 데 칼 포퍼(Karl R. Popper, 1902. 7.28- 1994. 9.17)에 의하면 반증 가능성이 있는 진술이 과학적 진술이라고 역설적으로 본 것이지요. 예를 들어보면, 이 이론에 따를 경우 순수 존재적인 성격의 형이상학적 이론들, 프로이트, 아들러, 칼 융의 정신분석이론, 점성술 지식 같은 이론들은 반증 가능하거나 시험 가능하지가 않습니다. 이런 영역들은 과학적 영역이 아닌 유사과학(pseudoscience)에 속하는 것입니다. 칼 포퍼에 따르면 창조과학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측이 불가능하고 시험이 불가능하며 재현 불가능하다는 면에서 반증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창조과학이라는 말과 달리 창조, 창조신앙, 창조론, 창조신학, 기원에 대한 과학철학 등은 종교 언어적 충돌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큰 문제 없이 그리스도인들이 쓸 수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창조과학"이라는 말 자체는 스스로 언어적 모순과 충돌(반증가능하지 않은 '창조'와 반증가능한 '과학'이라는 서로 충돌하는 두 단어의 결합) 딜레마에 늘 부딪히게 되는 겁니다. 창조과학은 언어적 충돌 뿐 아니라 <제1원인인 창조(causa prima)를 제2원인인 과학(causa secundae, instrumentales> 속(아래)에 묶어둠으로 창조에 대한 신학과 철학과 학문의 영역을 차단하고 폐쇄하여 스스로 <과학 서적이 아닌 성경>과 <과학이 전부가 아닌 신앙과 삶>에 대해 해석의 풍성함을 버리거나 잃게 될 가능성에 빠지게 됩니다. 베이컨이 말하는 자체 '동굴화'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창조과학의 영역이, 신앙 학문보다는 신앙 운동의 영역에 늘 머물고 신앙의 풍성한 길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 의미를 깨닫고 이제는 풍성한 신앙의 길(요 10:10; 엡 4:14; 히 5:12-14)로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게 초창기 '창조과학 운동의 중심'에 섰던 제가 간곡히 기도하는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