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조은식 기자] 한국복음주의협의회(회장 김명혁 목사, 이하 한복협)가 10일 오전 신촌성결교회에서 "한국교회 신앙의 선배님들을 기리며"란 주제로 2월 월례회를 개최한 가운데,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을 기리며"란 주제로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회장)가 발표했다. 다음은 그의 글 전문이다.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을 기리며
저는 중학생 시절인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대구에서 피난 생활을 했는데 이성봉 목사님께서 서너 달에 한 번씩 이 교회 저 교회에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면서 큰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그분의 설교는 중학생인 저에게 너무 재미가 있었고 감동적이었고 은혜로웠습니다. 저는 늘 앞 자리에 앉아서 이성봉 목사님의 말씀을 듣곤 했는데, 부흥회 도중에 이성봉 목사님께서 찾아서 읽으라는 성경 구절을 미리 암송했다가 성경을 찾지도 않고 즉시 암송하므로 이성봉 목사님의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그때 이성봉 목사님께서 자주 찾아서 읽으라고 하시던 말씀 중에는 시50:15, 시37:4-6, 시81:10, 렘33:3 등이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모두 그대로 했습니다. 새벽기도를 하라고 하면 새벽기도를 열심히 했고, 성경을 암송하라고 하면 성경을 열심히 암송했고, 회개하라고 하면 회개를 열심히 했고, 은혜를 사모하라고 하면 은혜를 열심히 사모했고, 전도를 하라고 하면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금요일 밤에는 철야기도를 하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곤 했는데 기도 제목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곤 했습니다. 나중에는 묻지도 않으시고 “너 기도 제목이 좋은 목사님이 되는 거지” 라고 하시면서 기도를 해주시곤 했습니다. 아마 12 번 정도 안수기도를 받은 것 같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와 축복인지 모릅니다. 저는 죄인 중의 괴수이지만 아직까지 목사로 사역하고 있는 것은 이성봉 목사님께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신 사랑과 은혜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을 너무너무 좋아했고 너무너무 존경했습니다.
제가 2000년 5월 1일 신촌성결교회에서 “이성봉 목사 탄신 100주년 기념 강의”를 했는데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에 대한 신학적 조명” 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를 했습니다. 그때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신앙을 9가지로 기술했습니다. 1)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다. 2)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삶이었다. 3)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다. 4)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하나님 제일주의 신앙이었다. 5)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예수 중심주의 신앙이었다. 6)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회개와 중생의 복음 신앙이었다. 7)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성결의 복음 신앙이었다. 8)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신유의 복음 신앙이었다. 9)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은 재림의 복음 신앙이었다. 그러면 이제부터 이성봉 목사님의 “은혜 체험적 삶”과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삶”과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에 대한 부분을 발췌해서 발표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은혜 체험적 삶”이었습니다. 1900년 7월 4일 평남 강동군 간리에서 이인실씨와 김진실씨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성봉은 복음이 간리에 전해진 해인 1905년(6살때)부터 어머니의 철저한 신앙의 훈련과 감화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고 성경을 읽게 했습니다. 성봉은 6살 때 신약을 일독했고 예배당에서 "누구든지 성신이 인도하시는 대로 기도하시오" 하면 즉시 기도를 해서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소년 이성봉은 김익두 목사님께서 운영하시던 황해도 신천의 경신소학교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김익두 목사님의 신앙적 감화를 받으며 김익두 목사님을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이성봉은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치유의 손길을 체험했습니다. 