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필자가 소속된 단체에서는 해마다 여름이면 교계의 중요한 이슈가 되는 주제를 선정하여 세미나를 열고 있다. 관심을 모은 주제인 만큼 회원들의 관심도도 해를 거듭할수록 고조되고 있다.
올해도 루터 종교 개혁 500주년을 맞이하여 위의 주제로 교계의 존경받는 분의 특강에 함여 하였다. 강사는 먼저 한국 교회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를 그는 ‘본질에서 이탈 하였다’라고 지적 하였다.
교회의 본질은 첫째, 예배요. 둘째, 교육이요. 셋째는 친교요. 넷째는 본질적인 것들을 지적한데 대해 이의를 논할 바가 아니다. 그리고 한국의 대교회들은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ty)을 버리고 본래의 개혁 주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에는 모두가 긍정의 신호를 보내었고 칼뱅이 말한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처럼 교회는 지속적으로 개혁해 가야 한다는 내용에는 함께 동의를 보내기도 하였다.
결론에서 강사는 첫째로 남과 북이 복음으로 먼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과 십자가를 통한 사랑으로 화합해야 하고 한국 교회가 그 중심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것은 모든 교회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1907년 일으켰던 부흥 운동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것으로 결론을 지었다.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내용이나 결론에서 지적한 십자가의 사랑으로 화합해야 한다는데 누가 이의를 달 사람이 있겟는가?
여기에 좀 아쉬운 점이 있어 기술해 보려고 한다.
오늘의 종교가 사회 발전에 공헌 하고 있는가? 혹은 저해 요인인가 하는 것은 많은 사회학 자들과 비교종교가들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여러 논의가 되어온 문제이다.
위대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위대한 저서인 <역사의 연구에서 종교가 역사 속에서 해온 역할 중 하나로 교회는 교회를 위한 존재라는 단순한 이유 보다는 언제나 어떤 사명과 운동이 중요 하다는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회가 부단히 발전 하고 변모해 감으로 새로워지는 사회 현장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변천하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도 새로워 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가 그 본질에 있어서는 변해서는 안 된다. 다만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그 방법과 수단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마침 아들 녀석과의 일을 떠올리게 된다. 아들이 초등학교 1~2학년 때이다. 토요일을 무척이나 기다린다. 이날은 약속대로 TV게임을 할 수 있고 그가 좋아하는 라면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후반 필자가 시골에서 도회지로 유학하여 식량이 부족하고 반찬이 모자랄 식사대용으로 먹던 라면을 말이다.
흰 쌀밥보다 좋아하던 아들 녀석을 바라보시던 할머니의 말씀이 “이 할매 어렸을 적에 쌀밥 먹기가 얼마나 어려웠는디”라고 하시던 말씀에 그때 아들 녀석의 대꾸하는 말이 “할머니 쌀밥이 없으면 라면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응대하며 어머니(할매)를 곤란하게 하던 기억 말이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는 명절이나 귀 빠진 날 먹을 수 있었던 쇠고기를 요즈음은 며칠만 안 먹어도 애들 건강 걱정을 할머니들이 많아졌다. 이렇게 우리사회는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긴 배고픔의 터널로 부터 헤어났다
오늘날은 못 먹어서 병이 생기는 경우보다는 과식하여 병이 생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요즈음의 어린이들에게 지난날의 보릿고개를 이야기 해준들 이해나 할 수 있을까? 이 변화를 주체 적으로 소화하지 못할 정도로 격심하여 육체적 소화 불량에다 정신 적 소화 불량에까지 걸린 듯하다. 이 소화 불량증이 여러 사회에 표출되어 발전된 사회 모습과는 달리 사람은 갈수록 불신, 불만, 불안의 증세는 더 심각 해 지고 있다. 이것은 다분히 양적 성장에다 질적 변화가 뒤 따르지 못한 결과이다.
그러다 보니 제길 찾아 성실히 일하는 사람보다는 잽싸게 새치기 잘하고 요령 잘 피우는 자들이 돋보이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모두 자기 주위는 아랑 곳 없고 ‘앞으로’, ‘성장’이란 구호만 난무하다. 여기에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며 인생을 관조해 보는 것은 낭비로 여긴다. 이제 한국 교회는 양적인 성장에 질적인 문제에 소홀히 한 점은 없는가 뒤돌아보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양적인 면에는 세계에 내어 놓는데 손색이 없으나 교회로 인해 사회가 어두운 면이 제거되고 썩은 부위는 얼마나 정화 돼있나 한번 되짚어 보아야 한다. 사회 문제는 외면하다 시피 한 경우가 오늘의 소화불량증에 걸려 진통을 일으키는 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요즘 필자가 운영하는 센터에는 여러 다문화 가족이 오는데 한국에 거주하기 위하여 등록증을 받아야 하는데 대부분 교육을 주일에 소집하고 시험도 주일에 치르게 된다. 마음은 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싶어도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전 목회지에서 경로당과 교류하던 중 음료수를 드리고 한 주에 한번 간단한 예배를 드려 왔는데 경로당에서 통보가 왔다. ‘다음 주 부터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아쉬움을 표시 했지만 윗선에서 지시가 왔으니 할 수 없다고 한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도 한국 교회의 선교 걸림 돌로 작용하고 있다. 교회의 선교는 예언자 역할과 제사장 역할이 있는데 지금까지 제사장 역할은 차고도 넘치는 지경인데 예언자 역할은 미미한 것 도 부인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눈을 들어 예언자 역할에 눈을 떠야 할 때이다.
여기에 한 술 더 떠 우리 사회는 도덕 불감증도 심각한 상태이다. 보존해야 할 가치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러한 면들을 좀 더 세밀히 진단해 주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안고 강의 장을 나온 사명의 발걸음이 무거워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