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은 몸을 섞고 피를 나눈 혈연공동체다. 그럼에도 갈등이 있고 싸움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가정이 파산되지 않는 이유는 사랑 때문이 아니라, 가정이 사랑을 이유로 미움과 증오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러한 정서들이 우리에게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을 준다. 이러한 정서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곧 갈등을 담아내는 능력도 되고 파산 위기의 한계점을 감지하게도 한다. 그러나 오직 돈과 이해관계로 모든 상처를 포장할 때, 정서적 센서가 고장 나거나 소통의 부재를 만들고 가정은 파산될 확률이 높아지게 된다.
가정이라는 작은 공동체도 자녀, 부부, 양가(兩家)의 이런저런 대소사의 문제들이 얽히고설키는데 국가공동체의 사정이야 오죽하겠는가? 서로 다른 생각과 사상들, 좌우, 노사의 분열, 다양한 색깔과 계층 등을 하나로 묶는다는 것은 운명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남북분단과 주변나라들과의 복잡한 이해관계도 풀릴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우리 모두 아는 바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다면적이고 복잡한 현실을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는 유혹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자기이념의 틀에 갇힌 사람들은 복잡한 상황을 도표화하고 쉽게 구분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좋음’과 ‘나쁨’, ‘아군’과 ‘적’이라는 가치 외에 다른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심리구조에는 항상 ‘좋음’이 ‘나쁨’이 되고 ‘나쁨’이 ‘좋음’이 되는 가치의 역전(逆轉)이 일어난다. 촛불집회 232만 명의 다양한 시민들, 좌편향, 우편향, 중도, 노동자, 다양한 나이와 색깔들 모두가 좌, 우 이항대립으로 분류될 수는 없다. 우편향의 시각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232만 명의 시민들은 비이성적 집단이나 좌파 빨갱이로 보일 것이고 좌편향의 사람들은 232만 명 모두가 자신들을 편들고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의 레이더망에 모든 것들이 포섭, 정리되고 좌우이데올로기 안에 모든 것을 다 집어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이들이 이렇게 분류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의 불안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안고 있는 실질적인 불안은 전쟁의 발발(勃發)과 적화(赤化) 가능성이다. 우리는 이미 6,25를 통해서 너무도 큰 트라우마를 경험했고 이 세대들의 상처는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지!” 라는 그들의 푸념과 얼굴표정에서 우리는 진실을 읽는다. 우리 모두는 여기에 공감해야 한다. 그들의 시계는 아직 한국전쟁에 멈추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모(母)가 공산주의자에 의해서 총격을 당했다. 상처를 받은 이들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통해서 모든 사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우파의 사명은 종북 빨갱이들을 색출하여 때려잡는 것이다. 이 작업은 이들에게 거룩한 신념이 된다. 모든 불안의 원인은 적에게 있고 이 사실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은 모두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사람이 된다. 적극적 우편향이 아니거나 약간의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다 빨갱이로 보이게 된다. 이것이 편집증(paranoid)의 메커니즘이다. 편집증은 상처와 불안을 내 안에서 다루어 낼 수 없는 심리적 상태를 말한다.
두려움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경우, 불안을 달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일까? 불안의 원인을 밖에 두는 것이다. 그러나 불안을 담을 수 있는 ‘틀’은 사실 외부에 없다. 인간의 마음 안에만 이 틀이 실재한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이 환상이 아니라 실재인 이유는 그 환상이 실재 이상으로 영향력을 갖기 때문이다. 불안을 밖으로 내 보낼 때 나는 ‘좋음’이고 밖은 ‘나쁨’이 된다. 이 세상의 모든 분열은 사실 인간의 내면에서 먼저 발생한 것이고 이것이 외부로 공유된 것이다. “이 모든 악순환의 원인은 이북의 지령을 받은 놈들의 소행 때문이야!” 더 심하면 “현재 모든 정부요직과 국회의사당은 이미 빨갱이와 간첩들에 의해 점거 되었고 이제 이 나라가 적화되는 것은 시간문제야! 라는 두려운 환상이 그들의 정신을 덮어버리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모든 것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복잡한 갈등을 일거에 해결해 준다. ‘민주주의’는 나와 다른 견해가 합의에 의해 결정된 사실이라는 것을 받아드리고 그 갈등을 자신 안에서 견디고 소화해 내겠다는 시민들의 의지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불안을 자신 안에서 담아낼 수 없는 사람에게 민주주의는 부담이 된다. 자신과 같은 불안을 느끼는 강력한 리더가 나타나서 이 불안만 해소해 준다면 모든 자율을 반납하고 다른 모든 부조리는 덮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히틀러, 박정희, 전두환, <박근혜대통령=박정희>은 인간의 심리 깊은 바닥에 원래부터 숨어 있었던 원시적 환상의 실현이다.
전쟁을 심리화하는 것에 무리는 있지만 남북분단의 특별한 상황과 이북의 핵무장은 우리 모두를 광적 편집증으로 몰아넣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좌우의 대립이 심하거나 ‘IS’와 같은 ‘근본주의’가 판을 치는 곳에서 오히려 전쟁의 그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 마음 안에서 이항대립, 좌우 이데올로기의 틀로 모든 것을 정리하여 적을 만들고 분열을 만들 때, 그리고 살기에 찬 부정적 에너지가 모여질 때, 외부현실은 그렇게 만들어질 것이고 전쟁은 그만큼 더 가까이에 있게 된다. 원래 어느 집안이든 깡패 같은 놈이 있어 돈을 줘도, 달래도, 호통을 쳐도 안 되는, 골치 아픈 사람이 하나 정도는 있게 마련이다. 이북이 주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구조는 아니지만 막다른 골목에서 어떤 짓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우리 모두를 편집증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편집증이 전쟁의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 한다. 중국과 소련은 전력상 미국과 전쟁을 수행할 능력은 아직 없지만 거대한 무덤이 자기나라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다른 제3국을 통한 대리전쟁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전 세계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트럼프’를 걱정하는 이유도 과연 그가 복잡한 세계적 긴장의 압력을 견디어 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리전쟁의 장소가 한반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막는 최선의 방법은 친미도 해야 하고 중국도 이북도 버릴 수 없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이 우울한 상황을 견디어 내는 것이다. 이러한 건강한 우울은 편집증의 반대개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울을 견디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장하는 일도 원치 않을 것이다. 핵은 무역의 단절이고 허리띠를 졸라매는 우울한 상황을 만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미로 방위 문제도 해결하고 여전히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 강력한 리더가 이것을 마술적으로 해 낼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대중이다. 이들을 이용하여 ‘거짓 이분법’이나 ‘포퓰리즘’으로 대중을 속이는 리더는 더 이상 나오지 말아야 한다. 우리에게는 미워하고 증오할지언정 소통하며 우리 안에 적을 만들지 않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이러한 우울의 터널 끝에 소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무능한 지도자라는 ‘대중의 압박’을 견디어 내며 ‘회복’을 기다릴 수 있는 넓은 가슴과 어깨를 가진 리더가 필요하다. ‘알 수 없음,’ ‘알지 못함’ 을 견디어 내고 국민 스스로가 이 불안을 담아낼 수 있도록 설득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리더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런 건강한 우울 뒤에는 반드시 ‘회복’과 남북 분단의 통일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