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신학칼럼] 문화 코드를 잘못 읽은 정부의 미숙한 이슬람 '할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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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덕영 박사 '신앙으로 본 종교와 음식'
▲창조신학연구소장·식품제조가공기사·QC1급 조덕영 박사

창조주 하나님의 먹거리 언약

성경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지구상 유일한 존재다. 그 인간과 하나님은 언약을 맺는다. 그 첫 언약은 놀랍게도 먹거리 언약이었다. 인류를 결국 타락에 이르도록 만든 이 언약에 대해 신학은 대단히 다양한 해석을 내놓곤 한다. 사단으로 말미암아 인간은 이 먹거리 언약을 어김으로 그만 에덴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말았다. 신학적 논의를 떠나 이 먹거리 언약 안에서 인류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과 달리 어떤 형태든 먹거리가 없다면 생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의 역사는 음식의 역사와 맞닿아 있기 마련이다. 기독교를 떠나 다른 종교들도 나름대로의 역사를 가진다. 그 종교 속에서 음식에 대한 율례를 남기고 있다.

유대인들의 허용된 음식(“코셔”)

성경 레위기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나 사물, 가축, 짐승은 모두 세 가지 중 하나에 속한다. 즉 정한 것, 부정한 것, 거룩한 것 가운데 하나다. 모세의 레위기 시민법(civil laws) 가운데 식사와 관련된 법(주로 레위기 11장 1-43절)을 "카샤룻"이라 하고, 먹기에 합당한 음식을 가리켜 "코셔"(kosher), 먹을 수 없거나 쓸 수 없는 그릇은 "트라이프"라 한다. 레위기 법에 따른 거룩한 도살의식을 유대인들은 "셰히타"라 하는 데, 특별히 훈련 받아 셰히타를 행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쇼헷")만 이 일을 할 수 있다. ​

기독교와 달리 유대교는 이렇게 은혜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약 율법에 충실하려고 한다. 이것이 ‘율법종교’와 ‘은혜종교’의 차이이기도 하다. 유럽 도시들을 거닐다 보면 유대인들이 있는 곳 어디든지 유대인 식당들이 자주 눈에 띤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유대 식당임을 알리는 히브리어로 “코셔” 표시가 다윗의 별 마크와 함께 있다. 나치 하 독일 땅에서 처절하게 핍박 받던 민족 유대인의 코셔 식당이 베를린 한복판에도 있었다. 총리 관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물론 만일의 사고에 대비한 독일 당국의 경호원들이 항상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허용된 음식(“할랄”)

이슬람이 태동한 것은 7세기였다. 무함마드는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이슬람의 할랄이 어떤 식으로든 성경 토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이슬람에 있어 먹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좋은 것을 바르게 먹고 올바로 행동하는 것이 그들 종교의 율법이다. 허용된 음식은 “할랄”(halal), 금지된 음식은 “하람”(haram), 권장되지 않는 음식은 “마크루”(makruuh)라고 한다. 근본적으로 이슬람의 섭생법은 “소박하고 검소하게”이다. 과음과 과식을 전혀 권장하지 않는다. 무슬림 5대 의무 사항 중 하나인 라마단(ramadaan) 금식 기간이 있는 것도 이슬람인들이 소박하고 검소한 식생을 유지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물론 그렇다고 무슬림들이 모두 먹는 것을 절제하는 것은 아니다. 신이 허락한 음식이라면 그들에게도 자유롭게 먹고 즐길 자유가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코셔’처럼 무슬림들도 ‘할랄’ 인증을 통해 자신들의 먹거리 식당들의 정체성을 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으로 본 기독교의 먹거리

1) 식물은 우리를 세우지 못 한다- 먹거리 유익은 아주 작은 유익에 불과하다(고전 13:8)

구약에 유대섭생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는 이렇다할 음식 규제가 없다. 무슨 이유일까? 이것은 일반은총과 관련이 있다. 즉 믿지 않는 이들도 누릴 수 있는 자연 은총과 관련된다. 물론 인간에게 바른 먹거리의 유익은 분명히 있다(단 10장). 특별히 피 먹는 일은 권장할 것이 못 된다. 하지만 평범하게 먹든 잘 먹든 작은 유익일 뿐이요 영생을 믿는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약간의 유익(수명 연장, 육체적 건강)이 있을 뿐이다. 건강하게 살아도 결국 인간은 언젠가 죽게 마련이다(시 90:10).