이성봉은 1925년 동양선교회 성서신학원(현 서울신학대학)에 입학하여 3년 동안 신앙 훈련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깊은 회개와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성서신학원을 졸업하자 이성봉 전도사는 목회와 부흥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1928년부터 3년 동안 계속한 수원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고 이성봉 전도사 자신은 신비한 영적 체험을 했습니다. 1931년부터 6년 동안 계속한 목포에서의 목회사역과 부흥사역에도 회개의 역사와 함께 기사와 이적이 많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고 이성봉 목사님이 1932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는데 신비주의를 주창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목포교회에서 목회할 때 신비주의로 나가는 여신도를 책벌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1936년 신의주 동부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인 부흥사로 활동하게 되었는데 1937년 서울에서 모인 성결교 총회 기간 동안 이성봉 목사님은 성령의 뜨거운 불 세례를 체험했습니다. 1937년부터 이성봉 목사님은 능력의 사자로 가는 곳마다 강한 성령의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1937년 용정에서 부흥회를 인도할 때는 2,000여명이 회개하여 자복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1938년에는 한 해 동안에 50여 회 이상 부흥회를 인도하며 회개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1965년 8월 2일 주님 품으로 돌아가시기 까지 37년 동안 한국과 만주와 일본과 미국 등지에서 수 많은 부흥회를 인도하는 동안 자기 스스로 수 많은 영적 체험을 계속하며 기사와 이적을 동반하는 회개와 부흥의 역사를 많이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신비주의는 항상 경계했습니다. 가슴은 뜨거워야 하지만 머리까지 뜨거워지면 안 된다고 항상 경고했습니다. 지식과 기술과 경영과 각종 프로그램과 행사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은혜 체험과 성령의 역사에 붙잡혀서 한 평생을 살며 사역한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사역은 우리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구령과 교회부흥에 헌신한 삶”이었습니다. 잠자는 교회를 일깨우기 위해 농어촌 교회까지 찾아가서 부흥회를 인도한 부흥사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모든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심지어 청주에서 있었든 셋째 딸의 결혼식에 인사하러 올라가서도 몇 마디 인사를 하고는 이어 전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구령의 사명 완수를 위해서 그의 온 정력 모든 시간과 물질과 심지어 가족까지 다 희생의 제물로 주님께 바쳤습니다. 순회 집회하는 부흥 목사로 불가피하게 가족을 위해서 작은 집 한 채를 준비했던 일이 있는데 얼마 안 가서 어떤 교회 건축의 딱한 사정을 듣고 근근이 장만한 그 집을 선뜻 팔아 전도사의 손에 들려주고 가족은 셋방으로 옮겨 간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만주에서 집회를 인도하던 중 어머니 병환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봉 목사님은 고민하며 기도하다가 결국 어머니를 주님께 맡기고 집회를 계속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6.25 동란 이후에는 무너진 성결교회 제단 하나하나를 다시 세우는 교회 재건 운동을 일으켰고 마지막에는 일체의 큰 집회나 외부 집회를 단절하고 매일 수 십 리씩 걸어 다니며 농어촌 교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소 구루마로 덜커덩 덜커덩 돌아다니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리어카를 타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전거 꽁무니에 타고 가다가 험한 길에 넘어져서 버드럭 거리기도 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때로는 트럭 신세도 졌습니다. 장마통에 지게로 전도 기구를 짊어지고 걷기도 했습니다. 고장 난 차를 떠밀고 대관령에서 비를 흠뻑 맞아가며 넘기도 했습니다. 새벽 차를 타고 종일 차 속에서 시달려 정신을 못 차리고 허덕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밤낮 침식을 잊고 하루에 천여 리를 차 속에서 산 때도 드문드문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수고와 고난의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때로는 1년에 82곳의 집회를 인도했고 때로는 하루에 5, 6회의 집회를 인도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순수한 구령과 복음 전파보다는 자기 교회 확장에 그리고 자기 희생보다는 대우 받음에 치중하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영혼 사랑과 교회 사랑에 사로잡혀 복음 전파에 한 평생을 헌신하며 수고와 고난과 섬김의 길을 걸어가신 이성봉 목사님의 삶과 사역은 우리들에게 감동적인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이성봉 목사님의 삶은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청년 시절부터 철저한 회개에 기초를 둔 성결하고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어떤 애착을 두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성의 정욕과 물질의 탐욕을 항상 경계하는 금욕적 삶을 살았습니다. 돈과 이성의 유혹에 빠지면 목회자의 삶은 끝장이란 말을 거듭해서 강조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거듭해서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부흥회 때마다 "허사가"를 즐겨 부르곤 했습니다. "꿈결같은 이 세상에 산다면 늘 살까 일생의 향락 좋대도 바람을 잡누나 험한 세월 고난 풍파 일장 춘몽이 아닌가 슬프도다 인생들아 어디로 달려 가느냐" "세상만사 살피니 참 헛되구나 부귀영화 장수는 무엇하리요 고대광실 높은 집 문전 옥답도 우리 한번 죽으면 일장의 춘몽." 