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1일에 테헤란에서 한국과 이란의 월드컵 예선전 축구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경기를 며칠 앞두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 생겼다. 이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슬람 보수파 성직자 아야톨라 야즈디가 이란 대표팀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경기를 포기하고 몰수패를 당할 것을 요청한 것이다.
이란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가치관이 있다. 이란의 국가 지도자 운영회가 자국의 월드컵 대표팀에게 몰수패를 주문한 이유는 경기 당일이 타쑤아라는 이란의 애도일과 겹치기 때문이었다. 타쑤아(Tasua)와 아슈라(Ashura)는 시아파 이슬람의 세 번째 이맘인 후세인과,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의 손자이며 후세인의 배다른 형제인 압바스 이븐 알리의 죽음을 애도하는 가장 슬픈 날이다. 타쑤아는 모하람(1월) 달의 아홉째 날이라는 뜻이고 아슈라는 모하람 달의 열째 날이라는 뜻이다. 이 슬픔의 날에 혹시라도 이란이 이기게 되면 손뼉을 치며 기뻐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란은 모하람(1월) 뿐만 아니라 모하람의 다음 달인 싸파르(2월) 20일까지 모든 국가적 경축행사나 개인적 축하행사를 금하고 있다. 이슬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40(아르바인)일 만에 승천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려면 이 애도의 기간 전에 하든지 그 후에 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이 40일 동안에는 여인들이 화장을 하는 것도 불경으로 여길 정도다. 심지어 외국인 여성이 공항에서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출국장으로 가면 불려가서 화장을 지우고야 출국이 가능하다. 남자들도 검은색이나 탁한 색 옷을 입어야 하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크게 웃는 행위는 불경으로 취급된다.
국가적으로는 신앙이 독실한 청년들을 앞세워 알람(후세인과 압바스의 죽음을 상징하는 무거운 조형물)을 치켜들고 가슴을 치며 후세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진을 한다.어떤 이들은 광장이나 모스크에 모여 발을 구르거나 뛰어오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쇠사슬 끝에 칼날을 묶고 빙빙 돌리다가 자신의 등을 후려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머리를 칼로 찍어 피를 흘리면서 후세인을 외치기도 한다. 이 때 등이나 머리에서 피가 흐르는 모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대부분 흰 옷을 입는다. 최근에는 자신의 머리를 칼로 찍는 것은 법으로 금하고 있지만, TV에서는 종일토록 어린이, 청년, 장년, 노인들 그룹 별로 가슴을 치며 애도하는 화면을 연일 방영한다.
이 날은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골목 입구나 공터에 가마솥을 걸어 놓고 요리를 해서 애도 행사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을 대접한다. 타쑤아, 아슈라는 일종의 국가적 행사이자 축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런 의식은 수니파에 대한 증오심을 각인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어떤 외국인이 타쑤아 아슈라 때에 이란을 방문했다가 온 국민이 거리로 나와 검은 옷을 입고 가슴을 치며 애통하는 것을 보고 도대체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들은 이맘 후세인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것을 애도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그 외국인은 "최근 뉴스에서 그런 사건을 본 일이 없는데 그가 언제 살해당했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1,30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깜짝 놀란 외국인은 "아니 그런데, 지금까지 몰랐다가 이제야 그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인가요?" 하고 물었다는 것이다. 1,300년 전에 살해된 사람을 바로 어제 일처럼 온 국민이 해마다 슬퍼하며 애도하고 있는 현상은 외국인들 보기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공공기관이나 회사에서는 '노헤갸리'라 불리는 변사를 초대하여 전 직원이 애도 행사를 한다. 노헤갸리가 감정을 총동원하여 이맘 후세인의 살해 장면을 묘사할 때 모두가 땅을 치고 통곡하며 흐느낀다. 그들은 1300년 전의 잔인한 사건을 눈으로 보듯이 생생하게 떠올리면서 시아파 이맘 후세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수니파에 대한 복수를 되새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이날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날의 사건을 이해한다면 시아파와 수니파의 골 깊은 증오심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주후 632년 애처인 아이샤의 무릎을 베고 죽었다.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가 죽기 전 가디르홈(Ghadir Khumm)이라는 연못가에서 알리(Ali)에게 "내가 누군가의 지도자라면 알리도 그들의 지도자이다"라고 언급한 것을 알리(Ali)가 무함마드의 후계자라는 공식적인 천명이라 주장하며 그 날을 기념일로 지키고 있다. 하지만 수니파에서는 그것이 알리를 공식적인 후계자로 임명하는 효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무함마드가 죽자 무슬림 공동체는 무함마드의 장인이자 애처 아이샤의 아버지인 아부 바크르(Abu Bakr)를 칼리프(후계자:Khaliph)로 합의 추대했다. 그는 2년 동안 통치하다가 독살(?)되었다(주후634년). 그리고는 무함마드의 또 다른 장인이며 아내 하프사(Hafsa)의 아버지 우마르(Umar)가 칼리프로 추대되어 10년을 통치하다가 페르시아인 피루즈(Piruz)의 칼에 살해되었다(주후644년). 이어서 무함마드의 두 딸(Ruqayyah, Umm Kulthum)을 아내로 맞이했던 사위 우트만(Uthman)이 칼리프로 12년간 통치하던 중 자객들에 의해서 암살당했다(주후656). 그 후 무함마드의 조카이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와 결혼했던 알리(Ali)가 칼리프로 결정되었다.
