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설교] 창조주를 찬양하라 (시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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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기독교학술원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 예배
온누리교회 이재훈 목사. ©기독일보DB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얻는 것은 세 가지 단계를 통해 얻어진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시작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씀하셨다(로마서1:20). 자연 다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사람을통해하나님을알수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이 완성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 그런데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전한 계시로서 예수그리스도를보내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연으로부터시작되고, 창조된사람에게이르며, 최종적으로는 예수그리스도에게서절정을이룬다. 이 단계는 피라미드 모양으로 서로 연결되어 조화를 이룬다. 자연이 넓은 바닥부분을 이루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그 윗부분을 이루고 마지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정점을 이룬다. 물질적인 세상인 자연이 완성된 후 하나님께서는 그 자연의 일부인 흙으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육신을 입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셨다.

시편의 많은 시들이 자연과 인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 시편8편은 그중 앞의 두부분인 자연과 인간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양시이다. 그것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시편을 저에게 다시 배열해보라고 맡기신다면 이 시편8편을 1편으로 배열해보고 싶다. 창세기 1장의 하나님의 창조로 성경이 시작되었듯이 시편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해보는 것도 멋진 일 아닌가!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올바른 관계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이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뒤바뀐 것이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이탈하여 그 관계를 뒤바꾸어 버린 것이 타락이다. 구원이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은 그러한 회복을 가능하게 해주신 것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그 회복을 체험적으로 누리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모든 것이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다. 선원이 바다에서 태양의 고도를 측정함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아내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우리의 방향과 위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시편8편의 찬양을 드리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정상적인 위치에 돌아오는 것이다.

시편8편의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동일하게 온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여기서 아름답다라는 단어는 "위엄있으시다" "장엄하시다"라는 뜻이다.

타락이후 망가진 자연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서 우리는 자연을 보면서 마땅히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해야 한다.

농사짓는 시골에서는 자연의 영향력에 더 가까이 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않은 영혼은 그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못볼 수도 있다. 도리어 자연을 신처럼 섬기는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한다.

도시사회에서는 인간들이 만든 기계에 의존하며 살기 때문에 하늘과 땅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묵상할 기회와 여유가 별로 없다. 도시 위에도 하늘의 별들이 동일하게 빛나지만 화려한 네온싸인과 인공조명에 시야가 가려져서 달과 별을 바라보는 시간과 여유가 별로 없다. 별은 커녕 대낮에 하늘을 보는 여유조차 없을 때가 많다.

구약을 주의깊게 읽을 때에 발견하는 것은 성경기자들이 자연의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관계에 있는 선택된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언약의 하나님'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위로나 인도를 구할 때 '언약의 하나님'이 아닌 '하늘과 땅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산과 골짜기 햇빛과 별을 보며 믿음과 희망의 근거를 얻었다.

다윗은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시121:1)"고 했고, 이사야는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라(사51:6)"고 외친다.

시편36:5-6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공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지극히 민족적인 하나님을 둔 백성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그토록 자주 바라보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은 한 민족의 하나님이시기 이전에 모든 민족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옷이다.

예수님께서도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고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다. 예루살렘을 새끼들을 날개아래 모으는 암탉으로 비유하셨다.

계시록 전체는 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하다. 새 하늘 아래서 펼쳐질 새 땅은 다시 낙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3절에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자연을 또한 통치하고 섭리하고 계심을 찬양한다.

8:3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하나님께서 하늘의 달과 별들을 창조하시고 하늘에 베풀어두셨다고했는데이단어는하나님께서여전히그달과별들을움직이신다는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자연질서를 창조하셨고 그 질서속에서 천체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 자연신론(Deism)이라고 하는 사상은 하나님께서 자연을 창조하신 것은 맞지만, 자연질서대로 움직이도록 해놓으시고 간섭하시지는 않는다고 믿어 많은 사람들이 합리주의적인 사고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하나님께서 달과 별들을 움직이도록 만들어놓으시고 손 떼시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 밤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생물들의 기인한 움직임속에서, 장엄한 바다에서, 태풍의 거센 소리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보여주고 계시는 분이시다. 자연계의 생명의 전율속에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의 떨림이 있다.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자연속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자연안에 그리고 자연뒤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자연은 결코 하나님없이 스스로 완성될 수 없다. 모든 자연은 숨어계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위엄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윗의 찬양은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에게로 옮겨간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다스릴 인간을 창조하시고 피조물의 왕으로서의 존귀함을 더해주셨다.

8:4-6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주를 돌보시나이까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마땅히 찬양해야 하는 것은 인간을 만물의 통치자로 세우셨기 때문이다.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는 표현은 왕에게 사용되는 표현이다. 만물의 왕으로 인간을 세우셨다는 것이다. 만물이 인간의 발 아래 놓여졌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발아래 인간을 두시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인간이외의 피조물들만 그 발 아래 두셨다. 인간은 어떤 면에서 보면 피조물중에 지극히 작고 연약한 존재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보면 얼마나 연약한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연약한 아이들이라도 그들의 입으로 나오는 다스림을 통해 피조계를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연을 다스리는 왕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훼손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그 왕의 권세를 잃어버리고 살아갔다. 왕이 아닌 종과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연을 두려워하게 되고 심지어 자연을 신으로 섬기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십자가로 구속하셔서 다시 왕으로 회복시키셨다. 죄와 반역으로 잃어버린 왕의 주권을 다시 찾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담이 잃어버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되찾았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자로 회복된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기름부으셔서 우리가 왕의 권세를 누리게 하신다. 성령의 능력가운데 우리는 만물을 통치하는 왕의 특권과 권세를 누리며 살 수 있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장 높은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위에 만왕의 왕이 계신다. 우리가 왕의 권세를 누리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앞에 엎드리는 피조물의 왕이 될 때만 보장되는 것이다. 피조물 앞에서 왕의 권세를 가지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나 하나님앞에서 그 권세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영광에 놀라서 감탄하며 찬양한다.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이 보잘것없고 연약해 보이는 인간이 이처럼 광활한 세상을 다스리는 왕으로 삼으셨단 말입니까? 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들은 말씀으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회의를 거쳐서 창조하셨다. 다른 피조물들은 단번에 창조하셨다. 그러나 인간은 형체를 먼저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다른 피조물들은 다른 어떤 것도 닮지 않고 그들 자체의 모양을 따라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에게서 이름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이름을 받았다.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지 못한다.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순간도 그 인간됨의 축복과 영광스러움을 잊지 않고 찬양하며 살아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때 우리는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존귀함을 누리게 된다.

/글=기독교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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