세우지 못 한다는 말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다. 본질상, 잘 먹는 유럽 사람들이나 가난한 아프리카 사람들이나 우상 식물을 먹는 자들이나 먹지 않는 자들이나 식물은 우리의 영적 삶을 세우는 일과 별 관련이 없다. 음식은 선하지만, 거룩과 무관하다.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경건해지는 것은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정결법과 안식일 규정을 철저히 준수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정결하지도, 안식을 누리지도 못했다.

경건에 이르는 길을 사도 바울은 말씀과 기도, 야고보는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고 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들은 그 자체로 속된 것은 없다. 다만, 부정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만 부정할 뿐이다.

2) 하지만 자유함이 믿음 약한 자를 넘어지게 만드는 장애물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라(고전 13:9-12)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요 우리를 세우는 것도 아니므로 먹든지 안 먹든지 별 문제는 없다. 하지만 자유 하더라도 절제할 필요가 있다. 믿음 약한 사람들은 사소한 것에도 믿음의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형제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되고 형제의 양심을 상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것들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약한 자를 실족케 함은 아주 큰 죄이다(마 18:6). 자유하다고 목사가 거리낌 없이 아무 것이나 함부로 먹는 것을 보고 초신자들이 멋대로 따라하면 교회는 질서가 무너지며 혼란이 발생한다. 사실 목사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이든 먹어도 아무 문제없다고 보양식조차 함부로 거리낌 없이 즐기는 경우가 있으나 때론 조심해야 한다. 필자는 애완 동물을 아주 사랑하는(?) 어느 기독언론 기자가 사철탕 등 보양식 즐기는 교회지도자들을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강하게 비판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3)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 신앙 지식보다 앞선 복음을 위한 배려와 사랑(13절)

먹어도 아무 상관없는 우상 제물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어떤 개인적 처방을 하고 있을까? 바울은 무엇을 먹어도 아무 상관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절제한다. 복음만 전해진다면 고기 한 점 덜 먹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올바른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배려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복음의 대선배 사도 바울의 선한 마음과 결단을 배울 필요가 있다.

필자는 과거 부산 집회 가서 하루 세끼를 모두 회만 먹은 적이 있다. 집회 장소와 대접해주시는 분들이 모두 다르다보니 생긴 불상사(?)였다. 내륙 사람이라 회를 그다지 먹을 기회가 많지 않았던 내게는 아주 큰 고역(苦役)이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웃을 배려하는 것이 사랑의 마음이다(1-3절). 대접해주시는 분들의 준비된 사랑을 생각해서 거부 하지 못하고 필자는 하루 종일 회를 꾸역꾸역 열심히 먹었고 속은 그리 편치는 않았다. 그래도 정말 고맙고 감사했다.

사도 바울의 개인적 처방은 신학적 지식과 처방보다 사랑이 먼저였다. 사도 바울은 먹어도 상관없는 우상에 바쳐진 제물을 형제들을 위한 배려로 평생 먹지 않겠다고 고백한다. 과연 목사들이 강아지를 친자식처럼 여기는 형제들을 위해 사철탕 먹기를 금할 수 있을까? 이것이 범인(凡人)들은 흉내 내기 어려운 사도 바울의 결단이었다.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된다(딤전 4:1-3).