그 당시 무아위야(Muawiya)는 오랫동안 시리아 지역을 통치하면서 해군을 창설하고 통치 지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칼리프인 우트만과 같은 우마야드 종족이었는데 네 번째 칼리프로 세워진 알리(Ali)가 우트만의 암살범들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알리에게 우트만의 암살범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처벌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알리는 그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다. 이에 의심이 굳어진 무아위야는 알리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을 거부하고 알리의 군대와 시핀(Siffin)전투에서 최초의 내전을 벌였다(주후657). 이 전쟁은 타협으로 끝났지만 칼리프로서의 알리의 위상은 모호해졌고 알리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은 흩어져서 카리지(Kharijite)라는 그룹을 이루어 알리를 대적했다. 결국 알리는 쿠파의 모스크에서 기도할 때 카리지에 속한 이븐물잠의 칼에 맞아 살해되었다(주후661). 알리가 죽자 그의 아들 하싼(Hassan)이 후임 칼리프를 맡았지만 알리를 대적했던 무아위야는 하싼에게 충성을 맹세할 수가 없었다.그는 이미 시리아와 이집트를 통치하면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아위야는 결국 예루살렘에서 칼리프로 등극했다(주후661). 이슬람권을 통치하는 칼리프가 두 명이 생긴 것이었다. 이에 하싼은 무아위야와 협상을 했다. 두 명의 칼리프가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으니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면 칼리프직을 양보하겠다고 한 것이다. 이에 무아위야는 쿠파(Kufa)에서 칼리프직 이양식을 거행하고(주후661), 누구든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싼은 메디나로 돌아와서 조용히 살고 싶었으나 9년 만에 아내에게 독살되었다(주후670). 한편 하싼의 아버지 알리의 추종자들이었던 쿠파(Kufa) 사람들이 메디나에 살고 있던 하싼의 동생 후세인(Hussein)에게 편지를 보냈다. 무아위야의 아들인 야지드 보다는 후세인을 지도자로 섬기며 충성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무아위야가 살아있는 한 하싼과 무아위야가 맺은 평화조약이 유효하니 그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그런데 무아위야는 자신의 아들 야지드에게 칼리프직을 양도하고(주후678) 각 지역의 지도자들에게 야지드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 주후 680년 무아위야가 죽자 야지드는 메디나의 통치자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후세인에게 자신에 대한 충성 서약을 받으라고 명했다. 이에 후세인은 이를 거부하고 메디나를 떠나 메카로 피했다. 무아위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쿠파 사람들은 후세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에게 충성하겠으니 야지드를 대적하는데 자신들을 도와달라고 했다. 후세인은 사촌인 이븐 아길을 보내 쿠파의 상황을 파악하게 했는데, 후세인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함께 야지드를 대적하겠다는 사람이 1만8천명이나 된다는 보고가 왔다.
