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문제에 접근한 최초 신학자
세상에 다양한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과 인간은 역사 속에서 늘 끔찍한 시련과 고통 가운데 악을 경험하여 왔다. 세상과 인간의 역사는 도덕적, 자연적, 사회적 악 속에 몸부림을 치며 문화와 문명을 만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게 모순으로 보이는 선하신 하나님과 악의 공존 문제는 신정론(神正論)의 끝없는 논쟁거리이다.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이 완전하신 존재라면 과연 악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오리겐은 신학자로서 악의 문제를 가장 먼저 본격적으로 접근한 기독교 신학자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악의 창시자일 수는 없다. 오리겐은 악의 신적 기원을 배제하며 이 문제를 접근한다. 악과 물질 사이에 모든 형이상학적인 필연적 관계는 없다. 악은 절대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아니다. 물질이 악의 기원이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다. 오리겐은 사악함은 물질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있는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선에서 멀어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악에 떨어지는 것이다. 선에서 멀어지는 만큼 사람은 악에 다가가게 된다. 선을 소홀히 하면 사람은 선의 반대편으로 이끌리게 마련이다. 다른 악은 없다. 절대적 악 또는 실체(hypostasis)라 할 수 있는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언제나 상대적이다. 악은 선의 부분적인 결핍(缺乏)인 것이다. “확실한 것은 악이 선의 결핍이라는 점이다”.(Certim namque est malum bono carere).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악
이 같은 오리겐의 신정론은 성경 속 바울의 신정론을 따른 것으로 어거스틴에게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이 같은 악(惡)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통제되고 지배된다. 그리고 악은 오히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드러내는 몽학선생으로 작용한다. 어거스틴이 “오! 복 된 죄악이여”(felix culpa)라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신앙적 토대로부터 나온 고백인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칼빈도 이 같은 악의 이중성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악은 사단과 아담의 원죄로부터 시작된 인간의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항하고 복종을 거부할 때 생겨난 것이다. 그렇기는 하나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하나님은 악조차 섭리 가운데 두신다. 하나님은 악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악은 창조된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라는 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완성으로 나아간다. 이 하나님을 닮게 되는 완전함에 이르는 길은 유보되어 있다. 즉 범죄한 인간은 영혼을 정화시킬 ‘불’로 연단된 뒤 그 분과 비슷하게 된다(요일 3:2). 비슷함이란 진보하여 비슷한 어떤 것에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종말에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고전 15:28)이라 한 말씀이 동물이나 나무나 돌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서 모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죄의 모든 찌꺼기에서 깨끗하여 지고 악의의 모든 구름은 완전히 걷히고 이성적 정신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시라는 사실을 느끼거나 이해하거나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충분히 그렇게 하실 수 있다.
오리겐의 보편구원론
그런데 사탄 역시 인간과 같은 영적 존재이므로,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사탄 까지도 구원하시고 피조세계의 모든 존재는 순수한 정신으로 존재하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될 것이다. 오리겐의 종말론이 단순히 악의 존재를 넘어 ‘만유 회복’, ‘보편 구원론’으로 나아가는 이유이다. 진노의 하나님은 근원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이다. 자비로운 하나님의 목적은 악의 만연이나 인류의 저주가 목적이 아니다. 이렇게 오리겐은 낙관적인 보편구원설의 길을 열어놓는다. 그리고 이 견해는 오늘날 신정통주의신학자 칼 바르트에게 까지 연결되고 있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보편구원설을 찾으려는 작업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오히려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