그래서 정성구 교수는 이성봉 목사님은 "성경과 복음으로 시작해서 허무주의로 마감하는 느낌이다" 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를 비판적으로만 보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현세 부정을 통한 현세 긍정적 신앙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현세 부정을 통한 내세 긍정적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현세 부정적 요소가 나타나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빌4:7-8). 이성봉 목사님의 신앙과 설교에 일종의 염세주의 또는 허무주의적 정서가 나타나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현실 교회와 사회에 대해 무책임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이성봉 목사님은 염세주의나 허무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영안이 밝은 사람은 인생의 존귀를 발견하는 한편에 또한 세상이 헛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고 세상을 비관하는 염세주의도 아니요, 세상을 무시하는 허무주의도 아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땅에 있으면서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 한 것은 더욱 아름다운 본향을 사모함이니 이 말은 천국에 목적을 두고 세상에 목적을 두지 않는 건전한 인생관을 말한다." 이성봉 목사님은 세상에 대한 애착을 부정한 것이지 세상 안에서의 믿음의 삶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로는 문화변혁주의적 개혁주의 신학이나 순교적 신앙을 주창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과 돈과 명예를 너무 좋아하는 세속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현대교회 목회자들의 삶의 동향에 비추어 볼 때 이성봉 목사님의 "허무주의적 정서"가 깃들어 있는 현세 초월적 청빈의 삶은 우리들에게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성봉 목사님의 삶이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이었다는 말씀을 몇 마디 더 하려고 합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는 부흥회를 인도하실 때마다 사례비를 적지 않게 받으시곤 했지만 그 사례비를 자기 개인이나 가족을 위해서 사용하시는 것보다는 작은 교회들과 어려움에 처한 교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결국 사모님과 세 명의 딸들은 가난한 살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셋째 딸인 의숙양이 정신여고를 다니고 있었는데 교복대신 남루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성봉 목사님 댁을 방문한 김동수 청년이 의숙양을 보고 가정부라고 생각했다가 이 목사님의 딸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고 의숙양과 교제를 하게 되었고 결국 결혼까지 했습니다. 김동수 청년은 나중에 한국도자기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들을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합니다. 이성봉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한 어느 교회의 담임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이성봉 목사님께서 받으시는 사례비를 자기를 위해서 사용하시지 않는 다는 이야기를 들은 담임 목사님이 이성봉 목사님께 사례비를 드리는 대신 아주 값비싼 귀중한 선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께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는 대신 이런 것을 주면 내가 어떻게 사용하냐고 짜증을 내셨다고 했습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내가 본 이성봉 목사” 라는 글을 일부를 인용합니다. “그는 재물 관리에 성공하신 분이시다. 그 당시 어떤 부흥사보다도 부흥회를 인도한 후에 사례비를 많이 받으신 분이다. 그러나 그는 물질을 초월했다. 물질 관리에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도에 첫 목회지인 공주교회에서 시무할 때 이 목사님이 오셔서 집회를 인도하셨다. 집회가 끝나고 얼마 안 되는 사례비를 드렸더니 그 봉투에서 돈을 꺼내 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세어 보셨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 중에서 반을 꺼내주면서 ‘이 것은 정 전도사의 몫이야’ 하시고는 다시 반을 봉투에 집어넣더니 ‘전부를 정 전도사에게 주고 싶은데 어떤 가난한 전도사를 돕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반만 준다’고 하시면서 미안해하셨다. 그분은 물질에 청렴하신 분이다. 내가 듣기로는 사모님과 딸들에게는 지극히 인색한 분이었다고 한다.”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이야말로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에 사로 잡혀 구령과 교회부흥 사역에 헌신하시면서 가난과 고난과 섬김의 삶을 사신 그리고 현세를 초월한 깨끗한 청빈의 삶을 사신 너무너무 귀중하고 보배로운 신앙의 선배님이라고 생각하며 이성봉 목사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마음을 지니고 목사님을 기립니다.
/글=한복협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