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칼럼] 다문화 가족과 함께 생활 하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서로 갈등을 빚게 마련이다.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각기 다른 상황에서 당연한 결과라고 여겨진다.
얼마 전 한 교포가 남루한 몰골로 센터를 찾아 왔다.
한국에 가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달콤한 말만 듣고 막상 와서 보니 곤경에 처하자 체면을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 왔노라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 거절 할 수 없어 숙소와 필요를 제공해 주었는데, 불가피하게 숙소를 떠나게 되었는데 가면서 현관문에 가득 낙서를 해놓고 갔다.
그것을 지우면서 선한일도 지혜롭게 해야야함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 에게나 삶속에서 갈등을 경험 하게 된다. 이 같은 갈등은 문화인들에게 더욱 복잡하다. 개성이 뚜렷하고 영리 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서울 근교 어느 정신 요양원장의 말에 의하면 “요즘 젊은이들 중 일류 대학 학생들 중에 정신 장애를 앓는 이들이 많이 온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심한 갈등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고 한다. 기독교 역사 이래 교회는 가장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교회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 정신문화를 발전시키는데 공헌이 컸지만 16세기 기독교는 종교 개혁으로 많은 희생과 진통을 겪기도 하였다. 특히 17세기 교회는 크고 작은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교회는 오랜 세월을 통해 각성과 개선으로 마침내 화해와 평화로 갈등을 해소해 왔다. 기독교의 갈등의 본질은 같지만 교리와 신학 ,이단 시비와 교회 이기주의 등이 원인인 경우가 많았다.
경제학자 존 메이나드 케인즈(1883-1946)는 그의 책에서 경제나 정치 철학의 분야에서 20대 후반 이후에 새로운 이론에 영향을 받고 이를 수용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고 통탄해 했다.
특정 기준에의 고집으로 사회 구성원들이 점차로 균일화, 동일화 되어가는 사회는 북한 사회로의 회귀이며 결코 올바른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고정화된 관념을 바꾸지도 못하고 또 바꾸어 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자기의 특정 기준에 순응하여 사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만이 옳고 나머지는 모두 틀리다는 흑백 논리를 주장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크게 보면 대부분 본질을 상실한 무엇에 대해서는 하나같이 똑같은 해답을 잘 적어 내면서도 ‘왜’에 대해서는 아무도 흡족한 해답을 써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득실거리게 마련이다.
나만이 옳다고 생각 하거나 나만이 바르게 산다는 생각 나의 정책만이 제일 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다시 한 번 타인의 기준에서 평가해 보고 관조 할 수 있는 사회 너그러운 이웃 그리고 아량 있는 친구를 만나 보는 것이 어떨까?
오늘 우리 사회의 서식하는 이단 종파들의 특성을 살펴보면 대부분 본질을 상실한 극단 편향 주의에 치우쳐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양극화 된 갈등의 해소를 위해 관심을 기울일 때이다.
특히, 대선을 앞두고 여야의 갈등, 탄기국과 촛불의 갈등. 교계에도 보수와 개혁의 갈등, 가진 자와 소외된 자 등 다양한 계층 간의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이제 ‘나’ 아니면 ‘다’ 아니라는 시야를 벗어나 현장에서 붙잡혀온 간음한 여인에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하시며 용납하고 받아 주셨듯이 본질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라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의 용광로에 용해시켜 치유하는 구도자의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가야 할 것이다.
역사의 분기점을 이룰 이 시점에서 모든 지도자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들이 성숙한 안목과 미래를 내다보는 큰 경륜으로 고질화 되어가는 갈등을 과 불화를 치유하고 평화스럽고 안정이 정착되는 나라가 되기를 소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