이 소식을 들은 후세인은 쿠파로 가기로 결정하고 메카를 떠났다. 그러나 야지드가 쿠파의 통치자로 이븐 지야드를 보내자 쿠파 사람들은 후세인을 배신하고 야지드를 지지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븐 지야드는 후세인이 보낸 아길을 죽였다. 후세인과 함께 쿠파를 향해 가던 무리들은 이 소식을 들었음에도 가던 길을 계속했다. 가는 길에 쿠파의 통치자가 된 이븐 지야드의 군대를 만났다. 후세인은 쿠파로 가는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며, 만일 쿠파 사람들이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메카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후세인 일행의 길을 막고 카르발라(Karbala)로 가는 길만 열어 주었다.그리고 그 곳에서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야지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유프라테스 강으로 물을 길러 가는 것도 막았다. 이븐 지야드의 군대는 마병만 5천 명 정도 되었고 후세인의 병사는 72명(마병32 보병40)이 전부였다. 후세인의 군대는 결국 거기서 모두 살해되었다.
노헤갸리(변사)가 압바스 이븐 알리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부터 듣는 이들 모두가 울음을 터뜨린다. 후세인의 병사들은 여러 날 동안 마실 물이 없어 목이 말랐다. 그 때 후세인의 배다른 형제인 압바스 이븐 알리가 유프라테스 강에 가서 물을 길어오겠다며 말을 몰았다. 화살이 빗발치듯 날아오는 적진을 향해 달려가서 포위망을 뚫고 가죽부대에 물을 담았다. 그가 가죽부대를 어깨에 메고 말에 올랐을 때 숨어 있던 적들이 갑자기 나타나 그의 오른팔을 베었다. 알리는 피가 흐르는 오른팔을 아랑곳하지 않고 왼팔로 가죽부대를 붙들었다. 왼팔까지 칼에 맞아 피가 흐르면서 힘이 빠지자 그는 입으로 가죽부대를 물고 말을 몰았다. 적들이 쏜 화살이 가죽부대를 뚫어 물이 쏟아졌다.그러자 알리는 다시 물을 구하러 말 머리를 돌렸다. 그 때 화살 하나가 그의 눈에 맞았다. 알리는 말에서 떨어졌고 자기의 시신을 후세인의 캠프로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후세인의 딸 비비 싸키나에게 물을 가져오겠다고 했는데 약속지키지 못해서 그의 낯을 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후세인을 향해 난생 처음으로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숨을 거두었다.
후세인의 죽음 장면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부터는 경청하던 시아파 무슬림들은 모두가 통곡을 한다. 수적으로 현저히 열세인 후세인은 상대방에게 자신과 1:1로 싸울 병사를 보내라고 했고, 싸움에 나오는 병사마다 그의 칼에 죽임을 당했다. 많은 병사들을 혼자 상대하다 지친 그가 잠깐 숨을 돌리는 사이 돌멩이가 날아와 그의 이마를 때렸다.흐르는 피를 닦고 있는데 화살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박힌다. 그가 손으로 화살을 뽑아내자 피가 쏟아졌다. 말리크라는 자가 칼로 후세인의 머리를 치려는 순간 텐트에 숨어있던 하싼의 어린 아들 압둘라가 달려 나와 손을 들고 막아섰다. 그들은 아이의 손을 잘라 버렸다. 그러자 후세인이 압둘라를 자신의 품에 안았다. 그 아이는 이미 화살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었다. 후세인은 피를 흘리면서 말에 올라 도망하기 시작했다. 야지드의 군대가 그를 추격했다. 시아파의 전통에 의하면 그 때 하늘에서 "내가 너의 희생과 행동을 기뻐하노라"는 음성이 들렸다고 한다. 후세인은 칼집에 칼을 꽂고 말에서 내렸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였고 피가 계속 흐르고 있었다. 나무에 기대앉은 그의 목에 화살이 날아와 꽂혔다. 목에 꽂힌 화살을 움켜쥔 후세인은 저녁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청했다. 그가 기도할 때 이븐 딜자우션(ibn Dhiljawshan)이 그의 목을 칼로 쳐서 떨어뜨렸다. 그리고 적들은 후세인의 캠프에 있는 여인들을 유린하며 소장품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시야파 종교지도자들은 수니파에 대한 증오심과 아울러 시아파의 단결을 촉구하기 위해 후세인과 알리의 참혹한 죽음 이야기를 좀더 살을 붙여 반복해서 들려주고, 그들에 대한 애도를 국가적 행사 및 축제로 승화시켰다. 이란인들과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러한 행사를 멈추고,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 이들의 증오가 화해로 승화될 수 있을 것이다.
* 위 글은 한국이란인교회 홈페이지(4him.or.kr)에서 가져온 글임을 밝힙니다.