문화 코드를 잘못 읽은 정부의 미숙한 이슬람 “할랄” 정책

정부는 2015년 1월 12일 대통령 연두기자회견을 통해 ‘농업분야가 FTA를 발판 삼아 중국•동남아를 넘어서 할랄 시장까지도 진출할 수 있는 수출산업으로 키워나가겠다’고 했고 대통령이 2015년 3월 초 중동 4개국을 순방하면서, 아랍에미리트(UAE)와 「할랄식품분야 협력증진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가는 곳마다 할랄 식품 제조에 한국 식품들이 참여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당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요청을 하였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그 해 3월 “외식기업 해외진출 활성화 방안”으로, ‘할랄 식자재 전문 인력 양성 지원’ ‘할랄 인증 정보 지원’ ‘할랄에 부합하는 한식 레시피 개발’ 등 지원정책을 마련한다고 허둥댄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정책추진에 대한 후속 조치였다. 강원도와 전북 익산 등에서 정책적 반발이 일어난 것도 그 같은 정부의 할랄 정책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었다.

이슬람은 남녀차별이 심하고 남녀유별 식탁이 관례화 되어 있는 체제다. 또한 표면적으로는 꾸란에 할랄과 하람 음식에 대한 구분이 명시되어 있어 혼란의 여지가 없을 듯하나 전혀 그렇지 않다. 이슬람 법학파마다 그 해석에 있어 다른 목소리가 존재한다. 즉 할랄 인증이란 지역마다 국가마다 학파마다 그리 간단 명료한 일이 아니다. 바다에 사는 모든 동물을 할랄로 보는 학파(한발리, 샤피학파)가 있는가 하면 우리가 즐기는 조개, 새우, 바닷가재를 모두 금지하는 학파(하나피)도 있다. 우리 민족이 유난히 보양식으로 즐기는 장어를 금지하는 학파(말리키)도 있다. 대부분의 국민이 미꾸라지와 장어를 즐기는 우리 민족을 보면 기절 초풍할 일이다.

이런 중동에 가서 아랍 사람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술과 돼지고기와 개고기와 피를 즐기며 비 아랍 국가인 한국의 여성대통령이 우리가 “할랄”을 국가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도와달라고 했으니 해당정부는 얼마나 당혹해했을까! 정부에는 그렇게도 종교와 식품 정책 분야에 대한 인재가 없단 말인가! 정말 한심한 정책이 아닐 수 없다. 정부는 이 일을 추진 한다고 얼마나 정책 낭비와 재정 낭비와 시간 낭비를 초래하였을까? 문화융성을 한다면서 문화코드를 아주 잘못 읽었다.

종교 음식은 정부가 관여할 일이 전혀 아니다

종교의 자유에 정부가 개입할 수 없는 것처럼 종교 음식에는 더더욱 관여할 필요와 이유가 없다. 정부가 이 같은 기본 원리도 몰랐다면 정말 한심한 정부다. 그것을 직언할 관리도 한 사람 없었을까? 동물을 도축하려면 무슬림은 도축할 동물의 머리를 이슬람 성지인 메카를 향하게 하고 돌려 눕히거나 든 채 날카로운 칼로 목을 따 모든 피를 제거한다(dhabiyihah라는 의식). 이것은 반드시 ‘비스밀라’ 혹은 ‘알라 알-아크바르’(‘알라신은 위대하다’)라는 이름으로 공인된 무슬림이 하는 것이다. 정부가 “할랄”을 위해 무슬림 공무원을 대거 선발해야할까? 즉 이런 것들은 정부가 개입할 일이 아니라 수익을 기대하는 기업이 종교적 신념에 따라 하는 것이지 정부는 절대 개입하지 말아야 하는 종교적 행위인 것이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조직이다. 지속 가능하고 이윤을 남길 수만 있다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정부가 개입 안 해도, 때로는 정부가 하지 말라고 권장해도 기업은 자신들 신념에 따라 무슨 일이든 하려고 든다. 종교 음식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당국자들이 이번 일로 “그나마” 큰 교훈을 얻었다면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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